진(秦)・한(漢)시대
중국미술사 l 진(秦)・한(漢)시대
왕궁 미술로 꽃피운 문화
진,한 시대는 정통적인 중국의 한족 문화가 통일되면서 자리잡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독특한 문화양식이 있다기 보다 전 시대를 계승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종이와 붓 등의 도구적 발달과 유교사상, 서역과의 교류 등으로 이후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는데 디딤돌이 되는 시기이다.
진(秦)・한(漢)시대
중국미술사 l 진(秦)・한(漢)시대
왕궁 미술로 꽃피운 문화
진,한 시대는 정통적인 중국의 한족 문화가 통일되면서 자리잡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독특한 문화양식이 있다기 보다 전 시대를 계승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종이와 붓 등의 도구적 발달과 유교사상, 서역과의 교류 등으로 이후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는데 디딤돌이 되는 시기이다.
한(B.C. 202~A.D. 220)
한 제국은 동쪽으로는 고조선의 일부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남으로는 베트남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만리장성: 총 길이는 5,000km
북방의 이민족인 흉노족의 침입에 대배하기 위해 진나라 시황제가 이전 연나라와 초나라 때 건축되었던 장성을 기초로 하여 만든 성벽이다. 이 만리장성은 청대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되었다. 청대 이후에는 군사적인 의미는 소실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만주, 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중국총 길이는 5,000km나 되는 장성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진시황릉: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 둘레 5km
중국 산시성에 있는 시황제의 무덤으로, 연간 약 70만 명이 동원되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성하였다.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 둘레 5km에 달하는 지하 왕궁으로 모두 3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까지는 1호분과 2호분이 발굴되었다. 1호분에서는 실제 사람의 크기의 토용들이 6,000여개 발굴 되었고, 2호분에서는 1,400여 개의 토용과 말의 소조상이 발굴되어 놀라운 규모와 문화적 위용을 보여준다. 이러한 출토물들은 당시 생활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며 고도의 사실적인 묘사로 생명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진시황제
호숫가에서 새들을 쏘고 추구하는 화상전(畵像傳)
채회와전(彩繪瓦塼) 인물화, 높이 19.4cm, 보스톤 미술관
사신운기도, 3.27x5.14m, 허난성박물관
진・한 시대는 정통적인 중국의 한족 문화가 통일되면서 자리잡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독특한 문화양식이 있다기 보다 전 시대를 계승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종이와 붓 등의 도구적 발달과 유교사상, 서역과의 교류 등으로 이후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는데 디딤돌이 되는 시기이다.
시대적 배경
기원전 3세기 말경에 진. 한 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에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시대에는 북으로는 한반도 북부지방, 동으로는 요동반도, 남으로는 인도차이나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진. 한 말에서 후한 초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의 불교가 전파되어 고대 중국 미술에 전해진 불교 미술이 융합되면서 중국미술의 획기적인 발전과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진나라는 시황제라는 황제 하에 철통같은 법치국가가 성립이 되었다. 이에 따라 봉건 귀족들은 특권을 모두 박탈당하고, 옛 주나라 시대의 영광을 회상시켜주는 모든 것을 말살하기 위해 고서(古書)를 모조리 태워버리는 분서갱유를 한다. 그러나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의 정책은 중국을 하나로 묶게 되었고, 거대한 미술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러한 정책에 대항해 소수의 지식인들이 흩어져있는 부족들과 제후국을 통일함으로써 처음으로 중국을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실체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는 독자적인 양식의 발달 보다는 대체로 이전 시대인 춘추전국 시대의 미술양식을 계승하였다.
이 통일은 그 후 한나라에 계승되어 더욱 인간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진한시대는 고대 통일 제국의 완성을 이루었고, 후한 시대는 중국 문화의 완성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인들은 이 시대를 돌이켜 보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들 스스로를 ‘한민족’ 이라고 부르고 있다.
진(秦)나라
한(漢)나라
한나라 무제가 즉위하면서 한나라는 태평성세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무제의 즉위와 함께 연호(年號)를 사용하도록 하여 이후 동아시아의 문화권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가부장적인 사상과 충효사상 그리고 삼가오륜의 윤리를 강조하는 유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제도화하였고, 이 유교사상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유교문화권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예교주의(도덕, 예의, 충효를 주이하는 사상)는 회화의 표현에도 큰 영향을 미쳐 한나라 때 전해지는 벽화는 예교주의와 관련된 내용들이 주된 소재가 되었으며, 벽화 속의 인물 등이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후한 105년 에는 환관인 채륜에 의해 종이가 만들어 졌으며, 종이의 발명은 학문과 예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교류로 인해 인도의 불교문화가 흡수 되면서 토착문화와 융합되었다. 한나라 때는 이전 시대의 문화 예술을 정리하여 집대성하였으며, 이후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전통 문화 위에 외래문화를 흡수하여 지속적으로 중국문화를 발달시켰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박지향
미술의 싹을 피우다
왕궁 미술로 꽃피운 문화
예술로 인식되는 중국미술
중국미술의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복고주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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