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춘: 길을 묻다 (The Long and Winding Road)

2013.11.01 ▶ 2014.01.05

성곡미술관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Map

초대일시ㅣ 2013-10-31 17pm

  • 박병춘

    기억의 풍경-함피 한지에 아크릴, 135x190cm, 2013

  • 박병춘

    기억의 풍경-함피2 한지에 아크릴, 135x182cm, 2013

  • 박병춘

    붉은대지 한지에 먹,아크릴, 2001

  • 박병춘

    명동성당 한지에 먹, 아크릴, 175x133cm, 1997

  • 박병춘

    물에 빠진 사람 한지에 먹,아크릴, 193x133cm, 1995

  • 박병춘

    사랑 한지에 먹,아크릴, 191x262cm, 1997

  • 박병춘

    꽃에 대한 독백 한지에 먹,아크릴, 171x136cm, 1997

  • 박병춘

    나 수박이야! 한지에 먹,아크릴, 151x149cm, 1998

  • 박병춘

    낯선 풍경 한지에 아크릴, 70x260cm, 2013

  • 박병춘

    어이, 왔어! 한지에 먹,아크릴, 198x138cm, 1995

Press Release

1.
성곡미술관은 2013년 마지막 전시로 <박병춘: 길을 묻다>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성곡미술관이 지난 2009년부터 마련, 진행해온 ‘중견중진작가집중조명’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의 당대 허리세대작가를 주목하여 그들의 작업을 미술관 전시를 통해 응원, 지원하는 성격의 전시다. 관객에게 해당 작가와 작업의 존재, 그 예술적 의의와 가능성을 널리 알리고 소개하는 목적이 우선이지만, 사실 작가 자신을 겨냥한, 작가 스스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다. 자신의 작업과 동고동락했던 지난 시절과 현재를 작업을 통해 돌아보고 살피며 작가로서의 현좌표, 또는 작업의 미래적 비전을 스스로 가늠해보는 기회를 작가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많은 작가들이 살아생전 자신의 작업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고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중견중진작가전을 개인전 중심의 반회고전 성격으로 고집하며 조직하는 이유다. 기실은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다. 다재다능한 젊은 작가들이 막강한 제작술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국내외 미술계를 평정하듯 종횡무진하며 활동하고 있다. 작금이야말로 상대적으로 소외된 연령대의 작가와 장르, 형식에 좀 더 집중하여 그들의 내공과 존재감을 균형 있게 극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미술관의 균형 잡힌 역할과 미술관의 전시프로그램이 현시점에서 유효하고 또 의미가 있다고 성곡미술관은 판단했다.

2.
주지하다시피 한국화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미술계에서 조각, 판화 등과 함께 이른바 ‘소외장르’였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물리적 전시 횟수나 실제 미술시장에서의 거래, 또는 아트페어나 시중에 유통되는 규모나 비율을 따져 보아도 그러하다. 이러한 불균형 현상을 계량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물론 미술소비자의 미감변화와 국제적인 미술트렌드의 직간접적인 영향과 그에 따른 쏠림현상도 상당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작금의 한국미술과 그에 따른 정형화된 유행형식, 특히 때 아닌 이런저런 극사실화풍이 과잉 유입, 공급되면서 돈을 쫓는 젊은 작가들의 시장충성도 높은, 당도(糖度) 높은, 세속적 작업들로 미술계는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를테면 만나기 힘든, 보기 힘든 형식과 장르가 미술계에 새롭게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행의 중심에 있던 회화 장르 내에서도 이슈특정성(issue-specific)을 담보하는 다양한 형식, 이른바 이슈의 종(種)다양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80년대의 신표현주의적인 성향을 현실이슈에 맞게 발전시키거나 그들의 감성과 철학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작업, 또는 브러시 스트로크(brush stroke)가 살아 꿈틀거리는 두툼한 질감의 부조적 회화, 작가의 제작충동이 거친 호흡으로 드러난 구상표현적 회화작업 등을 접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추상작업은 물론이었다. 질퍽하고 질펀해야할 회화가 대체로 건조하고 플랫(flat)했다. ‘누가누가 더 꼼꼼하고 예쁘게 잘 그리나’ 대회를 보는 듯했다. 사진이 할 일을 굳이 붓을 놀려 회화가 대신하기도 했다. 사진은 회화를 지향하고 회화는 사진을 닮고자 했다. 영상(映像)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한 판타지(fantasy)의 제왕―회화, 미술장르의 꽃―회화가 그들만의 독보적 가능성의 장(場)내에서 지나치게 안정적인 현실안주(現實安住)를 택했다.

특히 당대의 이념갈등과 대립, 충돌의 사회상을 적극 반영한, 이른바 동서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빈곤, 기아 등과 같은 남북문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작업을 지난 10여 년 동안 만나기 힘들었다.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과 지역의 고질적 한계, 나아가 실업, 결혼, 학업, 입양, 다문화사회, 테러, 핵위협,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알력과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왜곡된 힘의 논리, 민족분단의 문제 등과 같은 현실이슈들을 적극 끄집어내어 반영한 회화를 만나기 어려웠다. 한국미술은 그저 밝고 명랑하고 프티(petit)하며 일견 역동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정작 작업이 비롯되는 사회의 이런저런 현실, 자신의 모습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세상은 외견상 풍성해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곤궁했다. 사회는 시나브로 병들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도 그러했다. 미술동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하나둘 지쳐갔다. 인기작가 몇몇을 쥐고 앉아 상황에 따라 ‘돌려막기’하는 식으로 미술동네가 돌아갔다. 작가들은 물론 시장 스스로도 상업적 동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시장은 시장이다. 과연 예민했다. 지난 10여 년을 든든하게 지지했던 컬렉터들의 충성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대중과 작가의 피로감도 급속하게 누적되었다. 이들은 서둘러 이리저리 대안을 찾아나서는 형국이다. 전략적으로 특정 방향으로 물고를 트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이들에 비해 작가는 그러한 변화양상이나 세류의 변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나 자각이 더디었다. 안다고 해도 몸을 바짝 낮추고 시장과 대중의 눈치를 살피는 형국이었다.

성곡미술관이 중견중진작가집중조명전 대상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을 ‘화제작가’보다는 ‘문제작가’ 쪽으로 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작가와 작품의 성격은 제작년도와 관계없이 당대성을 강하게 띤다. 성곡의 중견중진전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래토록 불리우는 노래처럼,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 셀러 소설처럼, 여전히 유효한 작업과 작가정신을 대상으로 한다. 즉 그 어떤 경우보다도 작가의 예술철학과 자세, 정신을 우선 고려하고 있다. 화제작가는 일시적, 소비적으로 화들짝 세간의 주목을 받을 따름이다. 문제작가가 대부분 미술사에 남는다고 확신한다. 성곡은 이들 문제작가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3.
<박병춘: 길을 묻다>展은 이러한 한국미술동네와 현대 한국화의 딜레마를 박병춘이라는 중견작가의 작업을 통해 반성적으로 돌아보고자 기획되었다. 박병춘은 한국화의 침체를 넘어 죽음을 언급하는 미술계의 세류(世流)를 온몸으로 관통하며 현존 한국화가 중에서 가히 파격적이라 할 만큼 독보적이고 활발한 예술창작실험을 선보여 왔다. 유행과 타인의 시선에 굴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건강한 입신(立身)을 위해 자기투자와 자기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한눈팔지 않았다. 작업에 몸을 던지고 세상과 맞서며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박병춘을 중견중진작가로 선정, 소개하게 된 이유다.

박병춘에게 있어 대학시절과 졸업 직후의 한국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국제사회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작가는 당시 답이 나오지 않았던 자신과 작업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난했고 또 가장으로서 중압감이 상당했지만, 오히려, 특유의 낙천적 사고로 이들과 끈질기게 싸워 나갔다. 때론 즐겼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등과 같은 존재론적 질문을 쉼 없이 자신에게 던졌다. 살기 위해 숨을 쉬듯,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작업이란 페달을 더욱 힘차게 그리고 세고 거칠게 밟아야만 했다. 또한 ‘무엇을 그릴까’라는 미학적 고민과 자신과 세상과의 끝나지 않을 싸움을 즐기듯 이어가며 긴 터널과도 같은 질곡의 90년대를 붓하나로 버텼다. 설치(設置)가 설치던 시절, 흐물흐물한 붓하나를 부여잡고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심리적 구조를 단단하게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작가가 그러하듯 박병춘에게도 미술야전에서 살아남을 필살기가 필요했다. 박병춘은 작업이 풀리지 않을 때, 작가의 길을 택한 것이 후회될 때, 삶이 번잡하다고 생각될 때,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화첩을 들고 떠났다. 습관처럼 산을 찾았다. ‘내가 눈으로 본 것이 과연 풍경인가? 산수는 무엇인가? 그림은 무엇인가?’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연에 의지해서 위안을 얻으려 했다. 눈과 비를 영육으로 맞이하고 몸으로 미끄러지며 체질적으로 다른 그들의 본성에 부대끼면서 스스로를 낮추고 답을 구했다. 얼마나 반복했을까, 박병춘은 답을 구하려는, 해법을 얻으려는 생각을 접었다. 그곳에는 세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또다른 화두들이 가득했다. 해답을 주기는커녕, 잔뜩 문제를 던졌다. 답이 아닌 숙제를 한 무더기로 안았다. 오기가 생겼다. 붓을 꺼내들고 대자연이 주는 새로운 숙제들을 기꺼이 받아 적었다. 그리는 것이 빨랐다. 숙제를 그렸다. 오로지 들고 간 먹으로만 빠르게 자연의 하문(下問)을 놓칠새라 받아 그렸다. 당시 박병춘에게 화첩은 그의 말대로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비단 그때뿐이랴, 당시는 물론 현재도, 앞으로도 유효한 당당한 ‘삶’일 것이다.

2000년대를 활짝 열쳤던, 화단을 풍미했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박병춘의 필살기는 그렇게 붓을 통해 몸으로 스며들어왔다. 중요한 것은 이후에도 박병춘이 자신에게 필살기를 전수해준 스승, 산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에 대한 관심과 보은(報恩)은 ‘풍경’, ‘산수’, ‘여행’ 등의 연작으로 이어지며 스승, 산과 대지의 은혜를 다양한 방식과 형식, 표정으로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결먹보은’인 셈이다. ‘기억의 풍경’(2001), ‘흐린 풍경’(2003), ‘검은 풍경’(2004), ‘흐르는 풍경’(2006), ‘채집된 산수’(2007), ‘풍경’(2010), ‘여행’(2011), ‘낯선 풍경’(2013)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일련의 전시 및 작업이 그것으로, 이들 전시를 치르면서 박병춘의 제작충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창조라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박병춘의 물오른 생각과 농익은 몸놀림은 벽(壁, wall)과 평면을 벗어나 장(場, field)에서의 입체, 설치작업으로, 다소 공격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작업공간과 형식의 변화 그리고 조형적, 미학적 디벨롭(develop)은 박병춘을 일약 늦깎이 설치작가로 보란 듯 자리매김시켰다. 라면산수, 고무산수, 칠판산수, 봉지산수 등으로 이어진 왕성한 입체실험은 모두 평면산수풍경작업으로부터 튀어나온 것들로 당시 평면작업으로부터 배가된 박병춘의 내공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름하야 ‘박병춘식 산수풍경’, ‘병춘준(峻)’은 이렇듯 자연의 산수풍경으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세상의 산수풍경으로 돌려주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솟아오른 욕심 없는 준인 것이다.

4.
이번 성곡미술관의 <박병춘: 길을 묻다>展은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작가가 지난 1988년 이후 최근까지 제작한 작품 중 66점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심사숙고했다. 그동안 미술관 공간이 작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지만, 실내공간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박병춘의 지난 23년 동안의 욕심과 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이다. 곤궁했던 시절, 자신을 크게 알아주지 않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제작한 작품의 수와 지지체의 크기, 화첩, 드로잉 등 작업의 총량도 놀랍지만, 동서양의 회화술과 안료와 기법을 두루 섭렵하고 혼융합하며 지난 23년간 독보적인 예술성과를 남겼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오늘의 명성이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박병춘은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평면, 입체, 설치 등 장르구분을 의식하지 않으며 특유의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과 도전으로 한국화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왔다. 이번 전시는 이들 박병춘의 지난 작업여정을 반회고적으로 돌아보는 뜻 깊은 자리로 앞으로의 작업지향과 미래적 좌표를 대중과 함께 가늠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박병춘 작업세계의 전모를 살필 수는 없지만, 박병춘의 미학적 실천과 고민의 고갱이를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이 될 것이다.

1관에서는 학창시절 작업으로부터 90년대말까지 제작한 작품 50점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기성화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작업들이 대부분으로, 작가로서의 지명도가 확립되기 이전의 혈기 왕성한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시기는 박병춘이 작가로서, 가장으로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해당하며 주로 굵고 검은 먹으로 윤곽선과 화면을 조율하고 대담한 원색의 아크릴 물감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가감 없이 쏟아 부었던 시절이다. 목탄, 콘테, 파스텔 등과 같은 재료를 거침없이 도입했으며 주로 인간실존과 자아, 무의식, 영혼, 전쟁, 인간의 본능과 욕망, 욕정, 가족이 있는 풍경, 계절풍경, 삶의 풍경 등을 다루었다. 무겁고 거친 생각과 비판적 표현으로부터 가볍고 경쾌한 풍자와 위트가 반영된 이른바 ‘병춘스런’ 그림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보아도 당당한, 기운 센 작업들이다.

눈치 볼 일도 없었고 억지로 꾸밀 일도 없었다. 붓이 가는 대로, 생각 닿는 대로 그려 제꼈다. 마음대로 그렸다. 이 시기의 작업이 보는 이에게 많은 공감과 공분을 선사하는 것도 표현의 대담함과 솔직함 때문이다. 당시 90년대 ‘회화의 죽음’, ‘회화의 위기’를 운운하던 설치미술시절에 이토록 충분히 넘치도록 회화적이면서 정곡을 찌르는 시원함과 직설적인 화법을 담은 속시원한 ‘그림’은 본적이 없었다. 파노라마식으로 제작한 1,300호 상당의 초대작으로부터 평균 200호에 달하는 대형화면도 이 시기 박병춘 작업의 한 특징으로 거침없는 과감한 호흡이 압권이다. 작가의 의식흐름과 고민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으로 특유의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회화정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구가하던 시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열정에 비해 당시 90년대의 정서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확인하고 위로하기보다는 그러한 내공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박병춘이 존재함을 증명하고 강조하기 위해 1관 전체 공간에 걸쳐 소개한다. 세상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와 세상을 향해 돌직구를 날리며 달려가던 시절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기 위해서다. 자기 정체성과 자기 예술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 정제되지 않은 거친 호흡과 열정이 그대로 녹아있다. 박병춘의 90년대 작업이 새삼 고맙고 반가운 이유다.

5.
2관은 2000년대의 작업을 압축해서 소개한다. 특히 2층에는 낯선 붉은 풍경이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인도의 ‘함피’라고 하는 독특한 화산지역에 존재하는 실제 물리적 지형이다. 누차에 걸쳐 만나고 공감하며 몸과 맘으로 받아들인 생생한 감흥이 10개의 다양한 버전으로 펼쳐져 있다. 모두 미공개 최신작들이다. 함피의 심리적 따뜻함이 부드럽고 인간적인 표정과 질서로 화면에 융착되어 있다. 붉은 화산지형은 박병춘의 달아오른 붉은 열정과 닿아 있다. 전체적으로 붉은 풍경이다. 바위의 덩어리감은 박병춘의 운필, 즉 붓의 자유로운 운용을 연상케 한다. 춤을 추듯 자유로이 존재감을 자랑한다. 박병춘 작업의 성실하고 꾸준함이 또다른 가능성으로 개화한 경우다.

오랜 시간 동안 퇴적된 농익은, 가슴 속으로부터 뜨겁게 밀고 올라오는 회화충동과 호흡이 ‘함피’의 거부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지형과 조우한다. 박병춘은 전생의 인연을 떠올리듯 한껏 뜨겁게 끌어안았다. 비록 남의 지형이지만, 자연에 대한 그의 천석고황(泉石膏肓)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바로크적인 장중함과 로코코적인 아기자기함, 자유분방한 작가의 영혼이 그대로 읽혀지는 인상적인 풍경이다. 붉은 색을 주조(主調)로, 특유의 병춘스런 호방한 필치를 툭툭 더해놓았다. 사방에서의 표정, 주로 정면을 담아내는 작업에서 차츰 땅바닥에 시선을 보내고 그들 바닥에 내재된 표정과 질서를 담아내려는 작업으로 진행했다. 사람을 닮은 듯한 바위, 산들의 자연스런 표정과 성결은 인간세상만사를 품어 안고 있었다. 세상과 닮았다. 박병춘이 홀로, 때론 가족과 함께 총4회에 걸쳐 함피를 찾은 이유일 것이다. 울퉁불퉁한 표정은 당시 방문할 때마다의 각기 다른 감흥으로 이해된다.

박병춘은 최근 오랜 시간 정들었던 수색의 작업실을 떠나 의정부로 이사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후 최초로 독립된 자기 소유의 작업실을 갖추게 된 것이다. 수색작업실은 현재의 작가 박병춘을 가능하게 한 산실이자 정신적 보고(寶庫)였다. 작가는 수색시절의 작업철학을 응축한 단풍나무 한그루를 1층에 세웠다. 작업실 우측면에 자리하고 있던 잘 생긴, 소담한 나무다. 생나무를 뽑아 전시장 천정에 거꾸로 심었다. 전시장 바닥에 옯겨 놓은 묵고(黙考)의 깊은 바다에 출산하듯 사력을 다해 조응시켰다. 이번 전시의 백미(白眉)다. 수면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숨 쉬는 나무의 생생한 내음이 전시장 가득 진동한다. 살고자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팽팽한 긴장감과 적요(寂寥)가 작가는 물론, 관객 스스로를 돌아보게 할 것이다. 반면 전시장 측벽면에 희롱하듯 스민 먹빛 그림자는 차분한 한 폭의 가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2층 테라스에서 자리를 좌우로 옮기면서 관람하시길 권한다. 이 공간은 작가의 지난 작업과 그 철학을 차분히 반추하고 음미하는 공간이자, 보는 이 각각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명상적 공간이 될 것이다. 먹을 단 한방울도 쓰지 않았지만, 새삼 ‘먹’이라고 물질이 지닌 깊고 깊은 ‘유현(幽玄)의 미학’을 돌아보게 한다.

이번 전시 마지막 전시공간인 3층에는 ‘흐르는 풍경’, ‘낯선 풍경’ 등과 ‘한반도 지형’ 시리즈 작업 등 지난 2000년대에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익숙한 대형작품 6점과 관련 화첩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특히 강원도 영월을 중심으로 풀어낸 한반도 지형이 가지는 직선적이고 장중한 느낌 등을 새로운 감흥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최신작 ‘함피’ 풍경에 비해 수직적인 면과 결이 강조된 화면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국토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촘촘하게 반영한, 박병춘의 국토(國土)에 대한 애지적(愛智的) 숨결이 꿈틀거린다.

6.
박병춘은 대학에 입학한 1988년부터 줄곧 아크릴물감을 사용해 왔다. 특히 이번 ‘함피’ 작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작가가 아크릴이라는 안료(pigment)의 성질을 오랜 경험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정도의 지지체와 미디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얄팍한 기술로서의 장르 넘나들기 차원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자신의 회화충동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수년에 걸쳐 스스로 파악한 안료의 성결을 바탕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전시의 최신작은 3층의 유화물감을 사용한 ‘낯선 풍경’(2013)인데, 박병춘은 그것이 물그림이건, 기름그림이건, 먹그림이건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마음대로, 편하게 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디 이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탄탄한 내공과 필력, 재료에 대한 총체적, 경험적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박병춘의 이번 성곡에서의 반회고전은 의정부에로의 작업실 이전을 계기로 작가의 지난 작업을 현재적 시점에서 돌아보는 기회이자 인생 후반생을 앞두고 있는 작가의 미래적 작업지향을 작가와 관객 모두가 각기 가늠해보는 좋은 자리가 될 것이다. 또한 ‘병춘스러움’은 곧 ‘자연스러움’이고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임을 공감할 수 있는, 직접 느낄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박천남(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전시제목박병춘: 길을 묻다 (The Long and Winding Road)

전시기간2013.11.01(금) - 2014.01.05(일)

참여작가 박병춘

초대일시2013-10-31 17pm

관람시간10:00am~18:00pm 매표마감 : 종료시간 30분 전

휴관일월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어른 및 대학생 (20~64세) 5,000원
학생 (초,중,고교생) 4,0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할인
*65세 이상 어르신, 7세 미만 어린이는 무료입장입니다.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단체관람료가 적용됩니다

장소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

연락처02-737-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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