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통해 되찾은 시간들
오우암의 작품은 현실이라고도 상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독특한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오직 자신의 생생한 기억에만 뿌리를 두는 그의 그림은 수 십 년 전의 장면, 그래서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시대를 무대로 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개인의 기억을 통해서 사각 캔버스들에 오롯이 담겨지는데, 이렇게 되찾아진 시간은 예술이 역사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힘을 드러낸다. 1938년생의 오우암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전쟁과 전후 복구 시절을 겪은 수많은 민초들처럼, 역사가 개인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시절을 살아왔다. 전쟁 통에 고아가 되고, 안 해 본 일이 없는 핍박한 시절을 살아온 그는 미술에 대한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왔으며, 화단과의 교류도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비전을 획득한 극적인 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시대는, 지금 보면 낯선 장면들이 많다. 그의 그림은 택배기사의 전신인 빨간 모자를 쓴 짐꾼들이나, 군복을 염색한 재건복을 입은 획일적 패션, 공터에서의 굴렁쇠 놀이 등, 지금은 사라진 소재나 풍습을 이물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하는 힘이 있다.
어린 시절 마을에 풍물패나 극단이 들어왔을 때의 저녁 풍경부터 장애를 입은 군인들이 귀향한 전쟁 이후의 장면 등은, 객관적인 역사적 기록 보다는 개인의 기억 속에 잠겨있다 꺼내진 것이다. 깊이 각인된 기억과 무의식의 저장고에서 길어 올려진 그의 그림은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환상적이다. 수십 년 세월을 건너 뛴 향수적 시각은 차분하게 조율된 색조와 정지된 형태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파랑, 분홍, 심지어는 노랑으로 미묘하게 번지는 하늘빛은 외광에 대한 최근 연구의 결실이며, 일시 정지된 듯한 과거의 풍경을 현재적 생생함으로 물들인다. 그의 작품에는 성장과 풍요만을 향해서 달려왔던 우리의 무의식이 애써 회피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있다. 서사는 가족 일대기라는 틀을 빌어서 수 십 개의 장면이 이어지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수 십 년 간 수녀원에서 운전과 보일러 일을 하고 살면서 영향을 받은 종교적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문맹을 위한 교리 강연 책의 삽화나 「예수님 수난사」 같은 종교적 서사는 고난에 찬 한 시대를 헤쳐 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는 설득력 있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한가한 형식의 유희나 억지로 쥐어짠 개념의 놀이에 함몰되곤 하는 현대미술의 강박관념을 넘어, 소통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번 전시의 부제 '기적 소리'에 나타나듯, 오우암의 작품에는 기차역 주변 풍경이 많다. 인상파 시대의 기차가 그러했듯이, 기차는 우리에게도 근대를 열어 제친 거대한 상징이었다. 시골에는 대부분 초가집이었고 도시의 밀집된 인구가 거처하는 건물조차도 2층을 넘지 않았던 시대에 거대한 금속 덩어리, 거기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와 기적 소리, 각기 다른 기계의 부분들이 동시적으로 작동하여 움직이는 메카니즘 등이 소년에게 준 놀라움은 엄청났다. 동시에 기차는 어릴 적 만주로 간 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감과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매개체로 그의 큰 관심을 끈다. 하루 종일 넋을 잃고 바라보고 그대로 베끼려 애도 썼다는 기차의 세세한 모습을 아직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도시를 특징짓는, 기계적 직선들로 구조화된 기차 정비고 주변이나 건널목 풍경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군상들이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장기판 위의 말처럼 배치된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기차역 주변의 진기한 기계적 풍광은 경이로움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근대적 풍경의 상징인 기차역은 그것을 타고 귀향한 상이용사들,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달구지 대열, 쌀이나 밀가루 포대를 나르는 비포장 도로 위의 군용 차량 등이 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우암의 시대 풍경이 기념관 등에 안치되어 있는 창백한 「민족 기록화」 등의 양식과 다른 점은, 단편적 사실의 나열이나 계몽을 앞세우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투사가 아니라, 개인에게 각인되거나 침전된 기억의 산물이라는데 있다. 그의 뇌리에 박혀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용출된 이미지는 거대한 역사적 의미가 압축된 전형성이 아니라, 사소해 보일수도 있는 것들이다. 가령 상이용사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다소간 음울한 풍경들에는 풍선과 솜사탕 장수들이 곧잘 등장한다. 색색의 풍선이 내포하는 축제적인 분위기와 부드럽고 달콤하게 녹아드는 솜사탕은, 전쟁 후유증으로 절단된 사지에 금속 보철물을 낀 채 도심 변두리를 배회하는 자들의 방황과 연결되어 있다. 전쟁이 야기한 집단적 트라우마의 묵직하고 짓눌린듯한 분위기를 날려 버리는 솜사탕, 풍선, 연, 그리고 이와 연결되어 지상에서 전개되는 고난에는 아랑곳없이 창공에 펼쳐지는 빛과 색의 향연은 개인을 좌지우지하는 절대 절명의 운명조차도 거대한 섭리의 일부로 상대화시키고 만다. 그의 작품이 주는 기묘한 정적, 그것이 야기하는 초현실적 분위기는, 작품 속 장면들이 거대한 사건들이 지나가고 난 뒤의 모습이며, 이 모든 것을 겪어낸 이들이 눈도 코도 입도 희미한 익명성을 가짐으로 인해 고조된다.
기차역, 마을 공터 등이 있는 오우암의 그림에는 초현실주의 화가 드 기리코의 기이한 원근법 속에 배치된 미로 같은 건물들과 텅 빈 광장 같은 연극적 무대를 연상시킨다. 드 기리코와 달리, 오우암의 그림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끼리의 밀접한 교류는 발견되지 않는다. 상이군인들은 물론 교복 입은 여학생들, 기차 길을 건너려는 행인들, 굴렁쇠 돌리는 아이들, 심지어는 떼 지어 줄넘기 하는 사람들조차도 각자의 세계를 살고 있는 양 몽환적이다. 소음이 발생하는 열악한 주거지인 철로 변 마을이나 공터를 중심으로 빽빽한 판자 집들이 에워싸는 도심 변두리의 모습은 동화 속 풍경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비참한 현실을 윤색하거나 상상으로 변형시킨 것이 아니다. 오우암의 작품에 흐르는 시적 정조는 짧지 않은 세월의 흐름 때문이다. 산채로 희생물을 바치던 피 흘리는 사실주의도 신화라는 아득한 시대를 거치고 나면 인류의 정신적인 원형으로 남듯이, 그의 작품은 전쟁과 가난 등 민족에게 닥친 거대한 폭력조차도 지나간 폭풍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만큼의 어떤 시공간적 간격이 끼워져 있다. 이 간격들은 기계적 균질성을 벗어나 있다. 단순한 회고조의 정서와는 다른 분위기에 잠겨 있는 그의 작품은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지금의 현실을 야기하는 인과론적 과거, 요컨대 특정한 역사적 기원과 목적을 가지는 사건들이 아니다.
오우암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시간성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썼듯이, 지금의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며, 현재들을 가지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연상을 넘어, 우리로 하여금 단번에 과거 자체 안에 자리 잡게 한다. 여기에서 과거와 현재는 인과적 연속성이 아니라, 공존하는 이질적 두요소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현재는 끊임없이 지나가는 반면, 과거는 그자체로 보존되며 계속해서 존재한다. 사람들이 공터나 역으로 쏟아져 나와 움직이는 와중에도 순간 속에 응결된 듯한 영원을 보여주는 장면들에서 이러한 존재론적 시간관이 발견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시간관에 의하면, 과거는 과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속에 보존될 필요가 없다. 지각과 차이를 가지는 기억은 순수한 존재론적 의미만을 남겨두기 때문에, 작가는 변화하는 현재 속에 살면서도 변치 않는 과거를 되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과거는 모든 시간대를 현재로 환원하는 전체화를 거부하고, 전체로 환원되지 않은 여러 시간대가 공존함을 강조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기억에 의해 전개되는 감각적 기호들은 예술의 발단이며, 우리를 예술의 길로 끌어들인다고 결론 내린다. 오우암에게 그림은 이러한 근원적이면서도 이질적인 시간대--'펼쳐져 전개된 시간, 즉 흘러가는 계속적인 시간, 잃어버린 시간 일반과 대립되는 시간'(들뢰즈)--를 되찾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 이선영
전시제목기적(汽笛) 소리
전시기간2010.05.07(금) - 2010.05.07(금)
참여작가
오우암
초대일시2010-05-07 17pm
관람시간11:00am~19:00pm 토요일 오전 11시 00분 ~ 오후 5시 00분
휴관일 일,월,공휴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아트포럼 뉴게이트 Artforum Newgate (서울 종로구 명륜동4가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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