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지연-춤추는 색채, 유동하는 색면
박영택 (경기대학교교수, 미술평론가)
전지연의 그림은 추상인가? 추상이란 외부세계를 연상시키는 구체적 이미지가 화면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추상화는 보아도 알 수 없는 것,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추상화 역시 우리 눈에 절대적으로 호소한다. 망막에 우선적으로 의존하는 그림이다. 비가시적인 것의 시각화, 그것은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을 안긴다. 무명의 것, 아직 인간의 개념 체계 아래, 언어의 그물 안에 잡히지 않은 것들이다. 어쩌면 원초적인 회화적 행위나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 안에서 가능한 것의 모색이기도 하고 이미 존재하는 대상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하고 비대상적인 것을 통해 말을 건네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런 추상의 역사도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칸딘스키의 최초의 추상을 기원으로 삼는다면 말이다. 모더니즘의 역사를 통해 회화는 평면으로서의 그림의 조건을 새삼 확인하고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물감, 붓질, 물성의 확인 그리고 대상에서 자유로운 그림의 길을 펼쳐냈다. 그림 자체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종국에는 화면 안에서 그림이 실종되거나 그림 자체가 소거되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는데 근자에 다시 그 추상의 여러 갈래들이 다시 스멀거린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추상의 도래는 어떤 것일까? 사실 그림은 구상이면서도 추상이고 따라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나 차이라는 것도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회화 자체는 이미 물질이자 관념이고 구체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상의 것이다.
전지연은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화사한 색상을 선택했다. 그리고 납작하고 일정한 두께를 지니게 해서 칠했다. 단정하고 반듯하면서도 단호하고 매끈하다. 정확하게 일정한 면적을 메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분방한 붓질이나 제스처를 억압하고 물감을 성형해서 밀어 올렸다. 따라서 물감은 하나의 살, 육체가 되었다. 그것은 물감이면서 동시에 캔버스 표면을 물감으로 치환해 만든 또 다른 물질로 다가온다. 여기서 색은 작가 심성의 재현이자 그 자신이 선호하는 색채일 것이며 또한 전체적인 화면 구성의 차원에서 배려된 색채일 것이다. 다분히 자아나 주관성의 대리물로서의 색채이자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에서 고려된 색상일 것이다. 색은 이미 그것 자체로 충분히 그림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색과 색의 관계성으로 인해 고려된 회화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바둑판의 돌처럼 이루어진다. 하나의 돌이 놓이면 다른 돌이 그 돌로 인해 불가피하게 놓이듯이 하나의 색이 결정되고 칠해지면 이내 그 색 옆에 다른 색이 자연스레 파고들어 칠해진다. 하나의 색이 또 다른 색을 부른다. 그것은 작가의 호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면에 올려진 색들간의 호출에 의해서이다. 그러니 색은 결코 소리를 지르는 법 없이 여러 색들을 연쇄적으로 부른다. 더불어 특정한 색의 호출뿐만 아니라 그 색의 크기 역시 결정된다. 그렇게 해서 색상들이 흘러 다니고 색면이 유동한다. 평면 안에서 색, 색면과 색면으로 인해 만들어진 선들이 춤을 추듯 활력적으로 유동한다. 생명력이 넘치고 그만큼 활기찬 기운이 느껴지는 밝은 화면이다. 그만큼 장식성과 명랑성이 느껴진다. 모종의 감성적인 힘으로 충만한 화면이다.
작가는 그 색면 덩어리를 단호하고 예민하게 절개한다. 우선적으로 화면은 그렇게 몇 가지 색상으로 분할된다. 어떤 형태가 화면을 점유하는 게 아니라 색이 우선 화면을 차지한다. 단색의 평면이 일정 부분을 마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따라서 그림은 우선적으로 커다란 색채 덩어리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색채 덩어리로 분산되고 흩어진다. 색채의 차이가 우선적으로 그림을 만들고 색과 색의 경계가 색을 발생시킨다. 더러 선은 평면에 약간의 높이를 만들며 융기한다. 또는 표면에 음각으로 파고 든다. 선이 색을 구분 지으며 자연스레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선이 기하학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선의 자취를 몰고 가는 형국이다. 여기서 선은 색면의 차이와 각면의 경계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겨난 상처이자 특정 색면을 윤곽 짓는 꼴이기도 하고 동시에 색면에 모종의 형태감을 안겨주는 차원으로도 작동한다. 그 형태감이 각 색채 조각, 색면들을 다분히 상징적 존재로 부양시킨다. 그로 인해 추상화이면서도 어딘지 구상화의 흔적, 혹은 풍경의 분위기가 풍겨난다. 물감의 발림 역시 다소의 두께, 질감을 동반하면서 얹혀지기에 화면은 평면적이면서도 촉각적인 편이다. 그것은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을 다분히 표현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전지연의 그림은 색채, 물감, 붓질, 그리고 색면과 도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끼리의 관계 배열과 증식으로 채워져 있다. 외부세계를 연상시키거나 그 무엇을 지시하기보다는 그림을 이루는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들이 보여주는 상황성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감지되는 편이다. 또한 공간에서 진행되는 색채간의 팽창과 수축, 확장과 집적, 색면과 선의 대조와 충돌 등 여러 대비적 요소들이 예민하게 길항한다.
구체적인 형상은 부재하지만 잠재적인 형태소는 여전하다. 아몬드형의 꼴은 빈번하게 출현한다. 그것은 배, 방주, 요새, 성채, 혹은 집이나 마음의 결정체, 보석, 단단하고 안전한 방패 등을 연상시킨다. 막막한 화면에 그 형태가 반복해서 출몰한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에게 무척 위안이 되는 상징이거나 자신의 존재감을 표상하는 존재인 듯 하다. 산뜻하고 선명한 색상, 다소 엄격한 색면을 바탕으로 그 위를 부유하는 이 자기 암호로서의 도상은 전지연만의 특별한 이미지이자 서사적인 추상, 상징적인 추상화를 만드는 결정적 존재다. 작가는 자신의 마음과 내밀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상징성을 지닌 이 형태를 동원해 서사적인 충동을 간직한 추상화를 내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전지연의 그림은 간편하게 구상으로 귀환할 수 없고 그렇다고 형식적 추상의 굴레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회화(추상)를 존속시키려는 시도들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색채와 선만으로도 아름답고 매혹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그림에 대한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외형적으로는 색면 추상이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여러 차이를 만들어 내면서 상징적이고 풍경적인 추상, 언어적인 추상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몇 가지 상징적인 패턴을 반복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보인다.
여전히 추상회화의 틀 안에서 말이다.
② 얼개의 탄생
Dr. Yung Kang ( Fmr. Professor at Columbia Univ.)
“Every good quality has its bad side, and nothing good can come into the world without at once producing a corresponding evil. This painful fact renders illusory the feeling of elation that so often goes with consciousness of the present the feeling that we are the culmination of the whole history of mankind, the fulfillment and end product of countless generations.”
-Carl Jung
꿈과 현실, 우월과 열등, 사랑과 미움 그리고 선과 악처럼 늘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양극적인 피할 수 없는 갈등 속에서 그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연구는 여러 방면으로 지속되어 왔다. 임상 심리학자 칼 융은 일찍이 Persona ( 가면속의 나 ) 와 Shadow ( 바람직하지 않은 나 ) 를 통하여 두 가지 양극성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심리문제를 분석한 바가 있다. 고대철학이나 현대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이보다 인간이 더많이 고민했던 것은 없었으리라 …
나는 한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이런 내적 문제의 갈등에 대한 도전과 노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지연, 그녀의 작가노트와 초기 작품들의 성향을 통해서 그녀 역시 얼마나 삶이란 명제를 두고 고민해 왔는지, 세상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실존과 본질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녀의 작품 <시지프스의 돌>을 감상하며 되풀이 되는 허망한 노력과 완성시킬 수 없는 부족한 인간의 한계와 실존 그 자체를 그녀만의 창작 개념과 추상 회화의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노력을 볼 수가 있다. 그녀의 작가노트에 쓰여 있듯이 미술 작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좀더 나아가 그녀가 믿는 하나님 자녀로서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Persona 와 Shadow 를 인지하며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 했던 노력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상실된 나와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나로 산다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나 의식과 무의식속에서 그 힘든 균형을 이루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만든 그녀의 작품 속에 나오는 얼개의 형상과 그것들의 흐름을 감성과 이성의 표현을 통하여, 혼돈된 인간의 명제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얼개의 탄생> 이유다.
전지연은 미니멀 추상 작가다. 얼개는 다 쓰고 난 몽땅 연필 같기도 하고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우주선 처럼 귀엽게 생겼다. 얼개의 탄생은 곧 인간의 현실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얼개는 그 감성을 따라 자유로이 커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성 속에서 불안한 위축된 긴장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얼개는 그녀의 작품 속에서 소리 없는 언어의 역할을 한다. 본질과 실존의 혼돈 속에서 항해를 하기도 하고 얼개의 흐름은 변칙과 조화속의 인간의 삶들을 회화적으로 구술하고 있다. 그녀에게 미니멀이란 매사에 투명해지려는 훈련이고 의지와도 같다. 그녀의 추상작품을 보면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재정의하고 양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려는 노력을 볼 수가 있다. 다채로운 색으로 연결된 선들과 면의 만남 그 가운데 늘 등장하는 얼개를 통하여 죽음과 영원, 버려진 생명 그리고 이성과 감성의 아픔을 극복하는 고귀한 인간의 인내를 위로하고 있다.
예술자체가 대답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고민에 대한 질문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예술이 우리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것을 표현하려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얼개는 삶이고 영혼이며 절대적인 힘을 지닌 유기체로 문헌에 나오는 만달라와 아브락사스와 혹은 천사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얼개는 그자체가 소우주 같은 영혼의 존재인것이다. 당시 의사 칼융으로부터 정신치료를 받고있던중 얻은 만달라의 형상과 꿈의 해석에서 영향을 받고 헤르만 헷세가 그의 명작 <데미안> 을 완성했듯이 싱클레어의 양극적 고민은 아직도 우리들의 고민이고 갈등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늘 인간의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알에서 깨어나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라는 대목에서 짐작 가듯이 헷세는 절대적인 그 무엇인가를 아브락삭스로 표현했었다.
전지연은 “얼개”를 통하여 영적인 유기체로 집합적인 상상과 우주를 대신하는 그 존재를 회화로 표현한 것이다. Persona 와 Shadow 는 분리 시킬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the life of every man is a path to self, test a path, a path sketch” 칼융의 말을 기억해 보니, 삶 자체가 자신을 찾아가는 경로이고 또 그 경로를 시험하며 경로를 그린 것이라 했다. 만달라와 아브락사스의 역할처럼 전지연 작가에게는 얼개가 그 흐름을 통하여 본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고 치유하는 수호천사의 모습 인지도 모른다
③ 구성과 색면을 통한 파라다이스의 메신저
김종근 (미술평론가. 고양 국제 플라워 비엔날레 감독 )
전지연의 작품을 보면서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화가 피에트 몬드리앙을 떠올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몬드리앙이 일상적인 <나무연작>의 풍경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단순화 시켜 선과 면, 색채만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추상의 조형세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사물을 수평선과 수직선만으로 생략하여 마침내 그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비례의 추상공간을 완성한 것이다
전지연 작가도 일찍부터 <얼개>라는 테마를 자신의 회화의 모티브로 삼았다. 사전적 의미로 얼개란 어떤 사물이나 조직의 전체를 이루는 짜임새나 구조를 일컫는다. 전지연은 이 <얼개> 라는 구조를 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색채와 형태에 실어 회화의 완성을 일관성 있게 추구해왔다.
초기에 그녀의 작품은 이 <얼개>라는 형상에 아주 충실한 듯 <얼개>의 기본적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형식이 그녀가 생각하는 회화의 보편적인 질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작가는 “그림이란 비례와 균형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피에트 몬드리앙의 예술적 이념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회화를 바라보는 전지연의 이해와 시각은 매우 보수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보여준 <얼개>는 보편적으로 일정한 틀과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그 형태에 예속되어 있지 않으며 형태들은 다분히 구조적이고 기하학적인 표현에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그 <얼개> 속에 작가 자신이 담으려는 그 언어, 즉 메시지가 곧 회화의 등가물로 인식했을 거라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최근 그녀의 작품에 보여지는 <얼개>는 매우 아름답고 자유롭다. 이러한 흐름에는 작가가 구태여 <얼개>라는 개념과 형태에 구속 되지 않겠다는 자유의지 혹은 변화로 평가된다.
그 어디에도 이제 <얼개>에 관한 한 “고집스런 형태도, 연연함도, 닫힘도 없다. 안과 밖의 구분도 무게도 없다. 따라서 무엇과도 만날 수 있고,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다는 가장 자유로운 경지에 작가가 정착했음을 상징한다.
어쩌면 그녀는 동양의 철학자 노자가 가졌던 도의 개념을 생각 한 것은 아닐까? 아니 그렇게 생각 했을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이미 “도”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선과 면, 평면과 입체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관심은 면 분할을 통하여 색띠를 그리고, 다양한 도형의 형태에 색을 더 하면서 자신의 조형적 어법을 구축했다.
때로는 날카롭게 각진 도형으로, 완만한 선과 부드러운 면을 잘라내며 경쾌한 색면으로 전지연식 스타일을 완성한 것이다.
균형과 고집스런 규칙으로 짜여진 화면속에 대조적인 형태들은 지적이고 우아한 색채와 교감하며 평면이 보여줄 극적인 조화의 경지를 대담하게 보여준다.
그 형상들은 때로는 “위에서 내려다 본 세상” 같기도 하지만 “옆에서 본 세상”, “내면의 은밀한 이야기”처럼 그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지적인 예술가의 스토리가 농축되어 있다.
작가는 이런 형태의 예술창작과 작업 과정을 “치유와 위안을 주는 행위’로 정의 한바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그러한 인상을 주고 있는 이 예술가의 작업 속에는 분명 작가의 메시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궁금하다. 하지만 여전히 필자가 바라보는 전지연 작업에 확신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기도하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전지연의 작품을 보는 것에 동의 한다면, 이번 쉐마 미술관의 작품들은 그간의 고뇌에 대한 하나의 초월적인 기도의 응답인 동시에 결과로 불러 마땅하다.
그 응답에서 그녀는 그 동안 갈고 다듬어 온 <얼개>에서 진일보한 승화 된 색면과 구성의 엘도라도에 무사히 안착 했음을 알리는 사인이 되는 셈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녀가 펼쳐 보이는 색면과 구성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주목해 볼 일이다.
이제 문제는 궁극적으로 이 작업들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더욱이 그녀의 메시지가 추상적일 때 그 해석은 더 난해할 수도 불가능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미학자 빌헬름 보링거가 간파했듯이 추상미술은 감정이입의 중요한 전달 형식일 것이다. 이처럼 전지연의 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로는 어떤 내적 충동과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 예술충동과 필연적 관계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림을 마치 모든 이유와 결과로만 해석하려는 것 또한 무모한 일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가족과 일상의 관계에서부터 자연, 나아가 절대자, 그리고 나와의 내적 관계”까지 그녀의 회화가 이런 메시지를 아우르고 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들이 작품 속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등장 시키지 않는 것이 전지연 회화의 특질이자 은근한 매력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회화는 내면의 의식을 색과 형태로 담아내는 메타포적 언어의 예술이 아닐까 추측 된다. 예를 들면 그 생활 속의 흔적들이 화면 속에 때로는 차가운 형상으로, 우아한 색채로, 작은 띠로, 비정형의 얼개로 합체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달한 그 비밀스런 색채와 형태들의 조화가 우리들에게 변하지 않는 시각적 즐거움의 풍부하게 준다는데 그의 회화적 메시지는 이지적이고 종교적 숭고함이 묻어난다.
나는 그녀가 얼개를 버리지 않고, 얼개에서 혁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색채와 형태의 비약적인 표현에 크게 주목한다. 왜냐하면 얼개가 추상적 형태로 단순화 되면서 그녀는 색면의 분할과 구성을 연출하는 능력이 거침없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마치 말레비치처럼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형태에 목말라 했듯이 원, 사각형, 삼각형 등에 색채를 이끌고 기하학적 바다로 끊임없이 항해 할 것이다.
또한 여전히 회화의 근본적인 조형 요소인 선과 색으로 세르쥬 폴리아코프가 이룩한 탁월한 구성의 질서 있는 작품성에 다다를 것이다.
자연의 기본적 형태에 대한 몬드리앙의 지적인 탐색이 예술 세계에 새로운 통로를 제시해 준 것처럼, 그의 <얼개>가 회화가 가지는 최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또 다른 입체작품의 가능성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하여 추상으로 화면을 더욱 질서 있게 분할하고, 감정을 형태화 함으로서 작가의 사명인 메시지의 본질에 다다를 것이다.
이런 전지연의 시각적 표현의 메타포가 가능한 이유는 작가가 그다지 미술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온전하게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데 끊임없이 회화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캔버스에 자신의 메시지만으로 언제나 화면을 가득 채운다는 것은 외로운 일일 것이다. 그 외로운 순례 길에 그가 잠시 관심을 보였던 입체작업으로의 표현 영역을 확장해 보는 것도 그녀에겐 엘도라도 이상의 오아시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진부한 평면회화의 일탈로 보이지만 극복이며 이것으로 표현의 다양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지연작가는 기본적으로 속성상 자신이 인지한 내면의 풍경을 어느 때는 모호하게 드러내고 다소 불균형적인 구조와 형태로 담아낸다. 그래서 <얼개>의 연작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며 강요하지 않아서 자유롭고 지적인 교양이 있다.
때로는 공간이 주는 시각적 비례에 우리를 호흡하게 하고, 색채의 아우라에 침묵하게 하며, 편안한 형태의 펼침으로 존재의 흔적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너무 우리의 소중한 내면의 풍경을, 관계를 팽개친 채 아름다운 순간들을 상실한 채 현실에 파묻혀 생활한다.
전지연의 회화는 그런 인간 삶의 내밀한 풍경에서 관계의 존재방식을 끊임없이 캐물어 가며 치열하게 시각화 하는데 무엇보다 회화로서 치명적인 매력을 품고 있다.
우리가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생명의 즐거움과 지적 성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미술의 아름다움이자 힘이며 생명력이 아닐까?
전시제목The Unseen Color – Ulgae (보이지 않는 색 – 얼개)
전시기간2016.11.22(화) - 2016.11.30(수)
참여작가
전지연
관람시간10:00am~19: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éoul (서울 종로구 통의동 6번지 갤러리 팔레 드 서울)
연락처02-730-7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