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회화예술
한국미술사 l 조선중기 회화예술
혼돈과 은거의 역사
조선중기는 대란과 당쟁으로 점철된 불안한 시기였으나,
남종화의 전래, 화가들의 은거, 화원가문의 등장 등으로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중기 회화예술
한국미술사 l 조선중기 회화예술
혼돈과 은거의 역사
조선중기는 대란과 당쟁으로 점철된 불안한 시기였으나,
남종화의 전래, 화가들의 은거, 화원가문의 등장 등으로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야우한와도>, 16세기 후반, 비단에 담채, 19×14cm, 간송미술관 소장
문학과 그림에 등장하는 소는 순한 성향 때문에 주로 속세의 인간을 등에 태우고 평화로운 전원으로 돌아가거나 전원에서 풀을 뜯는 한가로운 모습으로 자주 형상화되었으며, 이러한 모습이 김시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야우한와도>는 건장한 황소가 아닌 체구가 아담한 암소를 소박하게 표현함으로써 한국적 서정성을 표출하였다. 배경의 산과 바위를 부드러운 필선과 옅은 담묵으로 표현해 절파화풍의 영향을 암시하고 있다.
<황우도>, 16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26.7×14.9cm, 서울대박물관 소장
주위경관을 간략히 표현해 화면 집중력을 높이는 방식은 김시가 그린 우마도(牛馬圖)의 전형적인 기법이다.
김식, <고목우도>, 17세기, 종이에 담채, 26.7×14.9cm, 서울대박물관 소장
김시의 아들인 김식의 작품. 부친의 화풍을 따르고는 있으나, 전형성이 강해 다소 틀에 박힌 경향을 보인다.
傳 이경윤, <탁족도>, 16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27.8×1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속을 벗어나 자연에 은거하고 싶어 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리를 잘 묘사한 작품이다.
<풍죽>,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90.0×35.8cm, 개인소장
예로부터 대나무는 비바람에도 쉽게 꺽이지 않고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아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로 각광받았다. 선현들은 대나무를 봄으로써 속기(俗氣)를 없애고 어진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정의 대나무는 죽간(竹竿)이 조선 후기의 묵죽에 비해 가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월매도>,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119.2×53.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러진 늙은 가지와 수직으로 곧게 뻗어 있는 어린 가지를 병치시키는 어몽룡의 화법(畵法)은 중국에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으로, 글씨를 쓸 때 붓에 먹을 적게 묻혀 글씨의 중간에 자연스러운 공백이 생기게 하는 비백법(飛白法)을 응용한 것이다.
<문월도>, 17세기, 비단에 수묵, 18.1×24.1cm, 간송미술관 소장
인간의 어리석음을 “달을 가리키는데 오히려 손가락을 본다”는 선종의 고사에 비유한 그림이다.
<이금산수도>, 17세기 전반, 흑견에 이금, 87.8×6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금이란 채색에 쓰이는 금가루로, 보통 불화를 그리거나 경문을 베끼는 일[寫經]을 할 때 주로 사용된다. 유교기반의 조선사회에서는 이금의 사용이 불화에서 일반회화로 전환됐다. 이징은 고식화법과 이금을 즐겨 사용해 후대 사람들에게 개성이 적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달마도>, 17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83×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도에서 갈대를 타고 중국으로 와 선종을 전파했다는 달마를 그린 작품으로, 선종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선중기는 대란과 당쟁으로 점철된 불안한 시기였으나, 남종화의 전래, 화가들의 은거, 화원가문의 등장 등으로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배경
조선중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대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사색붕당이 계속되어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특히 사림들의 당쟁으로 사화(士禍)가 일어나면서 삶에 대한 불안과 회의를 느낀 문인들이 관직을 떠나 은거하는 현상이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은일(隱逸)사상과 관련이 깊은 탁족(濯足), 어초문답(漁樵問答), 고사한담(高士閑談)과 같은 주제를 담은 산수인물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 시대에 이르면 그림을 즐겨 그리는 선비집안이나 화업을 대대로 이어가는 화원가문이 등장하면서 ‘그림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중기 회화예술의 특징은 첫째, 조선 초기 강희안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浙派系) 화풍이 김식, 이경윤, 김명국 등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고, 둘째, 이암에 이어 김식, 조속 등에 의해 영모나 화조화 부분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의 한국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셋째, 묵죽, 묵매, 묵포도 등에서도 이정, 어몽룡, 황집중, 허목 등의 대가들이 꽃을 피웠다. 넷째,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전래되어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작가
-양송당 김시: 전원풍의 은거화가
문인화가였던 양송당(養松堂) 김시(金禔, 1524~1593)는 산수, 인물, 우마(牛馬), 화조 등 여러 분야의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당시 최립(崔笠)의 문장, 한호(韓濩)의 글씨, 그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그림은 절파계(浙派系)의 화풍을 많이 받아들였다. 중종 때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좌의정 김안로(金安老)의 아들이자 선비화가 김식(金埴)의 조부이다. 1537년 아버지가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몰려 권좌에서 물러나자 일생을 독서와 서화로 보냈다.
작품: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한림제설도, 목우도, 황우도, 우배도하도(牛背渡河圖), 매조문향도, 선록완월도(仙鹿翫月圖), 하산모우도(夏山暮雨圖) 등
-낙파 이경윤: 산수인물화
사대부 화가인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은 영모화(翎毛畵)와 동물화 등을 즐겨 그렸으나, 산수인물화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조선중기 화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절파화풍의 정착에도 큰 역할을 했다. 처음 학림수(鶴林守)를 제수받고 뒤에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졌다. 그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찍부터 절파풍의 대가 김시와 교유한 점으로 보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 시주도, 송별도, 관월도, 수하대기도(이상 산수인물화첩), 산수도,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등
-탄은 이정: 대나무 화가
세종의 현손(玄孫)이기도 한 탄은(灘隱) 이정(李霆, 1541~1622?)은 시·서·화에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이다. 조선 중기에는 사군자(四君子)와 같이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들을 시로 노래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유행했는데, 그중 이정은 대나무를 연모해 묵죽(墨竹)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작품: 풍죽도, 죽도, 난도
-설천 어몽룡: 묵매도의 유행
설천(雪川) 어몽룡(魚夢龍, 1564~?)은 매화를 잘 그린 화가로, 가지와 꽃 등은 담묵(淡墨)으로 단숨에 치고 그 위에 농묵(濃墨)으로 꽃술·포(苞)·이끼 등을 점철(點綴)하는 특이한 솜씨를 가졌다. 황집중(黃執中)의 포도, 이정의 대나무와 함께 삼절(三絶)로 불린다.
작품: 흑매도, 설매도, 월매도 등
-허주 이징
허주(虛舟) 이징(李澄, 1581~?)은 이경윤의 서자로, 도화서 화원을 지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중국화가 맹영광(孟永光)의 지도를 받았으며, 산수를 비롯한 인물, 영모(翎毛), 초충(草蟲) 등에 모두 능해 당대 최고의 기량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징은 당시 유행하던 절파화풍을 따르지 않고 조선 전기의 고식(古式) 화풍을 충실히 계승한 보수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다.
작품: 문월도, 김시습상, 고사한거,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등
-김명국: 선종화의 대가
조선 중기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풍을 창출했던 인물은 김명국(金明國, 1600~?)이다. 그는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통신사의 화원으로 일본에 가서 크게 환영받았으며 그곳에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화풍은 거칠고 과장된 기운이 감도는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 절파의 후기 양식)를 따랐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개성과 파격이 넘친다.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김명국의 화격(畵格)은 <달마도>를 비롯한 선종화(禪宗畵)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작품: 관폭도, 투기도(鬪碁圖), 심산행려도, 어정산수도, 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 노엽달마도(蘆葉達摩圖), 은사도(隱士圖), 누각산수도, 수로예구도(壽老曳龜圖), 달마도 등
절파화풍의 유행
중국에서 절파는 명나라 초에 활동했던 대진에 의해 시작된 화풍이다. 남송대의 마하파 양식은 절강성 지역에서 미미하게 남아있었는데, 대진은 이를 받아들여 새롭게 만들어 냈다. 그는 주로 널찍한 붓자국으로 질감을 표현하였으며, 강한 농담의 대조나, 적은 공간감과 깊이감, 인물의 큰 비중 등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냈다. 조선시대 회화에서 절파적 양상은 강희안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고사관수도>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른바 소경산수인물화에 속하는 이 그림은 깎아지른 바위의 일부와 인물 곁으로 드리워진 나무줄기, 덩굴가지와 잎, 그 아래 비교적 큰 비중으로 자리잡은 인물 등 중국의 절파, 특히 16세기 후기 절파인 광태사학파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그러나 강희안은 15세기에 활동했던 인물이기에 그림과 작가에 대한 판단을 분명하게 내리기는 힘들다. 이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절파계 화풍은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다.
뮤움 미술사연구팀 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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