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 (Yanagi Muneyoshi)

2013.05.25 ▶ 2013.07.2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관

Map

초대일시ㅣ 2013-05-24 16pm

  • 야나기 무네요시

    시라카바 1918

  • 야나기 무네요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아담을 심판하는 신>(복제판화) 20세기초

  • 야나기 무네요시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숲 속의 호랑이> 1946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 <철사운죽문항아리> 17세기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 <연잎형개다리소반> 19세기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 <담배상자> 20세기

  • 야나기 무네요시

    모쿠지키 쇼닌 <허공장보살상(虚空蔵菩薩像)> 1801

  •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 <적토에 흑유가 흐르는 문양이 있는 호> 14세기

  •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 류큐(琉球) <미에즈(문양 샘플)> 19세기

  • 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 1920

  • 야나기 무네요시

    공예 1931~1943

  • 야나기 무네요시

    어디라고 해도 부처님 손바닥 미정

  • 야나기 무네요시

    1인용 의자, 2인용 벤치, 테이블 1955

Press Release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현민)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일본민예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 《야나기 무네요시》전을 5월 25일부터 7월 21일까지 개최한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는 일본의 근대 공예운동가, 이론가, 수집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번 전시는 그가 평소 수집하고 소장했던 일본민예관 소장품 중에서 작품과 자료를 포함한 139점을 통해 그의 공예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서양의 근대문예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일본에 소개하면서 새로운 미학, 특히 공예관을 만들어내었다.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조선, 중국을 거쳐 일본, 대만에 이르렀고 특히 영국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와 문화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서양 미술 교류에도 힘썼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이 만들고 사용하는 생활용품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의 ‘민예론’을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의 예술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의 공예론이 형성된 과정과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저술만을 주로 접해왔던 한국 관람객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미학을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생활을 위한 문화를 의미하는 민예의 개념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예술적 감성을 담아내고자 하는 오늘날의 모습을 반추하기 위하여 이번 전시를 마련하였다. 산업구조의 급진적인 변화와 정치적인 혼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예술이란 인간 본연의 삶과 정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야나기의 예술론은 옛 것의 보존과 계승을 위한 퇴보적인 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시점, 지역, 자연에서 제작, 사용, 발견되는 일상적인 것의 가치를 되살려 내일의 창조를 이끌어나가려는 시도였다.

□ 제1부: 서구 유럽 근대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 - 시라카바(白樺), 윌리엄 블레이크 그리고 버나드 리치
1910년대부터 일본의 미술계에서는 일본과 유럽의 교류를 도모하고 유럽예술계의 정보습득과 새로운 경향을 이입하려는 노력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잡지『시라카바(白樺)』는 1910년부터 1923년까지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 문학가), 무샤노코지 사네야츠(武者小路實篤, 1885~1976, 문학가),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1891~1929, 화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81~1930, 종교 사상가) 등이 참여하여 기독교 신학을 비롯한 서양철학, 서양미술 등 서양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역할은 기획, 편집에서부터 표지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졌다. ‘시라카바’ 동인은 잡지발간 이외에도 강연회, 전시회 등의 활동을 펼쳤고 1920년에는 시라카바미술관을 설립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서양으로 눈이 향해있던 야나기는 1914년에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고, 19세기~ 20세기 초에 제작된 블레이크의 복제판화(William Blake, 1757~1827)를 수집하여 1919년에 《윌리엄 블레이크 복제판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야나기는 1909년에 일본을 방문한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로부터 에칭 제작방법을 배우고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를 접하게 되었다. 1909년부터 영국으로 귀국하는 1920년까지의 일본체류기간 동안 버나드 리치는 야나기에게 단순히 서양미술을 소개하는 매개자로서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 겸 예술가로서 그를 통해 동서양의 예술관을 공유하는 예술동반자였다. 그들의 관계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리치가 서구에 야나기를 알림으로써 서구 공예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잡지『시라카바(白樺)』는 이러한 예술계의 풍조를 잘 반영하여 철학, 종교, 문학, 미술을 종합적으로 다뤘던 잡지로서 1910년부터 1923년까지 발간되었다. 이 잡지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 문학가), 무샤노코지 사네야쓰(武者小路實篤, 1885~1976, 문학가),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1891~1929, 화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81~1930, 종교 사상가) 등이 참여하여 기독교 신학을 비롯한 서양철학, 서양미술 등 서양 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는 기획, 편집에서부터 표지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역할을 수행하였다. 로댕은 생전과 사후 추모 특집 기사로 다루어져 『시라카바』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되었으며 자신의 소품 3점을 일본에 선물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직접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라카바’ 동인은 잡지 발간 이외에도 강연회, 전시회 등의 활동을 펼쳤고 이들의 활동을 통해 로댕, 렘브란트, 세잔, 반 고흐, 고갱, 인상파 등이 소개되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인, 화가, 판화가로 활동했는데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시 뿐만 아니라 미술작품을 통해서도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고딕미술과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연구하였고, 이러한 작품들은 인간의 육체적 힘과 정신을 함께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블레이크는 화면의 극적인 연출과 인물의 위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화면을 구성했던 미켈란젤로의 영향 이외에도 묵시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를 첨가하여 상상력이 넘치는 화면을 만들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성하며, 미를 통해 출현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블레이크의 사상은 야나기와 버나드 리치에게 영향을 주었고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과 서양의 구분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영구적인 예술을 꿈꾸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점차 블레이크를 통해 야나기와 버나드 리치는 조선의 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서양으로 눈이 향하고 있던 야나기는 1914년, 25세에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그의 생애와 제작 및 사상』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또한 야나기는 20세기 초에 제작된 블레이크의 복제판화를 수집하여 1919년 《윌리엄 블레이크 복제판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야나기는 1909년에 일본을 방문한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로부터 에칭 제작방법을 배우고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를 접하게 되었다. 버나드 리치는 시라카바 동인들과 함께 어울렸고 잡지 제작에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야나기와 버나드 리치와의 교유(交遊)관계는 특별했다. 버나드 리치는 홍콩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동양 문화를 접하였고 일본문화에 매료되었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 도자, 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동양 미술의 재료와 제작 방법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야나기와의 교류가 뒷받침되었다. 1909년부터 영국으로 귀국하는 1920년까지의 일본체류기간 동안 버나드 리치는 야나기에게 단순히 서양미술을 소개하는 매개자로서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이자 그를 통해 동서양의 예술관을 공유하는 예술 동반자였다. 그들의 관계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서구에 야나기를 알림으로써 구미(歐美)공예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은 전후 그의 작품 중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서 4장의 타일로 구성되어 독특한 디자인의 철제 테두리로 형태를 잡은 작품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림은 목판화 작품으로 제작했던 『시라카바』 1913년의 표지를 다시 철유로 그린 것이다. 작품의 윗부분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호랑이>(경험의 노래, 1794))시의 일부분(‘Tyger! Ty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을 삽입하였고 아랫부분은 호랑이, 나무 그리고 소녀를 그렸다.

야나기가 조선도자기를 접한 시점은 1909년 『시라카바』 활동을 준비할 무렵 골동품점에서 모란무늬 항아리 한 점을 구입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심이 조선으로 향하게 된 것은 조각가였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로부터 선물받은 조선시대 도자기 한 점을 보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사카와 형제들의 도움으로 그는 경성(현 서울), 경주 등 잘 알려진 도시를 비롯한 계룡산 가마와 같은 공예품 생산지를 여행하여 수집을 행하였다. 그가 수집했던 공예품은 식민지 조선에서 사람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지 않았던 것들을 수집하였는데 고려시대, 조선시대 도자기를 시작으로 하여 가구, 각종 기구, 회화, 자수, 금속공예, 목공예, 석공예 등 전방위에 걸쳐져 있다. 야나기는 이러한 공예품에는 조선민족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고,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야나기는 조선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일본군의 탄압에 의해 소실될 수도 있음을 우려하였고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야나기는 이러한 수집활동을 통해 전개했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미에 대하여 나름의 견해를 내세웠다. 1916년부터 1940년까지 21차례에 걸친 조선 여행을 통해 야나기의 조선예술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점차 변화하여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예술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것’으로서 ‘무심’, ‘무작위’, ‘무의식’과 같은 개념으로서 설명하였다. 20세기 초 한국에서 미술사에 대한 개념과 지식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그의 미학은 일본이 창출한 조선의 이미지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였고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예술이 야나기의 미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동양사상과 종교의 구태의연한 전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구근대문화와 기독교사상을 추종하였던 야나기의 시각과 사상을 동양을 회귀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동양미의 재인식은 이후 그의 예술론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도록 이끌었으며 종교미술, 민예론에 대한 체계화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1916년 8월 야나기가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 때 부산에서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영접을 받았다. 곧이어 그는 부산의 고물상에서 이 작품을 보고 구입하였고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조선 도자기의 수집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이 고려청자에 집중되어 있던 반면 조선시대 백자를 주목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좋은 조선백자를 구할 수 있었다. 지속적인 조선 여행을 통해 그는 조선시대 도자기와 도공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는 조선시대 도자기에는 ‘정(情)’과 ‘화(和)’가 있어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게 만드는 미의 신비가 있다고 말한다. 야나기는 이 작품을 철자로 그림을 그린 호 중에서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하고 철사의 독특한 필치가 자유롭고 단순하게 그려졌다고 평가하며 그 자유로움이 특히 강하다고 말한다.

□ 제3부: 주변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예

동양의 아름다움에 대한 야나기의 시각은 이제 중국, 만주, 일본 등지로 확대되어 야나기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차례 중국을 방문하였고 여러 지역의 공예품을 수집하였다. 조선과 중국 여행을 통해 받았던 문화적 영향이 컸던 만큼 야나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서양으로의 관심을 동양으로의 관심으로 바꾸었다. 야나기는 1924년 모쿠지키의 불상을 우연하게 발견한 이후 소박하고 건강하며 동시에 깊은 종교적 의미를 담은 이 불상에서 ‘특별하지 않은 미’를 발견하였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쿠지키의 불상을 조사하였고 일본 전국에서 300개 이상의 불상과 자필문서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그는 『모쿠지키쇼난연구(木喰上人之硏究)』(총7권) 저서(1925년)를 발간하여 모쿠지키에 대한 재발견의 계기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한편 야나기는 모쿠지키 불상 조사 중 맞닥뜨린 대중적이면서 흔한 공예품으로부터 무명의 사람이 제작한 평범한 물품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민예’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이 말은 ‘민중적 공예’라는 의미로서 민간에서 사용되는 일상품을 의미하며, 고급미술을 의미하는 예술보다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실용적인 공예를 강조하게 된다. 야나기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 본토, 아이누, 류큐 등지의 민예품에도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수집하였다. 야나기가 수집했던 지역의 민예품은 대부분 자연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들이었다. 이론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야나기에게 수집이란 하나의 관점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통일하는, 일종의 창작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야나기는 이러한 수집행위를 ‘창작하는 수집’이라고 말하며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생활을 밝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예’의 개념설정, 나아가 민예운동, 민예관의 설립 등 그의 노력은 옛날 것의 보존과 계승을 위한 퇴보적인 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사용되고 발견되는 일상적인 것의 가치를 통해 내일의 창조를 이끌어나가려는 시도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4년 1월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 야마나시 현 이케다무라의 고미야마 세이조우(小宮山清三, 1880~1933)가 수집한 조선도자기를 보러 갔을 때, 그의 집에서 불상 2점을 발견하면서 그 불상을 제작한 모쿠지키 쇼닌(木喰上人)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유명하지 않았던 모쿠지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던 탓에 야나기는 각지를 다니며 모쿠지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모쿠지키의 생가를 방문하고 그의 자필로 된 자서전을 발견하는 등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야나기의 모쿠지키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모쿠지키오행연구회」가 결성되어, 1925년(다이쇼 14) 3월에서 12월에 걸쳐 야나기 무네요시가 편집한 연구잡지 『모쿠지키 쇼닌 연구』5권과 특별호 1권이 간행되었다. 또한 이것과는 별개로 『모쿠지키 오행 쇼닌 약전』과 『모쿠지키 쇼닌 와카(和歌:일본 고유의 정형시) 선집』의 2권도 연구회에서 발행되었다.

야나기는 모쿠지키 쇼닌의 불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교토, 나라 등지를 다니면서 전국의 특색을 지닌 공예품을 집중적으로 조사 및 수집을 행하였다. 공예품은 야요이 시대부터 현대까지, 단순한 수공예품에서부터 고도의 기술이 발달한 에도시대 후기의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수집되었다. 일본 중세부터 도자기 생산으로 잘 알려진 일본 고유의 롯고우(六古窯)중 하나인 단바도자기는 야나기가 만년에 다수 수집하여 높은 평가를 내렸다. 단바도자기는 이 작품과 같이 소성할 때에 천연재료의 재가 내려앉아 자연유가 되어 자연스러운 무늬를 만들어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야나기는 1938년에 옛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 지역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야나기는 그 곳에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일본 본토에서 잃어버렸던 전통적인 기법으로 제작된 물품들이 생활과 신앙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활용되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옛 류큐 왕국의 지역은 야나기가 생각했던 ‘미의 정토’에 가까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후 4회에 걸친 여행에서 류큐 지역 특유의 건축양식에서 비롯된 기와(本葺瓦), 독특한 장례 문화의 상징인 유골함, 칠기, 염직물, 염직을 위한 문양지 등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야나기는 수차례의 오키나와 여행을 통해 오키나와의 토산물에 점차 눈떠서 화려한 문양의 옷에 관심을 가졌고 그 다음으로 문양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키나와의 독특한 문양은 ‘가스리’라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날줄과 씨줄의 규칙적인 짜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천연재료로부터 얻은 다양한 염료를 이용하여 기하학적이고 근원적인 수직 문양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오키나와의 풍요로운 염직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 물품이다. 야나기는 이러한 오키나와의 문화를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예’ 잡지와 민예관의 전시를 통해 소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양샘플은 류큐왕조시대에 미야고(宮古), 야에야마(八重山), 구메지바(久米島)에서 공납포를 직조하기 위하여 배포했던 문양의 견본이다. 슈리(首里)왕부에서 일했던 전문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1920년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였으며 야나기는 5월 조선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글은 4월에 탈고되어 『가이조』와 『동아일보』에 실리게 되었다. 그는 일본과 조선이 대립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과 같이 선량한 일본인이 있으며 상호 이해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또한 조선통치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조선인들의 유혈혁명을 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가이조』와 『동아일보』 모두 검열을 거치면서 글의 전체가 실리지 못했고, 야나기는 『조선과 그 예술』(1922)에 삭제된 부분을 포함하여 원문을 게재하였다.
“내가 알고 있거나 또는 알지 못하는 많은 조선의 벗들에게 진심을 담아 이 편지를 보낸다. 일본의 정(情)이 그렇게 하라고 지금 내게 명하고 있다. 나는 모른 체 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당신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한다. 또한 이 글들이 받아들여지기를 절실히 바란다. 만약 이 글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할 수만 있다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겠는가. 당신들도 그 외로운 침묵을 내 앞에서는 깨뜨렸으면 한다. 인간은 언제나 마음을 트고 이야기할 수 있는 벗을 찾는다. (이하 중략)”

잡지『공예(工藝)』는 1931년에 창간된 민예운동 기관지로서 ‘공예 중의 민예를 주요한 소재로 한다’라는 명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용한 종이는 일본 각지의 수공예 일본 종이를 사용했으며 표지 장정과 삽화는 민예운동 동인들이 담당했다. 야나기가 의도했던 잡지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여 근대시기 여러 잡지 중에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야나기는 제49호에서 「『공예』의 삽화」라는 글에서 삽화야말로 ‘공예가 하는 창작’이라고 서술하고 그 요건으로서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하는 물건의 선택, 사진을 찍는 방법, 사진의 처리방법, 독자의 보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120호까지 간행되었으며, 풍부한 사진과 원고를 통해 민예의 아름다움과 그 사상을 소개했는데 야나기는 이 잡지의 사진을 사카모토 만시치(坂本萬七, 1900~1974)에게 의뢰하였다. 츠키지소극장 등의 무대사진가였던 사카모토는 『공예』잡지 이외에도 야나기의 류큐여행에도 동행하여 야나기의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어디라고 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라는 내용으로 당나라 서유기(西遊記)에서 유래된 내용으로 부처님을 얕잡아보는 손오공이 만가지 기술을 써 부처님으로부터 도망쳐 보려하지만 결국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고 나온 얘기이다.
야나기는 한나라(BC 202~220)부터 육조 시대(220~589)의 금석탁본을 수집하여 고서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현대문명에서 점차 글을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을 안타까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필력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탁본에서 돌에 새긴 그림과 문자에서 서체의 예술적인 특징, 공예적인 표현과 돌을 깎은 이의 개인성을 발견하였고, 다량으로 수집하였다. 회화에서는 원나라‧명나라의 궁정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였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야나기의 서예와 회화 작업에 반영되었다.

야나기의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노정은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에서만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작업하여 보여주기도 하였다. 다도를 위한 도자기, 서예, 『공예』와 같은 잡지의 디자인, 장서 디자인, 표구 작업 등을 통해서 스스로 실천하는 태도를 보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의자식의 다회(茶會)를 반좌례(半座禮)라고 칭하여 찻자리용 의자와 테이블을 고안하였다. 이는 생활의 서구화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다다미 방바닥에서 꿇어앉아서 있는 다도회의 기존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편리하게 다도회를 진행하기 위한 야나기의 창작으로 볼 수 있다. 의자의 형태는 1인용 의자와 긴 의자이며 제1회 민예관 다회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의자는 이케다 산시로(池田三四郞)가 운영하고 있던 마츠모토 민예가구가 제작하였다. 현재 일본민예관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며 이번 전시에도 출품되어 관람객들이 직접 앉아볼 수 있다.

전시제목야나기 무네요시 (Yanagi Muneyoshi)

전시기간2013.05.25(토) - 2013.07.21(일)

참여작가 야나기 무네요시

초대일시2013-05-24 16pm

관람시간10:00am~19:00pm 금-일 10 a.m. ~ 9 p.m

휴관일월요일

장르특별전시

관람료5,000원 (덕수궁 입장료 포함)

장소국립현대미술관 NATIONAL MUSEUM OF ART, DECKSUGUNG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관)

연락처02-361-1414

Artists in This Show

야나기 무네요시(Yanagi Muneyoshi)

1889년 일본 도쿄출생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ART, DECKSUGUNG) Shows on Mu:um

Current Shows

화살표
화살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