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을 따라가며, 주변을 배회하고, 중심에 다가서려는 Tracing, Detouring, Piercing

2020.01.10 ▶ 2020.01.30

갤러리 학고재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89길 41 (청담동) B1 학고재 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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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짓을 따라가며

    몸짓을 따라가며, 주변을 배회하고, 중심에 다가서려는展

  • 신민

    전시전경

  • 신민

    전시전경

  • 신민

    전시전경

  • 신민

    전시전경

  • 한성우

    무제 2019, 캔버스에 유채, 181.8x227.3cm

  • 신민

    전시전경

  • 신민

    워커스 2019,목판에 연필, 73x91cm

  • 전명은

    글라이더-서클스 IV 2019,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45x60cm

Press Release

본 전시,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사업 99℃ 쇼케이스전 『몸짓을 따라가며, 주변을 배회하고, 중심에 다가서려는』은 시각 분야(99℃)를 통해 선정된 세 명의 작가 신민, 전명은, 한성우 총 3인이 참여하는 전시이다. '쇼케이스'라는 전시의 성격상 완성된 형태나 내용보다는 이들의 현재적 고민을 바탕으로 창작의 과정에서 각자가 당면한 이슈, 그리고 그에 따른 실험을 선보이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이는 다년간(2년) 지원이라는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 사업의 성격을 반영하고, 전시라는 형태가 요구하는 완성도나 결과물 중심의 형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선정된 개별 작가가 설정한 주제나 개념의 발전 단계를 살피는 것이며, 그들의 작가적 태도를 기반으로 매체나 형식에 따른 고유의 실험을 촉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 작가가 설정한 문제의식과 그에 따른 창작의 궤적을 최대한 고려하고자 전시를 하나의 키워드나 주제로 묶기보다는, 하나의 전시 공간 안에 세 개의 개별적인 주제, 작가가 존재하는 전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텍스트로 다잡을 수 없는 감각적 차원을 보유하고 있기에, 전시는 각 작품을 감각적 차원에서 연결, 연동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전시는 다른 주제나 형식, 매체의 이질적 충돌을 공간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비교, 대조되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미술 실천이 마주하는 다층적 독해와 이해의 가능성을 감각적 이합집산의 방식으로 다루어낸다.

신민
신민은 조각, 설치, 드로잉의 형식을 통해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억압을 고발하고 그에 대해 비판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아래 작동하는 현실의 노동 현장과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다양한 여성 노동자들에 주목한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를 통해 사회 시스템이 강요하는 표준과 규범으로서의 상을 의도적으로 어기고 도발한다. 그의 작업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유머러스하게 표현된 분노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감정 노동을 수행하는 타자화된 존재들, 취업 시장의 사각에 내몰린 여성들을 대변한다.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다룸에 있어서 특정 대상을 경유하여 그것을 드러내기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대상화'의 문제는 그녀의 작업 과정에 있어서 주요하게 고민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본 전시에서 신민은 '머리망'을 한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조명하고, 여성 서비스 노동자의 일원으로 소속됨과 동시에 강요받는 기준들의 모순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방식은 사회적 도리나 범절과 같이 통념적으로 표준화된, 하지만 부조리한 형상에 반하는 분노하는 여성의 이미지와 함께 그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는 주체적 형상으로 나아간다.

전명은
눈앞에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이미지 너머, 이전과 이후를 연결 짓고, 상상하게 하는 전명은은 사진을 주요 매체로 다룬다. 그녀의 사진은 피사체의 고정된 조형적 아름다움을 넘어, 그로부터 비롯된 어떤 확장된 상상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사진에서 피사체는 정지된 상태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며,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하는 감각에 가깝다. 이를테면 작가의 사진에 담긴 특정한 오브제는 오브제를 다루는 주체의 행위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의 시선이 가닿는 모종의 지점까지를 매개하는 차원에서의 사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에 그녀는 겨울이라는 계절, 그리고 그 풍경이 가진 정지되고 움츠린 이미지로부터 생명력이 새롭게 솟아나는 시간을 연상하게 하거나, 조각가가 남긴 조각으로부터 감각의 한 극단에선 개인이 뿜어내는 고도의 생명력을 감지하게 하였다. 본 전시에서 전명은은 신체적으로 가장 완성된 상태라 할 수 있는 젊은 체조 선수들과 그들이 관계 맺는 도구에 주목한다. 체조실에서 시작하여 안마와 마루를 잇는 본 작업은 문학이나 영화 속의 한 장면, 또는 음악의 선율이나 애정어린 대화의 시간을 닮아있다. 그렇게 그녀의 사진은 정지된 화면 안의 대상에, 그리고 그들의 감각이 가장 예민해지는 어떤 순간에, 더 나아가 그것을 담아낸 한 명의 사진가에게 동시적으로 눈을 머무르게 한다.

한성우
과거 인적이 사라진 공간이나 벽, 바닥에 남겨진 흔적 등을 담아내던 한성우의 회화는 근작으로 넘어올수록 일상에서 마주한 어떤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으로 귀결되며 추상적 형상을 띄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화면은 두께를 축적하기 위해 얇거나 두껍게 쌓아 올린 붓질의 반복으로 이전의 물감을 덮어버린 채 명확한 이미지에 고착되길 거부한다.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을 문법적 기능 차원에서 사용하는 부사에 비유하곤 한다. 그의 작업 과정은 마치 이미지로부터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어떤 정서를 포착하기 위해 그리기라는 행위 위에 그만의 수사를 계속해서 더하거나 빼는 듯하다. 이는 회화라는 이름으로 그려내는 이미지가 담아낼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태도 아래 재료가 가진 물성과 이미지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는 행위의 연속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긍정과 부정의 사이로부터 표출되어 캔버스 위에서 속도와 강도의 차이와 중첩으로 만들어진 긴장과 갈등, 조화의 상태는 대상이 언어로 서술되기 이전, 하나의 의미로 속박되기 이전에 그것이 가진 본래의 모습에 다가서기 위한 가장 충실한 방법일 수 있다.

쇼케이스, 전시, 그리고 어떤 진술 - # 1
이번 전시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을 '쇼케이스'라는 단어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굳이 그 뜻을 일일이 풀이할 필요 없이 이미 우리끼리 공유하는 어떤 개념으로 이 단어의 의미, 그러니까 쇼케이스란 무엇이며, 어떤 성격을 가진 행사라는 것을 대략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약간의 수고를 더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아도 규범 표기는 미확정으로 나오는 이 용어의 개념은 새 음반이나 신인가수를 알리기 위해 갖는 조금 특별한 시범, 혹은 시험 공연 즈음이다. 이 정도 개념이라면 우선, 음반이나 가수라는 말 앞의 수식어, 즉 '새' 혹은 '신인'이라는 말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이미 익숙하고 완숙한 무엇을 선보이기보다는 약간 낯설더라도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를 알리는 자리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최종본보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내재한 과정에 해당하거나 혹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실험에 충실한 전시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해 안에서, 적어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쇼케이스'의 설익음에 기대어 핑곗거리를 살짝 장착한 채 모험을 감행해도 무방할 것이다.

# 2
잠시 다시 이 쇼케이스라는 용어를 곱씹어보자. 그리고 앞서 받아들인 이해를 상기한다면 '전시', 그러니까 결론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를테면 과정에서의 담론조차도 고정된 시각적 아웃풋으로 제시해야만 하는, 또는 그래야 하길 요구받는) 전시의 이 시점은 곧 쇼케이스와는 본질적으로 살짝 어긋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실 창작 주체가 감행하는 여정이 목적지에 다다르기 이전에 잠시 멈춰서 중간 점검을 해야 하는 이 상황이 전시라는 형식으로 다루어지는 순간 어떤 이유에서든 그리 관대하게 받아들여질 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따낸 다년간의 창작 지원은 평소와는 다른 조금 긴 호흡을 허락했지만, 제도적 차원의 결과물을 위해 잠시 제동을 건 순간이 지금의 전시이며, 간혹 그것이 작가 개인의 페이스에 따른 안정된 착지가 아닌 불시착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결국 전시는 앞뒤의 관계를 대략 삭제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어떤 관습적 행위가 되어버린 지도 모른다. 게다가 창작의 본질이 우선은 비물질적인 사유의 전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라는 보임의 영역에서 물리적 실체와 결과로 결정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쯤 되면 반대로 '쇼케이스'란 용어를 제목에 적어 넣음으로 관습적 기대에서 살짝 벗어난 관람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 3
본 전시는 하나의 주제어로 묶이는 전시가 아니다. 오히려 '쇼케이스'라는 성격 아래 각 작가가 최근 고민해온 각자의 이슈에 충실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전시 안 전시'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하나의 공간 아래에서 진행되는 한 관습적으로 우린 하나의 전시로 그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공간 안에 펼쳐진 하나의 (타이틀 아래 진행되는) 전시는 개별 작가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며, 서로 다른 실험을 감행할지라도 어떻게든 하나로 엮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공간에서 시각이라는 신체 감각으로 담기는 한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만약 그것이 하나의 강제적인 키워드나 주제로 묶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래서 한 공간 안에 여럿의 개인전처럼 구성되었을지라도 각 작업은 서로 꼬리를 문다. 감각적 차원에서든, 현실과 사건에 대한 견해나 태도에서든, 혹은 매체를 다루는 형식이나 방식 차원에서든 서로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공간은 조화가 아니라면 비교와 대조의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뒤섞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관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문제일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어떻게 다루고 또 엮어내느냐 하는 것, 그러니까 전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것을 얼마나 인정하고 그것을 조작하느냐의 문제는 곧 전시의 작동 방식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경험의 영역으로 연결되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비교 대조의 논리는 하나의 전시가 하나의 발언으로 수렴하지 않고, 오히려 다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며 다성적 차원으로 확장해내거나, 하나의 전시-이미지 안에 여러 풍경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작품을 언어로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작품은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미끄러지길 반복한다. 언어와 감각은 일대일 대응이 불가하며, 전시는 그렇게 말로 표현되지 않는 모종의 공모를 전제로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작품들을 감각적 차원으로 한데 묶어 본다면 조금 다른 경험의 차원으로 조직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작품의 위치와 놓이는 방식을 통한 공간의 변주, 또는 작품을 지지하는 구조물의 형식과 형태 등 작품과 공간 사이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것들의 총합을 새롭게 산출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4
그렇다면 이 전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첫째로, 가장 분명한 정보, 즉 '쇼케이스'는 선후 관계를 배제한 채 단순히 눈앞의 결과물을 절대적 미의 기준에서 판단하게 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작가의 전작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 그가 바라보는 대상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거나, 쭉 이어온 서사에서 탈구된 한 장면이 갖는 미학적 가치에 관해 얘기할 수도 있으며, 다루는 재료와 그것이 담아낼 수 있는 내용의 형식적 가능성을 탐색할 수도 있을 것이고, 수행적 차원에서 창작 주체가 취하는 대상과의 시선의 거리나 태도에 대해 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앞서 감각적 차원이라고 말한 어떤 공간적 차원에서 담기는 작고 미세한 것들, 다시 말하면 전시 차원에서 능동적인 경험을 끌어내려는 행위는 각 작가와 작품의 개별성을 넘어 고정된 이미지로서 구축된 물리적 경계를 허물고, 비교, 대조하는 차원에서 확장된 논의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지난 시간, 적어도 미술 안에서, 과정에 대한 담론을 나름 전개해왔던 전적이 있다. 이는 창작의 방식을 토대로 과정의 담론을 다루고 그것의 예술적 가능성을 극대화시켜 보여줌으로 오늘날의 삶의 방식에까지 질문을 제기하거나, 혹은 자본의 흐름을 따르는 경향성의 반대편에서 과정 중심적 담론을 전개함으로 되찾고자 하는 어떤 기준에 대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과정에 대한 문제를 이슈로 살폈던 예술 실천의 다양한 양상은 곧 과정이 행정적인 결과물을 제시하는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창작의 오브제로 다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시라는 관념적 이미지 안에 쇼케이스라는 이름으로 확보한 조금 다른 차원은 개별 창작 주체가 고민하는 '지금'의 주제와 이슈에 조금 더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잠재적 형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이는 그저 저자가 생산한 언어에서 결론지어지기보다는, 그 언어에 타인이 적극적으로 틈입할 기회, 즉 전시라는 형식 안에서 쉽게 허용되지 않았던 외재적 관점을 관대하게 허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율성과 타율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점진적 발전의 논리가 가능해지는 시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김성우


* 서울문화재단(대표이사 김종휘)이 데뷔 10년 미만의 전도유망한 예술가를 지원하는 '유망예술지원사업'은 'NEWStage (연극 분야)', 'dot(무용 분야)', 'MAP (음악 · 전통 · 다원 분야)', 99℃ (시각 분야) 등 총 4개 사업을 통해 데뷔 10년 미만의 예술가, 또는 설립 10년 이하인 예술 단체가 새로운 예술 흐름을 이끌고 역량 있는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입체적 지원을 한다. 이를 위해 신진 본 사업은 예술가가 긴 호흡으로 창작 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으며, 2년간 연속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년간의 지원은 더욱 실험적인 시도를 펼칠 기회를 보장하고, 안정적인 창작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하는 창작지원금과 작품 성장지원(멘토링, 비평, 워크숍 등), 연습 및 발표 공간 지원, 통합 홍보 등도 제공한다.

전시제목몸짓을 따라가며, 주변을 배회하고, 중심에 다가서려는 Tracing, Detouring, Piercing

전시기간2020.01.10(금) - 2020.01.30(목)

참여작가 신민, 전명은, 한성우, 몸짓을 따라가며 주변을 배회하고 중심에 다가서려는展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89길 41 (청담동) B1 학고재 청담)

연락처02-3448-4575

Artists in This Show

신민(sin min)

1985년 출생

전명은(Chun Meong-Eun)

1977년 출생

갤러리 학고재(Gallery Hakgojae) Shows on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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