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미술

한국미술사 l 통일신라시대의 미술

불교미술의 절정

통일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통합하고 당과 서역의 문화를 수용해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전제왕권(專制王權)이 강화됐고, 그 과정에서 화려한 중앙의 귀족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됐다.
통일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불교가 더욱 융성해 불국사와 석굴암 본존불 등의 석조미술이 절정을 이루었다.

  • 경북 경주의 안압지

  • 짐승얼굴무늬 기와

    경주 안압지 출토, 8~9세기, 높이 28.2cm

  • 수막새

    경주 안압지 출토, 8~9세기, 지름(오른쪽)16.5cm

  • 토용(土俑)

    경주 용강동 무덤, 8세기, 높이(왼쪽) 14.5cm

  • 불국사의 현재모습

  • 구한말 당시의 불국사

  • 불국사 배치도

  • 다보탑, 국보 제20호, 불국사 대웅전 앞뜰 동쪽, 8세기 후반, 높이 10.4m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예로,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걸작은 그 유례가 없다.

  • 석가탑, 국보 제21호, 불국사 대웅전 앞뜰 서쪽, 8세기 후반, 높이 8.2m

    조형이 소박하고 장중하여 신라 석탑의 전형이라고 평가되는 이 탑은 백제의 장인 아사달이 만든 탑이라고 알려져 있다.

  •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좌상>, 8세기 후반

    석가여래의 입술에 붉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작당시에는 석조불상이 채색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있다.

  • 발굴 당시의 석굴암

  • 석굴암 <금강역사상>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신인 ‘금강역사상’은 보통 탑에 조각되는데, 이처럼 법당 입구에 조각된 예는 석굴암이 유일하다.

  • 석굴암 <십대 제자상> 제1상, 제2상

    일반적으로 ‘십대제자상’은 늙고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랜 세월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고행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이 상들은 ‘인도의 십대제자’를 표현하기 우해 코가 길고 광대가 튀어나온 서역인의 모습으로 제작됐다.

  •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상>

    일반적으로 장식유무에 따라 본존상과 보살상을 구분한다. 이 상은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기 위해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관음보살이다. 머리에 11개의 얼굴이 조각된 관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1개의 얼굴은 중생의 선악에 따라 그 얼굴을 변화시켜 중생을 구제해준다는 관음보살의 정신을 담고 있다.

  • <십일면관음보살상> 안면 부분

  •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호, 높이3.75m, 입지름2.27m, 두께11∼25㎝, 국립경주박물관

  •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 탁본

  • 상원사동종

    국보 제36호, 높이 167cm, 지름 91cm,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

Description

통일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통합하고 당과 서역의 문화를 수용해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전제왕권(專制王權)이 강화됐고, 그 과정에서 화려한 중앙의 귀족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됐다. 통일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불교가 더욱 융성해 불국사와 석굴암 본존불 등의 석조미술이 절정을 이루었다.

 

 

불교미술의 보고(寶庫),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해 이룩된 고유한 전통문화와 당나라의 문화를 흡수하여 우리나라 미술사상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특히 신라의 호국사상과 일치되어 불교중심의 미술이 발달했는데 섬세하고 화려하며, 독자적인 정교한 양식을 확립해 나갔다. 따라서 사찰과 석탑 등 불교와 관련된 조형품이 이 시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불국사와 석굴암은 조형상의 구성미가 뛰어난 걸작이며 금관이나 장신구 등의 정교한 금속 공예와 함께, 상원사와 봉덕사의 범종들은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안압지, 불국사, 석굴암 등이 있으며, 석조조각으로는 석굴암 본존상,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아미타여래 입상, 다보탑, 석가탑, 화엄사 사리탑, 감은사 3층 석탑 등이 있다.

 


삼국통일을 기념한 궁원, 안압지

안압지(雁鴨池)는 경북 경주시 인교동(仁校洞)에 있는 신라 때의 연못으로, 『삼국사기』는 “674년(문무왕 14)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했다”고 전한다.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는 도교 사상의 영향으로 신선이 산다는 세 개의 섬과 선녀가 산다는 12봉우리의 작은 산을 표현하고 있으며, 삼국통일을 이룬 기념으로 아름다운 궁원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이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瓦塼類)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미(優美)한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年號銘)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예술품으로 판상(板狀)의 금동여래삼존상(金銅如來三尊像)과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등의 우수한 작품도 발굴되었다.

 

 

선진문물의 수용과 전달

통일신라는 당시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었던 중국 당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새로운 외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당의 수도 장안(Xian, 長安)에 몰려든 외교사절단이나 상인들이 자연스레 통일신라로 들어왔다. 괘릉 앞에 서 있는 무인상의 얼굴 생김새나 경주 용강동 돌발무덤에서 나온 턱수염을 기른 인물상, 당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은 문관상과 여인상 및 청동제 십이지상은 중국 당을 비롯한 서역과의 인적․물적 교류를 보여준다.

 

 

석굴암과 불국사의 창건

석굴암과 불국사는 751년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 재상이었던 김대성(金大成)이 발원하여 창건하여 774년 신라 혜공왕(惠恭王)때 완공했다. 경덕왕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은 전성기를 이루는데,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통일 신라의 판테온(Pantheon)인 셈이다. 이 둘은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그리고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니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굴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을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다. 한편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불국사의 보물, 다보탑과 석가탑

불국사 대웅전의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은 목조 건물의 복잡한 구조를 화강석으로 옮겨놓은 석탑예술의 절정이다. 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으로 현재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가 없을 뿐, 그 외의 것은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 초층(初層)의 중앙과 4우(四隅)에 방형 석주를 세워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는 팔각 삼층을 이룬다. 이러한 형식의 탑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 하여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탑주(塔周)에 연화(蓮花)무늬를 새긴 8개의 둥근 돌을 돌려 경계를 삼았다. 1966년 해체·복원공사를 하던 중 제2층 탑신 중앙부 사리공에서 금강사리함(金剛舍利函)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8세기 초엽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다라니경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임이 밝혀졌다.

 

 

불교조각의 절정, 석굴암 석굴(石窟)

건립 당시 ‘석불사’라고 불렸던 석굴암(국보 제24호)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석굴이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 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넙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불국(佛國)의 소리, 성덕대왕 신종

석조 문화재 이외에도 불교미술이 절정에 달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양한 종이 제작됐다. 그 가운데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무게가 약 25톤에 달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떠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범종(梵鐘)으로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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