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미술
한국미술사 l 한국 근대미술
시대변화의 물결과 근대미술의 고뇌
한국 근대미술은 조선말기 이후의 전통화단과 일제병합 이후의 서양화단이 맞물리면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가 설립되면서 근대적 작가상이 마련되었지만, 당시 미술인들이 겪었던 식민지적 고뇌는 자발적인 근대미술로의 전환을 가로막은 원인이 되었다.
한국 근대미술
한국미술사 l 한국 근대미술
시대변화의 물결과 근대미술의 고뇌
한국 근대미술은 조선말기 이후의 전통화단과 일제병합 이후의 서양화단이 맞물리면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가 설립되면서 근대적 작가상이 마련되었지만, 당시 미술인들이 겪었던 식민지적 고뇌는 자발적인 근대미술로의 전환을 가로막은 원인이 되었다.
고희동, <부채를 든 자화상>, 1915년, 캔버스에 유채, 61×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은 귀국 후, 서화협회 활동을 주도하는 등 서양화가에서 동양화가로 전필하였다.
채용신, <황현 像>, 1911년, 비단에 채색, 95×66cm, 전남 구레 매천사 소장
이 작품은 항일 운동가 황현의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으로, 10도 가량 약간 돌린 옆모습에서 전통 초상화의 기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이외에도 다양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려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과 다른 근대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김진우, <묵죽(墨竹)>, 1930년대, 종이에 수묵, 147×73cm, 개인소장
우리나라보다도 북한에서 더 잘 알려진 김진우는 수려하면서도 기개 넘치는 대나무의 모습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허백련, <하경산수(夏景山水)>, 1960년대, 종이에 수묵, 23×31cm
김정희의 수제자인 소치 허련의 후손인 허백련은 전라도 광주에 정착해 전통적인 소재와 표현방식을 그대로 이용한 남종화를 그린 화가이다. 1938년에는 연진회라는 미술 단체를 발족시켜 호남 서화계에 상징적인 화가로 추앙되었다. 그는 한시와 고전화론(古典畵論)에 통달하고 서법도 독특한 경지를 보인 시서화 삼절의 전형적인 문인 화가였다.
이상범, <초동(初冬)>, 1926년, 종이에 담채, 153×185cm
한국적인 산수화의 전형을 개척한 화가로 알려진 이상범은 1925년 조선미전에서 3등상을 수상한 후, 연10회 특선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산수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다. ‘청전양식’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근대한국화단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그는 나지막한 언덕과 안개가 약간 낀 대기, 선 대신 미점(米點)을 세심하게 표현하는 방식, 등장인물이 거의 없는 적막한 분위기를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변관식, <외금강삼선암추색(外金剛三仙岩秋色)>, 1966년, 종이에 담채, 125.5×125.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상범과 대비되는 작가로 일컬어지는 변관식은 5년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금강산 등 전국의 명소를 구석구석 답사해 현실감 있는 한국산천의 미를 구현했다. 해방 뒤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으나, 1957년 전람회 심사의 불공정성을 폭로하고 더 이상 국전에 참석치 않았던 강직한 성격이 소유자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강하고 굳건한 이미지를 가진 그의 작품은 시점을 자유롭게 이동하여 역동적이고 독특한 화면을 구축했으며, 갈필과 중묵을 사용해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관호, <해질녘>
1916년, 캔버스에 유채, 127.5×127.5cm, 동경예술대학 소장
나혜석, <자화상>
1928년경, 캔버스에 유채, 60×48cm, 개인소장
이인성, <어느 가을 날>, 1934년, 캔버스에 유채, 97×162cm, 호암미술관소장
일제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말살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미전의 심사기준은 ‘반도적 향토색을 드러낼 것’을 권장했다. 향토색에의 요구는 농본주의를 권장하는 일제 식민지 정책을 여실히 반영했고, 이로 인해 당시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외면한 작품들이 조선미전의 단골소재가 되었다. 구리빛 피부와 풍요로운 농촌을 그린 이 작품은 천재화가 이인성의 대표작으로, 한가롭고 목가적인 농촌의 모습이 당시의 현실과 맞지 않은 비현실적 모습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제14회 조선미전 창덕궁상, 1935년, 캔버스에 유채, 129×191cm, 개인소장
김은호, <간성(看星)>, 제6회 조선미전 출품작, 1927년
한가로이 골패(骨牌)놀이를 하는 여성을 그린 이 작품은 피우다만 담배․재떨이․성냥갑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 주인공의 신분이 ‘기생’임을 암시한다. 일본화풍의 채색인물화(미인도)를 주로 그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는 1912년 서화미술원에서 조석진, 안중식으로부터 그림을 배워 조선미전을 통해 이름을 날렸다. 변관식과 함께 동경 유학을 떠나 동경미술학교를 3년 수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1936년 후소회라는 미술 단체를 창립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어용화사로 출발한 만큼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일본풍의 인물화와 흰 분을 칠한 가녀린 여인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남원에 있는 춘향 사당과 진주의 논개 사당 등 곳곳의 영정도 많이 그렸고, 산수화 역시 채색 위주의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친일파 화가로 불리기도 했지만, 많은 제자를 양성해 근대 한국 화단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심형구, <흥아를 지키다>, 제19회 조선미전출품작, 1940년, 크기․소장처 미상
미술이 일본의 대동아 전쟁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됐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한국 근대미술은 조선말기 이후의 전통화단과 일제병합 이후의 서양화단이 맞물리면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가 설립되면서 근대적 작가상이 마련되었지만, 당시 미술인들이 겪었던 식민지적 고뇌는 자발적인 근대미술로의 전환을 가로막은 원인이 되었다.
근대미술의 기점문제
근대는 중세 봉건체계에서 탈피하여 시민적 자각에 대한 모색과 현실 극복의 논리로 인한 문화형태를 이룩한 시대이다. 태동배경은 인간중심주의, 과학적 기술문화의 성취, 자본주의의 채택, 시민사회의 대두(중인 계층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중핵을 이루고 북학파 도시 소시민에 대한 관심이 나타남) 등이다.
한국의 근대를 어느 시점으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끝나지 않았다. 이유는 그 동안 이 시기에 대한 자료와 연구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역사 자체 내에서 볼 때 구체제의 모순을 깨고 자생적 발전으로 인한 근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는 취약점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술사에서도 근대편년의 문제는 앞으로도 무거운 숙제로 남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연구와 더불어 근대시기의 미술 행적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필요한 것은 이 시기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미술에 대한 고민
전통미술은 변화된 시대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모색을 하게 된다. 그 가운데 초상화는 사진기술의 도입이 본격화 되면서 새로운 형식으로의 전환이 절실했고, 그 안에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 화가가 채용신(蔡龍臣, 1848~1941)이었다. 고종의 명으로 그린 역대 왕의 영정이 창덕궁에 봉안될 만큼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1906년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 전주로 낙향해 92세가 될 때까지 사진을 이용한 다양한 주문초상화를 그렸다.
일주(一 州) 김진우(金振宇, 1883~1950)는 전통적인 표현방식을 답습했으나, 당시 쇠퇴해가는 사군자 그림 속에서 적극적인 항일의지를 드러냈다. 이들과 달리 과거에의 전통에 몰두했던 화가로는 의재(毅齎)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등이 있다.
서양화의 도입과 수용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서양화 도입은 1910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한 고희동(高羲東, 1886~1965)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중앙학교에서 도화선생이 되어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서양화 선생이 된다. 고희동에 이어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이 서양화를 수업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희동에 의해 전개된 한국의 서양화는 김관호란 천재화가의 등장을 통해 급진전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의 <해질녘>은 문전(文展)에 출품되어 특선의 영예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동경미술학교 개교이래의 수작으로 대우를 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인물을 야외에 내세웠다는 점과 석양을 받은 저녁하늘과 강, 인물에 반영되는 미묘한 빛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등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모티프 해석과 빛에 대한 열망이 선명히 부각되고 있다.
1918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나온 최초 여류서양화가 나혜석은 문학에도 뛰어난 소양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서양화의 여러 경향을 편력한 개성적인 작업으로 서양화 도입기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조선미전)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최초의 근대미술단체, 서화협회
서화협회는 “신구서화계(新舊書畵界)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向學後進)의 교육 및 공중(公衆)의 고취아상(高趣雅想)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1년 윤영기가 경성서화미술원을, 안중식·조석진이 서화미술회를, 1915년 김규진이 서화연구회를 설립하고 평양이나 대구에서도 학원이 생겨 미술인이 증가함에 따라 고희동은 윤영기·김규진 등과 단체설립을 모색하였다.
1918년 7월 21일 태화정에서 창립기념 제1회 서화휘호회를 가졌으며, 1919년 봄에는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를 계획하였으나 3·1운동으로 연기되었다. 1921년 4월 1~3일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전인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하였고, 이를 통해 김은호·이상범·노수현·최우세 등이 작가로 등단하였다.
제2회 서화협회전은 1922년 3월 보성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으나, 1922년 6월 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전이 창립되면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미전의 발전으로 회원의 이탈이 늘고 작가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으며, 이후 한국화 작가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6년 제15회 서화협회전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지하였다.
총독부 주도의 미술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
‘선전’ 또는 ‘조선미전’이라고 불리는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가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지 정책을 전환하면서 총독부의 주체로 1922년 시작되어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까지 총23회에 걸쳐 개최된 전람회였다. 동양화·서양화·조각·서예·사군자의 5개 부문으로 나누어 공모·시상하였다.
일제는 조선미전 창설을 “조선미술을 도와주기[裨補] 위한 목적”이라고 소개했지만, 사실은 심사위원을 모두 일본인으로 선발함으로써 일본인들의 기호와 일본화풍이 조선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도록 조장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조선미전’ 설립목적에는 한반도에 거주하고 잇던 일본 화가들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해 준다는 목적도 포함돼 있었다.
총독부의 정책적 후원을 받았던 ‘조선미전’은 화가들의 출세를 위한 필수 코스가 되었고, 일제 말기 ‘조선미전’에 출품한 김인승․심형구 등은 총독부의 전시(戰時) 정책에 미술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일부 양심적인 화가들은 ‘조선미전’에 불참하기도 했다. 1949년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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