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1: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 국제적인 행사들과 세계화의 꿈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국제적인 규모의 이벤트를 연달아 개최하며 국제 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1993년 등장한 문민정부는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 개혁의 방향으로 국제화 및 세계화를 전면에 내세웠고, 국제 사회 내에서 위치의 변화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는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상대적인 정체성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었다. 백남준은 귀국 후 동아시아의 역사와 전통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비디오 조각 작업들을 대거 제작으로 함으로써 한국적 정체성 논의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또한 전지구적인 네트워크를 가동하여 베니스 비엔날레, 이스탄불 비엔날레, 리옹 비엔날레와 같은 다양한 국제 행사에 참여하고, 베니스 비엔날레 감독을 초청한 국제적인 학술행사를 개최하는 등 한국 미술계를 국제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이와 같은 급격한 정세 변화 속에서 한국 미술계는 문화의 주요 이슈들을 삼키며 빠르게 진행되는 세계화에 대하여 기대와 불안감을 가지고 다양한 비판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
“참다운 민족주의는 드러내지 않는데 있으며 참다운 민족주의가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더욱 더 활발한 해외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수주의가 횡행하는 곳에는 문화와 삶의 다양성이 없고 진취적인 지식인들을 살인하게 된다.” (백남준 칼럼, 동아일보 1993.9.26.)
섹션2: 근대화의 길, 과학과 기술의 발전, 미래를 향한 낙관
1960년대부터 진행된 한국의 눈부신 경제개발을 견인하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는 과학기술이었다. 1993년 세계 박람회(대전 엑스포)가 상징하는 국내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은 선진국으로 가는 엔진이자 꿈꿔오던 미래로 갈 수 있는 긍정적인 상상력의 발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새 밀레니엄 또한 눈앞으로 다가온 미래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작가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계, 전기, 컴퓨터 등의 기술을 이용하여 작업을 만드는 한편, 새로운 기술이 만들 신세계의 가능성에 대하여 창조적인 상상을 펼쳐 나갔다. 공상 과학적인 주제와 이야기들이 미술 작품 속으로 흘러들어왔고, 때로는 현재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과 비평을 담은 작업이, 때로는 막연히 다가올 미래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생산되었다. 산업혁명 시기의 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SF 장르인 스팀펑크 문학을 연상시키는 이 시기의 작업에서 1990년대 말 본격적인 정보사회가 도래하기 직전 한국미술계가 상상하였던 미래적이면서도 복고적인 판타지들을 엿볼 수 있다.
“비디오 아트는 텔레비전을 단순히 오락적 기능에 국한시키지 않고 형이상학 수준으로 끌어올린 예술이다. 20세기를 인류가 자연을 정복하는 시대라고 한다면 21세기는 자연과 인류가 전자매체를 매개로 공생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백남준 인터뷰, 한겨레, 1993.7.21, 대전 엑스포 《비디오 아트》전시 관련)
섹션3: 혼합매체와 설치, 혼성성, 제3의 공간과 대안적인 공간
급격한 경제성장과 세계화, 민주화의 성공과 더불어 1990년대 초 한국에는 성공의 서사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중산층이 사회를 이끄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유행을 이끌며 정치적인 투쟁 대신 문화의 향유를 한국 사회의 주요 어젠다로 끌어올렸다. 헐리우드 영화사들은 영화를 직접 배급하고, 미국 팝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음악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소비문화를 대표하던 압구정동에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고, 고가의 서구 브랜드들을 즐기는 오렌지족이 등장하였다. 미술계 또한 새로운 한국의 정체성 찾기에 걸맞는 새로운 담론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이미 80년대 말부터 진행되고 있던 신세대 미술의 움직임과 과학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기술매체의 사용 등의 흐름이 맞물려 폭발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시각예술이 등장하였다. 믹스드-미디어로 통칭되는 혼합매체 실험은 회화,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매체뿐 아니라 비디오, 설치와 같은 새로운 매체까지 조합하여 새로운 예술의 시간과 공간과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이 대안적인 시간과 공간은 매체적인 실험을 넘어서서 주변부와 중심부, 고급과 대중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는 새로운 문화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미술작품의 매력이란 게 본래 남이 안 갖는 것을 소유-독점할 수 있다는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땅이나 주식과는 달리 유산과정에서 상속세를 사기 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TV(비디오)라는 것은 대중들이 모두 공유할 수 있고, 보기만 하고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상품성이 적을 수밖에요. 그런데 80년대 들어 제 비디오 작품에도 손때를 묻히고 의도적으로 영원성을 불어넣으려 하니까 좀 팔리기 시작했습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존재 양식이란 돈도 벌면서 장난도 치자는 것이지요.” (백남준 인터뷰, 조선일보 1992.1.28,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 관련)
섹션4: 개인의 탐색, 소수(정체성), 다원성
혼합적인 매체와 영상-시각매체의 영향력이 커지고 대중음악, 패션, 라이프스타일과 같이 기존의 예술에 포섭되지 않았던 다양한 문화 생산물들이 시각예술의 제 3의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1990년대 초반의 신세대는 전에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표현을 시도하며 개인 욕망의 발현을 당대 문화의 중요한 이슈로 끌어냈다. “바람이 부는 압구정 거리를 거니는 욕망”으로 함축되는 신세대의 욕망은 욕망의 주체인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가운데 1993년 백남준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다문화주의와 다원주의의 담론을 작품으로 소개하였고, 동성애와 여성, 인종의 문제와 같은 소수적 정체성을 표현한 작품이 전시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전시의 주제와 이미지는 신세대가 열어 놓았던 한국 미술계의 틈새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1990년대의 젊은 작가들은 작업은 작가적 정체성과 소수자 혹은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욕망, 고민을 담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백남준이 1990년대 제작한 아시아적 역사와 전통을 담은 비디오 설치 조각 또한 국가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 이자 미국의 소수 이민자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작업이었다.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의 고민이 여러 복잡한 층위에서 진행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비디오 예술이란 예술이 고급화되던 당시의 정서에 반하여 만인이 즐겨보는 TV라는 대중매체를 예술형식으로 선택한 일종의 예술 깡패였다. 그 안에는 동양 사상이나 한국의 고유한 이야기 등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서양인에게는 독특한 것으로만 보일 뿐 눈치채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백남준 칼럼, 동아일보 1993.9.26)
전시제목백남준 효과 Paik Nam June Effect
전시기간2022.11.10(목) - 2023.02.26(일)
참여작가
백남준, 전수천, 현대미술 주요작가 25명
관람시간화~일요일 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장르영상한국
관람료무료
장소국립현대미술관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경기 과천시 광명로 313 (막계동,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 2전시실 및 중앙홀)
주최국립현대미술관
후원신영증권, (사)현대미술관회
연락처02-2188-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