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미술

서양미술사 l 18C 이전

유럽의 천년의 역사: 비잔틴에서 로마네스크, 고딕으로

400년부터 1400년에 이르는 천년 간의 시대를 역사가들은 중세라고 부른다.
중세문명은 기독교와 그레코-로만의 전통이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켈트-게르만족의 새롭고 활기찬 정신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 수태고지

    1333년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화부분, 시모네 마르티니, 우피치미술관, 피렌체

  • 산피에트로와 마르첼리노 카타콤 천정화

    AD4세기, 로마

  • 하기아소피아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 532~37, 이스탄불

  • 그리스도의 매장

    1250년~1300년경 필바본기도서의 한 페이지

  • 그리스도를 애도함

    조토, 1305년경, 프레스코화, 델 아레나 성당, 파도마

  • 오월

    랭부르 형제, 1410년경 '베리공작의 기도서'의 매우 행복한 시절 중에서, 샹티이콩데미술관

  • 랭스대성당 서쪽정면

    1225~1229년경, 프랑스

Description

400년부터 1400년에 이르는 천년 간의 시대를 역사가들은 중세라고 부른다. 중세문명은 기독교와 그레코-로만의 전통이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켈트-게르만족의 새롭고 활기찬 정신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시대적 배경

서기325년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다. 그 이후 329년 로마제국이 분할된다. 동로마는 비잔틴제국이라고 불리며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발전하고, 서로마는 곧 타민족의 침략을 받아 붕괴(476년)하게 된다. 이후에 이어지는 400년부터 1400년경까지를 중세시대라 부른다. 

 

암흑의 시대라고만 알려져 있던 중세는 18세기 후반 이래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기독교문명(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로마의 예술)과 타민족(켈트-게르만족)의 새롭고 활기찬 정신과의 충돌과 조화의 상호관계를 통해 발전해 온 역사라고 재조명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시기는 진보된 기술의 발전을 이룩하고 교회가 노예제도를 비판하고 노동과 기술에 가치를 두게 됨으로써 교회가 더욱 힘을 얻게 되고 자유로운 장인계급은 길드의 조직을 통해 중세도시경제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자유시민이 거주하던 도시는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오늘날 번창하는 대부분의 유럽도시들의 모체가 되었다. 

 

중세의 시작_초기 기독교미술

초기 기독교시대는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한 서기 325년부터 서로마 지역이 야만족 왕국들의 지배하에 있던 50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가 합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박해와 수모를 받았으며 박해가 심해질수록 사람들은 로마의 지하묘소 카타콤에 숨어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래서 카타콤의 벽과 천장에는 초대기독교인들이 남긴 벽화가 남아있다. 


 

비잔틴미술_중세미술의 황금기

비잔틴미술이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기원후 330년경부터 투르크족에게 멸망하는 1453년까지 지속되었던 지중해동부지방의 예술이다.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 멸망하여 잿더미에 파묻혀 있는 동안 비잔티움은 화려한 색채와 장식성을 띈 동방 그리스 취향의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다. 

 

-모자이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모자이크가 터키의 비잔티움과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제작되었다. 내용은 대부분 종교와 관련된 것이고 예수는 전지전능의 지배자나 설교자로 묘사되었다. 726년 성상금지령이 내려지고 모자이크제작이 주춤하였으나 850년~1200년 제2의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성상화(Icons)

성상화는 자그마한 나무판에 그려지는 그림으로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성상에 대한 숭배가 강하게 퍼지자 726년~843년간은 우상숭배라고 금지시키기도 했다.

 

-하기아 소피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세계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에 장대한 교회를 세우기로 마음먹고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라는 수학자에게 건축을 위임했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를 지닌 하기아 소피아는 축구장 크기의 3배가 넘으며 로마의 직사각형 바실리카위에 돔을 올려놓은 형태로써 비잔틴 건축공학인 삼각궁륭에 의해 가능했다. 4개의 아치가 정사각형모양을 형성하여 돔을 지탱하는 구조는 처음 시행된 것이며 이러한 구조의 혁신으로 돔을 더 높게 올릴 수 있었고 그 결과 내부는 더욱 넓고 확 트인 느낌을 준다. 


 

로마네스크 미술_건축과 조각

-건축, 궁륭의 이용

로마네스크는 로마와 같은 이라는 뜻으로 주로 유럽의 전형적인 건물들은 두꺼움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로마의 석조건축과 닮았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징적인 형태는 궁륭이다. 궁륭은 석조로 된 둥근 지붕으로 아피와 버팀기둥의 체계이다. 석조 궁륭구조의 최대이점은 내화성이다. (그 이전의 교회건축은 대부분 짓기가 수월한 목재지붕이었는데 이것은 화재의 손실을 입을 수 있었다.) 이후 원통형궁륭에서 발전하여 교차궁륭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견고하고 고료하며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로마네스크교회; 순례의길

중세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성지순례를 했는데 (예수가 살았던 예루살렘과 교회행정중심지 로마, 야고보가 묻힌곳으로 알려진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등지였다.) 교회건물은 순례자들을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교회는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고, 아케이드는 순례자들이 미사를 보고 있는 신자들을 방해하지 않고 옆에 있는 측랑 복도를 통해 걸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조각: 팀파늄

로마네스크 성당 외부는 정문 주위의 부조조각을 빼고는 소박한 느낌을 준다. 당시 신자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기 때문에 석조에 교리를 새겨넣음으로써 신자들에게 교리를 전차할 수 있었다. 이 조각들은 대부분 정문의 상인방 위에 아치 아래의 반원형 공간의 팀파늄에 집중되었다.

 

 

고딕미술_높이와의 싸움

고딕양식은 1140년대 쉬제르라는 인물의 천부적 재능에 의해 시작되어 1200년~1500년 사이의 건축가들은 높이 솟구친 내부를 지난 복잡한 구조물을 건설했다. 이런 대성당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늑골 궁륭과 부연 부벽 이라는 외부 버팀목의 발명 때문이었다. 이러한 힘의 분배로 육중한 벽과 작은 창 대신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더 크게 낼 수 있었다.

 

-조각; 길고 야윈 조각상

성당의 외벽에는 성경의 내용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사르트르 대성당과 랭스 대성당의 조각을 비교하면 중세미술의 조각양식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1140~1150년 사이에 만들어진 조각상은 구약성서 속의 왕과 왕비가 있는데 그들은 좁은 기둥에 몸을 맞추기 위해 길게 늘어나 있다. 옷의 선도 몸체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직선적이어서 사실적이지 않으며 침착한 표정이다. 

 

그런 1225~1290년 사이에 제작된 랭스성당의 조각을 보면 거의 건축적인 배경에서 독립하여 기둥 아래의 받침대 위에 서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재발견된 이 후로 중세철학은 더 이상 육체를 사악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표정과 몸짓은 자연스럽고 옷 주름도 풍부하다. 

 

-스테인드 글라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중세시대의 것 중 가장 잘 보존되어있는 것이며 전 면적이 약 896m에 이른다. 성인의 일대기나 성경속의 이야기를 삽화로 그리는 프랑스의 전통 공예를 생각해보면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거대한 채색 사본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것은 액체유리속에서 구리나 망간 철 등의 금속산화물을 섞어 완전한 색상을 만들어 내는 고도기술이다. 

 

-타피스트리

중세 직조인들은 당시의 일상 생활을 묘사하는 타피스트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양모와 실크가 배합된 걸개들이 성이나 교회의 차가운 석조벽을 장식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유니콘에 대한 전설을 담은 것인데, 그 형상이 시각적으로 아주 모호하며 주변의 화초들이 이차원적으로 처리되어있는 모습이 고딕 시기를 대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딕말기_르네상스의 전초

이탈리아인들에게 조각과 회화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뛰어넘게 만든것이 비잔틴미술이었다. 왜냐하면 헬레니즘 미술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네치아같은 비잔틴 제국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도시를 통해서 이탈리아 화가들은 획기적인 미술을 발전시키는데 그 중에 조토의 회화를 들 수 있다.

 

-조토 디 본도네

미술사 책은 대게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을 시작한다. 조토는 프레스코 작품으로 유명한데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했다. 거의 이집트미술처럼 완전한 모습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면화를 그려오고 있던 중세미술을 획기적으로 바꿔버렸다. 조토의 회화는 알프스 이북의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또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남유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피렌체(조토가 활동하던 도시)의 라이벌이었던 시에나에서는 ‘두초’라는 화가가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는 비잔틴예술을 그대로 소화하면서도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으로 성공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의 회화는 그 이후로 많은 발전을 이루는데 <랭부르형제>에서는 배경이 인위적이고 아직 얼굴표정이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완전히 상징적인 것들로만 채운 것이 아니라 세부묘사들이 현실생활에서 따온 장면의 하나처럼 보이도록 조합되어있다. 

 

그러나 이후로 하나의 미술가들의 임무는 바뀌었다. 이제 공식을 대입하는 식의 작업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스케치를 할 수 있어야 했고, 그대로 그림에 옮겨 담을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미술품을 관람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그림 속에 얼마나 많은 양의 뛰어난 묘사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르네상스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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