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존재의 상상속을 거닐다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마스킹테이프_162x130cm_2022
Press Release
기획의도
(故)박동준 선생의 유언의 뜻을 이어가고자 만들어진 박동준기념사업회는 매년 갤러리분도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작가들을 초대하는 전시를 기획한다. 2020년 이명미 작가를 시작으로, 임현락, 이진용 전시 이후 그 네 번째 주인공은 현대미술가 서옥순이다.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찰과 함께 인간의 ‘존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작가는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2007년<존재>란 테마를 평면과 설치작업으로 갤러리분도에 선보였다. 백색 세라믹으로 만든 고무신, 목탁 등은 작가의 유년기를 보듬어주던 할머니의 따뜻한 기억과 연결되어 순백의 빈 캔버스 위에 검은 실로 한 뜸 한 뜸 이어가면서 작가 개인의 서사를 풀어나감과 동시에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변증법을 표현하였다. 우리는 실과 바늘이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수공예적인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을 볼 때, 서옥순 작가의 작업세계와 박동준 선생의 패션 디자이너의 삶은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였다.
갤러리스트와 작가의 만남이 깊은 믿음의 연속성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이 이번 싱그러운 5월에도 이어진다. 예술과 예술가를 사랑했던 故 박동준 선생의 뜻을 따라 갤러리분도와 ‘박동준 기념사업회’는 앞으로도 변화를 추구하며 실험을 멈추지 않는 작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와 신진작가를 프로모션하는 전시를 이어나갈 것이다.
전시구성
평면미술에서부터 설치, 입체, 부조 등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는 현대미술가 서옥순 작가는 물감 대신에 실, 붓 대신에 바늘, 캔버스 대신에 천을 갖고 바느질을 통해 삶의 고통을 자기성찰로 이어가는 자화상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서사에서 출발하지만, 여성의 보편적인 문제로, 나아가 인간 내면의 투시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그 내용을 확산해 나간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멈춰버린 세상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된 그녀의 작업세계는 더욱더 개인의 서사에서 우리 모두의 집단적, 공통적인 이야기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Homage to 박동준-서옥순展 <경계에 서 있는 실/선>의 주제로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들은 조금 더 보편적인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점, 선, 면 조형적인 형태와 색의 변화와 함께 구체적이고 희망적인 시선으로 작업을 풀어나가고 있다.
서옥순의 전시는 세 가지 타입의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단색으로 마감된 화면 위로 일정한 굵기의 선들이 얽혀 있는 캔버스 작업은 흘러내리고 뭉치고, 다시 뭉치고 흘러내리는 실타래의 이미지로 눈에 들어오면서 묘한 공간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실/선 들의 자취는 머무르지 않는 삶의 여정 속에 인간의 욕구와 허상, 눈물 등 복잡한 인생에 대하여 아주 단순하고 압축된 조형언어로 보는 이들의 감각을 일깨우게 한다. 이러한 서옥순의 평면작업을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실제로 실타래에서 풀려나온 선들은 자립하지 못하고 중력의 법칙에 의해 아래로 처지거나 드러눕는데 반해 이 그림에서의 선들은 표면에서 굳건하고 강직한 실/선을 응고시켜 놓은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존재의 한 순간이 연상되기도 한다. 가볍고 흔들리는 실들이 그림 안에서는 좁은 띠 혹은 테이프 자체가 되어 견고하게 부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실/선의 존재감이나 실존성도 강하게 어필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실/선은 작가의 실존을 대리하고 자기감정이나 마음의 결. 눈물의 여러 경로를 누수하면서 진행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두 번째의 평면작품은 볼륨감이 있는 캔버스에 색의 깊이와 촉각적 질감의 뜨개질의 매듭이 섬세한 그만의 조형방법이 흥미롭다. 작가는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닥친 수많은 미션들은 나의 실매듭처럼 하나하나 풀어가며 때론 이것과 저것을 이어가며, 고통과 망각 그리고 그것을 초월한 현재를 살아가게 만들어준다.” 라며 우리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오른편 공간에 설치된 높이 3미터, 폭 0.6미터 가량의 망사천 여러장이 일정한 간격으로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흰색 망사천 위로 검은실 드로잉이 겹겹이 쌓여 출렁이는 선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한 사람의 모습(박동준 선생님)을 아련하게 연출하여, 오마쥬 박동준 전시의 의미를 더욱더 깊이 있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 공간을 거닐고, 머무는 시간에 관람자 각자 나누고 싶은 이를 소환하여 함께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명상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