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 침묵과 빛 사이
조은정(전시감독, 모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전시명 “침묵과 빛 사이”는 건축가 루이스 칸의 개념에서 빌려 온 말이다. 그는 ‘어둠을 지향하는 공간에서도 그것이 어느 만큼 어두운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비적인 개구부를 통해 유입되는 적절한 빛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그는 측정 가능한 현실(빛)과 측정 불가능한 근원적 존재(침묵)의 조화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미와 영성을 가시화하였다. 사실 중세 고딕성당에서 장미창이 공예품처럼 수놓인 건물 천장 위나 문 장식 위에서 이빨을 드러낸 악마들(가고일)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 굳이 건축가가 제시한 개념의 의미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음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진리, 사랑과 같은 신의 은총은 어둠, 미움과 같은 악마적인 요소와 대비하였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둠이야말로 빛을 드러내는 존재이고, 빛이야말로 대상의 존재를 드러내는 힘인 것이다.
우리가 거주하는 세상은 빛이 있어야 존재가 드러나고, 존재가 있어야 빛을 확인할 수 있다. 빛과 어둠, 빛과 침묵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공존은 모든 존재의 평등성을 의미한다. 침묵과 빛의 공존은 또한 세상 만물의 이치인 불이(不二)에 이른다. 선과 악, 삶과 죽음, 마음과 물질,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는 저 너머의 어느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과 주변이라는 내가 처한 공간을 살피게 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불이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줄임말이다. ‘다르지 않다’의 전제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 곧 포용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하나의 지구에 거주하는 존재로서 지구촌이라 불리는 구성원들이 그 어느 때보다 분열, 반목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불신은 개인의 감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사회적 토대에서 발아한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간 발생하는 가장 큰 반목의 이유는 다름에 대한 수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질성, 다름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발생시킨다. 내가 알 수 없는 상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름에서 발생한 두려움은 억압과 혐오라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터부는 곧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
공자는 평생 지켜야 할 것은 관용[恕]이며 이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 것(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 하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모르는 너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대하는 방법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침묵과 빛’이 의미하는 것처럼 상반된 것은 그 어디에도 없기에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 온 세상이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이번 전시에서 드러내고자 한다.
어지러운 세상을 밝히는 작은 불빛과 같은 것, 치욕스런 것을 넘는 방법은 관용임을 확인한다. 타인이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다르면서도 유일한 개인으로서의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이며 타자를 타자화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함을 또한 인지한다. 좋은 세상을 향한 행동은 관용과 자비의 마음을 여는 것 그리고 사회의 어떤 차별이나 불의를 못 본 척하지 않는 것이다. 관계를 확장하고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인류가 인류로서 존재해온 사회의 구성법칙이다. 사회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 자행되고, 차별은 반목을 낳고 사회를 어둡게 하는데 어둠을 밝히는 빛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함께 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미술관, 박물관은 그러한 빛과 어둠을 조명하며 진실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이자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중심과 주변을 두어 소외를 발생시키는 시각에서 벗어나 중심을 해체하고 세상을 연계짓는 곳이다. 모란미술관의 자연적인 풍광이 전시장을 이루는 한옥 영역에서의 전시를 통해 자연과 인공, 예술을 인간 삶,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장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장애, 외국인, 종교, 성별, 나이, 지역과 같은 하찮은 구분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서임을 깨닫게 하는 작품을 통해 편견과 불안을 넘어서 통합하고 관용의 폭을 넓히는 장을 실현하고자 한다.
안형남은 모란미술관에 거주하며 한옥 영역에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아버지, 이어 가족들과 함께 고국을 떠난 디아스포라 작가이다. 그는 전시를 통해 모란미술관의 한옥 영역의 산신각에 벽화를 남겼다. 그리고 마당에는 <구비구비>라는 깨진 돌멩이를 깔아 한 마을을 상징하는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는 한 마을을 만들었지만, 관객에게는 일종의 가산(假山)과 같은 정원으로 보이기도 했다.
작가
송필은 짐을 진 낙타 형상의 조각과 철로 만든 나무 형상을 안형남이 깔아놓은 마당의 돌무더기들 사이에 배치하였다. 송필은 그 자신 댐공사로 인하여 수몰지구가 된 마을을 강제로 떠난 이주의 경험자로서 “빙하기 같은 극한의 환경 변화 속에서도 생물들이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소규모 피난처나 안식처를 의미하는 집단생물학 용어”인 ‘레퓨지아(Refugia)’를 작품 제목으로 사용하여 오고 있다. 그의 <레퓨지아> 시리즈는 안형남의 작품의 공간과 시간을 이어 하나의 서식처를 새로이 형성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미술관 본관 앞의 잘려진 나무 둥치에 조각으로 매화꽃을 피웠다. 이미 생명을 마친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삶과 죽음의 같지 않되 같음을, 그 영원한 이중주를 보여준다.
김기라는 오래된 연못에 사운드 아트를 설치하였다. 처음 물가에 심었던 나무들이 무성해지고 물고기가 어른 팔뚝만큼 자라는 동안 미술관을 방문한 이들은 연못을 주시하지 않았다. 전시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못이 있어 주변의 나무들이 무성해지고 다양한 생명체를 품는 공간이 되어온 것은 물론이다. 미술관이라는 인공의 공간에 위치하면서도 자연에만 속했던 연못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함으로써 공간에 대한 이해, 작품의 영역과 존재방식에 대한 확장을 꾀하고자 한다. 또한 김기라는 우리가 달을 보듯 미디어를 본다는 것과 달에서는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믿는 것과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 산신이 거주한다는 이미지를 병치하였다. 전통과 현대, 자연과 초자연의 연결점을 미술관의 한 공간에 만들어낸 것이다.
문승현의 퍼포먼스 영상을 보고 앉아 있노라면 공간이란 것 또한 매우 상대적임을 알게 된다. 중증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열린 공간이라 일컫는 공간이 오히려 열려 있는 속성 때문에 더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기도 한다. 미술관, 교회, 문화시설 같은 곳마저 그러한데 건물의 계단, 벽, 문과 같은 모든 열려 있고 공간과 공간을 연결짓는 곳들이 ‘완벽한’ 걸음걸이가 아닌 이들에게는 장애를 더욱 실감하게 되는 공간인 것을 작가의 퍼포먼스를 보며 실감하게 된다. 더불어 배려란 상대방의 입장에서가 전제되어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승현의 아침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생경하다. 익숙함이란 그러할 것이란 풍경에 대한 상상을, 생경함이란 색채와 공기의 다름을 화면에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빛이 쏟아지는 순간의 감동은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더욱 명료한 것이 된다. 동행자 없는 산책 같은 일상의 고독이 무심하게 작품에 들어 있다. 불편과 다름 그리고 편견과 배려라는 복합적인 감정들 사이에서 연결하는 공간의 힘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윤애영의 < Bubbles >은 공간의 연결이란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가시화한 작품이다. 무한의 공간에 떠서 움직이는 버블들은 각기 다른 색의 존재들이다. 이들은 유영하여 만나고 헤어진다. 만나서 몸짓을 부풀리기도 하지만 또 각자의 색으로 환원하여 떠돈다. 하나가 되지만 자신을 잃지 않는 버블에서 해외에서 살아가는 여성예술가의 고단한 삶을 본다면 비약일까. 작품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요리를 하며 외국어로 살아가는 삶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으로 작품을 해가는 그의 삶이, 다름과 공존의 원칙이 버블들의 움직임 안에 녹아 있다. 한편 AI로 작업한 < Time Garden >은 장자의 꿈처럼 세상이 인식의 문제임을 말한다. < Time Garden >은 윤애영의 시리즈 제목이기도 한데 돌에서 물이 흐르고 회로가 도는 세계의 구조는 물질로 보여주던 세계보다 몽환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장자의 꿈에 가깝다. 이 세상에 완벽히 견고한 것은 없으며, 그래서 욕망이 부질없고 다툼이나 이기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창원은 <허그 스텐실> 시리즈와 <기념비적인 그림자>를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의 진실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신문이나 잡지 등 미디어에서 보는 인물들은 사건이나 사고현장 혹은 정치인이나 외교적인 행사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난민캠프에서 어린 동생을 안고 있는 소녀는 전쟁 혹은 국제적 구호와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그 형태를 오려내어 실루엣만을 남겼을 때는 의외의 경험에 놓인다. 마치 성모자상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외교적인 악수에 불과한 인물들 사진도 실루엣만 따면 형태의 외곽선은 격하게 포옹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은 미술사적인 장소에서는 명화의 장면처럼 변화한다. 두 세계가 열려있을 때 예술은 개입하여 두 세계를 최대한 가깝게 만든다. 비참한 현실이 가장 성스러운 장면이 되고, 서로 겨누어보는 경쟁의 상황이 친밀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은 괴리된 현을 이상과 접목시키는 데에 미술이 관여한 결과이다.
김홍식은 미술관을 방문한 이들을 눈여겨보고 기록하는 작품을 하여 왔다. 미술관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놓여 있고 방문자는 이를 의심치 않는다. 작품들은 가장 멋진 모습으로 벽에 걸려 관람객을 도취하게 만드는 이른바 스펙터클한 세계를 재현한다. 그 공간에서는 누구가 작품 대 관객이 되어 세상을 만난다. 손안에 그 세계를 넣으려는 이들은 핸드폰을 들어 <모나리자>를 담는다. 방탄벽 너머 우표딱지만큼 작게 존재하는 <모나리자>를 보는 방법은 디지털 기기 안에 넣는 방법밖에 없기도 하다. 종교적 장소를 떠난 불상이 전시된 박물관에서는 맥락과 관계없이 조용히 대상을 통해 나를 성찰하기도 한다. 작품은 세상과 세상을, 나와 세상을 잇는 매개체로서 미술관과 박물관에 거주한다. 눈으로 훑어야 하는 작품이 아닌 바닥에 놓인 오톨도톨한 작품들은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도 만날 수 있는 세계를 열어놓는 것이다. 시각을 번역하는 것이 아닌, 촉각 자체로 태어난 작품을 ‘감상’하며 세상을 ‘잇는’다는 것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역사라는 사건 안에서 시간을 지나오며 얻게 된 교훈은 관용과 포용이다. 인류의 자산인 사상과 몸짓 그리고 기록이 수용된 공간인 미술관과 박물관은 포용의 공간이다. 예술과 일상, 자연과 인공, 성과 속이 함께 하는 미술관 환경 안에서 차별과 혐오의 본질을 직시하고 분열된 세계를 일소하는 체험을 시도한다. 차가운 봄비가 내려야 꽃망울이 터지듯, 너를 받아들이는 일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 앞에서 인류의 평화에 대한 소망을 펼친다.
전시제목침묵과 빛 사이
전시기간2026.04.14(화) - 2026.07.26(일)
참여작가
김기라, 김홍식, 문승현, 송필, 안형남, 윤애영, 이창원
초대일시2026년 05월 15일 금요일 오후 4시
관람시간10:00am - 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장르회화, 조각, 설치, 사운드아트 등
관람료성인 10,000원, 남양주시민(성인) 8,000원, 청소년,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경증장애인 6,000원, 어린이, 중증장애인, 동반자 1인 5,000원, 미취학 아동 무료
장소모란미술관 Moran Museum of Art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 (월산리, 모란미술관) )
기획모란미술관
주최문화체육관광부,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한국위원회
주관(사)한국박물관협회
연락처031-594-8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