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뉴페인팅은 존재하는가?
현재 현대미술의 겉모습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 2) 장관주의(spectacularism), 3) 모더니즘의 확대 재생산(re-modernism), 4) 이들의 절충주의(eclecticism)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의 영향과 상업주의의 열풍이 이러한 풍조를 조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여 새로운 영역을 열고 역사의 문을 두드린 화가로 우리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를 손꼽는다. 회화와 사진과의 관계, 매체 사진의 전용, 절취(cutting), 색채 추상과 흑백 추상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하여 위대한 회화 형식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리히터의 시도는 매체와 매체 사이의 관계와 차이를 사유한 최초의 시도이다. 또 한 사람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가 있다. 독일의 역사, 문화, 나치 시대와 홀로코스트를 다루거나 성서와 형이상학적 주제로 인간의 본질을 묻기도 한다. 독일 근현대사를 조명하기도 하며 건물 내부 전체를 회화로 변용하기도 한다. 전자는 회화의 형식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돌파하려는 작가이며, 후자는 내용의 심오함으로 회화의 위대성을 재확인하는 작가이다. 박종규 작가는 전자가 지향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박종규는 누구인가?
정서를 표현하는 작가가 있다. 내면을 드러내는 작가도 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다루는 작가가 있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다루는 작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를 다루는 작가도 있다. 박종규 작가는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를 다룬다. 박종규 작가는 매체 발전 역사에 관하여 사유하면서,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컴퓨터, 네트워크, AI라고 진단한다. 박종규 작가는 “인간의 역사는 신화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테크놀로지로, 테크놀로지에서 로봇으로 향하는 역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한다.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극한까지 발전했을 때, 인간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할까? 로봇과 같으리라는 것이 박종규 작가의 생각이다. 박종규 작가는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노이즈에 주목한다. 우리가 보는 컴퓨터 화면은 긍정적 신호, 즉 시그널로 운용된다. 그런데 가끔 부정적 신호인 노이즈가 발생하기도 한다. 화면이 손상되거나 소리가 지연되는 등의 현상이 노이즈이다. 박종규 작가는 컴퓨터의 노이즈를 수집하여 확대한 후 캔버스에 옮긴다. 컴퓨터의 노이즈는 부정적 가치이지만 확대되어 화면에 옮겨졌을 때 너무나도 정연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노이즈는 부정적 가치와 반대로 오히려 아름다운 형식이다.” 박종규 작가는 다시 말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컴퓨터에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사실 속에 담겨있는 행간의 의미이다. 아직 휴머니즘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컴퓨터가 완전무결해질 때 인간은 로봇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박종규 작가가 노이즈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유이다. 박종규 작가는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에 관하여 사유하면서 인류의 미래와 새로운 회화의 돌파구를 찾는 첫 번째 작가이다. 한국 모더니즘 추상회화는 김환기(1913-1974)에서 단색화로 발전하여 후기 단색화로 다양화된다. 김환기, 유영국처럼 자연을 추상화하는 등 외부 세계를 다루다 단색화에 이르러 내면의 수양과 정신 등 우리의 내부 세계를 다룬다. 후기 단색화에서는 회화의 본질 자체를 다룬다. 즉, 평면성의 극한을 추구한다. 박종규는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사유로써 추상회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 갤러리 학고재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
이진명 | 미술비평ㆍ미학ㆍ동양학
1. 역사의 징후를 그리다.
박종규(朴鍾圭, 1966-)의 회화세계는 인류 예술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종국에 예술의 미래가 어디에 있을지 질문하면서 작가의 회화세계는 새로운 변혁을 실천해간다. 따라서 박종규 회화는 간단(間斷) 없이 변화한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낳고 또 낳은 것을 역(易)이라고 하는데 역(易)은 도리[道]와 같은 말이다. 사그라지지 않고 식지도 않는 창신(創新)의 기운을 역(易)이라고 한다. 인간의 길은 자연의 길을 닮게 되어 있다. 자연은 1년 사계절의 각기 다른 기운을 펼쳐서 생명의 사이클을 펼친다. 인간의 운명도 자연의 길을 닮아서 기원(origin, Ursprung)ㆍ진보(progress, Wachstum)ㆍ변화(change, Veränderung)ㆍ쇠락(downfall, Fall)의 수순을 밟는다. 이는 요한 요하임 빙켈만(1717-1768)이나 아비 바르부르크(1866-1929)와 같은 서구 학자들이 서구 문명의 진행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도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논리를 빌린 것에 불과하다.
생주이멸에서의 생(生)은 미몽에서 벗어나는 계몽기, 즉 ‘disenchantment’를 가리킨다. 주(住)는 전성기를 뜻하는 ‘heyday’에 해당한다. 이(異)는 허물을 벗어 탈피하는 태분기(蛻分期)를 뜻하기 때문에 ‘change’라고 표기한다. 멸(滅)은 쇠락(衰落)을 뜻하지만, 절멸(絶滅)을 뜻하지는 않는다. 멸의 끝자락에서 생의 파도가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멸(滅)을 뜻하는 라틴어 ‘extinguere’는 불을 끈다는 뜻을 지니는 동시에 갈증을 풀어준다는 뜻도 지닌다. 자연사(自然史)든 인간사(人間史)든, 아니면 그것이 문학사(文學史)이건 현대미술의 역사이건 시간과 관계된 모든 것은 생주이멸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다.
러시아의 대표적 사상가인 니콜라이 부하린(1888-1938)은 그의 저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예술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은 무용이며 음악과 시가가 그 뒤를 잇는다. (최초에) 이 세 종류의 예술은 서로 융합하여서 한 몸으로 존재했다.”라고 말한다. 가장 오래된 시각예술 또한 무용처럼 몸동작으로 땅에 긋거나, 마치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8장 11절까지 묘사된 ‘간음한 여인(Pericope Adulterae)’을 뒤에 두고 바리새인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가 땅바닥에 묘사한 그림과 비슷한 것임이 틀림없다.
무용과 음악과 시가는 4차원적이다. 3차원 공간에 시간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무용과 음악과 시가는 제식 예술(ritual art)이다. 그러나 무용과 음악은 추상적이며 시간의 예술이기 때문에 영구히 보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무나 돌을 깎아서 조각을 만들었다. 조각과 함께 3차원 예술이 열린다. 그런데 조각은 여전히 제식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조각의 속성은 제식적(ritual)이다. 실제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비교적 객관적인 거리를 갖기 위하여 그림을 그렸다. 들소 무리 안에 발을 들였던 사람이 동굴로 돌아와 들소 그림을 그린 것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사냥 연습하여 나중에 진정한 사냥꾼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냥꾼은 그림을 보고 연습하여 후에 진짜 들소를 얻게 된다. 따라서 2차원 회화(그림)는 실제를 낳는 마술이다. 이때부터 실제와 마술(환영)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게 된다. 2차원 그림(회화)의 속성은 마술적(magic)이다. 사람들을 마술에 빠뜨려 실제와 구분할 수 없게 만든 회화(그림)를 비판하기 위하여 후대 사람들은 문자를 개발했다. 마술의 가상성이 허위라는 점을 알리기 위하여(비판하기 위하여) 문자가 개발된다. 문자가 개발되고 사람들은 시간의 선적 진행(linear procedure)을 깨닫게 된다. 문자 이전의 시간은 사계절과 밤낮으로 이루어진 순환적 세계였다. 문자의 선적 진행은 역사의식을 낳았다. 사계절의 순환이 해의 반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 덕분에 해마다 한 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역사의식은 지식이란 축적되어 진보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했다. 따라서 1차원 문자의 세계는 역사의식(이성)을 특징으로 한다. (historical.) 문자로 촉발된 역사의식(이성)은 급기야 과학과 테크놀로지로 진화되었다. 그런데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컴퓨터로 진화했고, 컴퓨터는 0과 1로 이루어진 0차원의 테크놀로지 이미지를 낳았다. 이미지, 즉 회화(그림)가 갖는 마술적 특성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 즉 이성이 새로운 이미지를 다시 만든 것이다. 이성이 만든 이미지는 우리가 그것의 특징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담한 것이다. (Unheimlich.) 이 시대의 특징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의 본질이 0차원에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손으로 포획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실제의 모든 가치가 0차원 속으로 빨려 들어 포획된다는 점에서 터무니없는 것이다. (ridiculous.)
박종규 작가는 참담하고도 터무니없는 이 시대의 징후를 가리켜 ‘팬텀(phantom)’이라고 정의한다팬텀은 단순히 유령(幽靈, ghost)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추동력(impetus)의 정체를 모른 채, 막연하게 이끌리는 삶, 순응하는 삶을 가리킨다. 자기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삶을 가리킨다. ‘팬텀’의 징후는 곳곳에 산적해 있다. 현대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박종규 작가는 방향성(벡터)을 상실한 현대미술에 더는 미술사가 존재할 수 없다고 느낀다. 1990년도 이후에 미술사 기술이 더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역사 기술은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더욱이 미술사는 미학적 규범(aesthetic norm)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그랜드(마스터) 내러티브는 이미 종언을 고했다. 이제는 시대를 추동하는 내러티브가 현대미술에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를 만드는 주체는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네트워크, 즉 학자, 비평가 등 집단 지성의 연대가 아니라, 상업자본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이차적, 외적요인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생주이멸의 분기에서 현대미술의 현재가 활력 있는 생(生)의 단계에 있지 아니한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작가는 우리가 멸(滅)의 시기에 처해있다고 본다. 그 증거로 최근 30년간의 현대미술은 1)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 2) 스펙터클주의(spectacularism), 3) 모더니즘의 재분배(re-modernism), 4) 센티멘털리즘(sentimentalism)의 범주에 존재했거나 이들의 절충주의(eclecticism)를 모색한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종규 작가의 작품은 무엇인가? 최근 5년 동안 작가는 <항해(~Kreuzen)>, <수직적 시간(Vertical Time)>, <누스피어(Noösphere)>, 연작을 선보였다. 작가가 이러한 개념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앞서 말한 테크놀로지 이미지를 재현한다. 컴퓨터의 컴퓨테이션은 (그것이) 순조롭게 진행할 때 시그널(signal)을 발산(emit)한다. 그것(emitter)은 수신자(addressee)를 필수적으로 추구한다. 시그널(의미)의 발신자(emitter)는 컴퓨터이지만 그것의 진정한 배후는 프로그래머(programmer)이다. 전지전능한 프로그래머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영역, 즉 그레이존(gray zone)에서 이따금 노이즈(noise)가 발생한다. 프로그래머의 관점에서 노이즈는 발생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컴퓨테이션이 완벽할수록 시그널만 존재하며, 컴퓨테이션에 오류가 개입할 때 노이즈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노이즈가 축복인 이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컴퓨테이션이 완벽하다는 것은 시그널이 완전해진다는 뜻이다. 그만큼 인간적 특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컴퓨테이션이 완벽한 시대는 인간이 로봇이 된 시대이다. 우리는 컴퓨테이션과 인공지능의 영역으로 돌입하고 있다. 이때 우리가 컴퓨테이션의 노이즈를 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노이즈야말로 휴머니즘의 잔존을 뜻한다. 이때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남은 것이다.
박종규 작가에게 노이즈라는 개념은 절대적이다. 작가가 시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이자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질서(시그널)를 좋아하고 혼돈(노이즈)을 싫어한다. 그런데 작가는 컴퓨테이션에서 이따금 발생하는 노이즈를 중시하여 수집한다. 작가는 노이즈를 확대하여 2차원 평면의 회화로 재구성한다. 여기서 두 개의 전략이 등장한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4차원에서 0차원으로 이행해온 인류의 역사이다. 2차원(이미지)은 본질상 마술의 영역이었다. 이미지라는 마술을 비판하기 위해 창조된 문자가 만든 테크놀로지의 이미지는 따라서 모순적이며 현재로선 설명 불가능한 영역이다. 작가는 0차원의 이미지를 2차원으로, 다시 3차원으로 되돌린다. 예술이 마술의 기능과 제식의 요소를 망각할 때 인류는 더는 인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마술과 제식의 기능을 망각할 때) 인류는 이미 로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컴퓨테이션의 에러(노이즈)를 소중히 여기는 점도 바로 이와 같다. 컴퓨터가 완전무결하여 실수하지 않을 때 인간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컴퓨테이션의 과정에서 에러(노이즈)가 발생한다는 것은 아직은 인간이 컴퓨테이션을 제어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현재의 현대 문명에서 멸(滅)의 단계에 직면해있는 분위기를 직감한다. 컴퓨테이션과 AI가정밀해질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했다는 뜻이다. 현대미술에서 센세이션과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미술이 출현할수록 현대미술에서 마스터 내러티브는 존재가치를 잃는다는 뜻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역사는 단순한 사실(fact)의 나열과 정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 기술에는 철학적 의미에서의 시스템(Lehrgebäude)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리켜 내러티브라 부른다. 현재는 미술사를 기술할 수 있는 철학적 의미의 시스템이 빠져 있다. (미술사는 멸(滅)의 단계에 처해있다.) 이때 박종규 작가는 이러한 시기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무책임하며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비겁하다고 말한다. 작가는 오히려 두 개의 사이에서 중용(中庸)의 평형상태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작가는 멸(滅)의 상황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현재는 더 나은 역사 방향으로 가기 위한, 예컨대 누스피어(noösphere)로 가기 위한 과도기이며, 과도기에 나타나는 홍역은 으레 치러야 할 관문이라는 것이다.
2. 기원[生]에서 시작하려는 예술
우리가 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쯤 대니얼 디포(1660-1731)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171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영국인 로빈슨 크루소가 미지의 섬에 표류하여 미개인 프라이데이와 맞닥뜨린 시점에서 출발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프라이데이에게 총을 보여준다. 프라이데이는 총이 무엇인지 모른다. 손으로 앵무새를 가리키다 앵무새 아래쪽 바닥을 다시 가리킨다. 그리고 총으로 쏜다. 앵무새가 바닥에 떨어지자 프라이데이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프라이데이는 공포를 느끼다 못해 로빈슨 크루소와 총을 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의 총보다 손동작, 즉 로빈슨 크루소의 기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박종규 작가는, 자기를 포함한 우리는 모두 프라이데이처럼, 모더니즘이라는 관념의 지배를 받은 신민이었다고 말한다. 서구 미술관과 예술 자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서구 역사가 축적해온 기호를 생산하여 유통한 주체들을 향한 경외였다는 것이다. 기호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프라이데이로 흘러가 통용되는 것이다. 프라이데이로부터 발신이 일어나서 로빈슨 크루소에게 흘러가 통용되는 기호는 무의미하다. 로빈슨 크루소의 기호만이 권력의 기호이고 프라이데이가 만든 기호는 고작 일상에서의 소통의 기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우리 음식을 먹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우리가 좋아하는 일은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섬기는 태도와 같다.)
박종규 작가가 컴퓨터의 노이즈를 주목한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컴퓨터의 노이즈는 발신도 아니고 수신도 아니다. 더욱이 미학적 규범도 아니다. 앞서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특히 미술사를 규정하는 것은 미학적 규범이라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발생시킨 노이즈를 확대해 보면 더할 나위 없는 가지런함과 질서가 나타난다. 리듬과 운율이 드러나며 위상, 계급, 층차와 같은 위계(hierarchy)가 전복된다. (컴퓨터 화면에서) 현상적으로 드러난 노이즈는 부정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확대되었을 때, 그것은 리듬, 운율, 가지런함, 질서 등 미학적 규범이 제시하는 용어를 충족시킨다. 더군다나 0차원의 테크놀로지 이미지로써 2차원의 모더니즘 회화 양식을 침범한다. 이는 작가가 더 이상 모더니즘이 강요해왔던 기호로부터 지배받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회화가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위선을 목격하고 멕시코로 망명한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1879-1940)를 기억한다. 10월 혁명은 소비에트 예술에 지대한 추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관료들은 예술적 창조를 방해했다. 트로츠키는 시기마다 예술과 문화, 정치는 인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모든 위대한 예술운동은 이전 시대 운동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파편(splinters)이었다고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카톨릭의 파편이며 마르크시즘은 헤겔 좌파의 파편이라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예술 또한 모든 권위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보았다.
예술은, 과학이 그런 것처럼, 질서를 추구하지 않거니와, 예술의 본질상 그러한 질서를 용인할 수도 없다. 예술적 창작은 자신만의 법칙이 있다. 심지어 예술이 사회 운동에 가담하여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지적인 창작은 거짓과 위선과 순응하는 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예술이 자신을 충직하게 신뢰할 때, 비로소 강력한 혁명의 연대를 꾀할 수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말하는 자신의 원칙이나 자신만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과 위선과 순응과 양립할 수 없는 정신으로서 자신을 충직하게 신뢰하여 자기를 감쌌던 이전 시대의 시스템, 즉 이전 시대가 제공했던 기호와 관념을 부수고 나와 새로운 파편으로 이탈하여 홀로 서겠다는 의지를 가리킨다. 즉, 멸(滅)에서 생(生)으로 가려는 의지와 기세를 뜻한다.
박종규 작가는 2023년 전시회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에서 새로운 실험을 한다. 작가는 모래폭풍과 같은 자연 현상을 0과 1로 구성된 이진법으로 코딩하여 다시 디지털 이미지(테크놀로지 이미지)로 치환한다. 이 디지털 이미지의 부분 프레임을 회화 작업으로 옮기는데, 회화의 이미지는 모래 폭풍이라기보다 벚꽃이 만개한 봄 풍경처럼 보인다. 디지털 가상과 회화의 마술 사이를 오가면서, 작가는 오온(五蘊)에 포착되는 현상(appearance)이란 진리가 아니라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의식의 흐름이자 감각의 축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박종규 작가는 우리 시대의 특성은 디지털 가상에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의 실체는 디지털 가상으로 빨려들고 있다. 디지털 가상, 즉 테크놀로지 이미지는 전통적인 이미지가 지닌 마술적 힘을 초월한다. 그것은 진리와 가치마저 빨아들이는 가공할 위력을 우리에게 현시하고 있다. 디지털 가상의 위력은 로빈슨 크루소의 손짓(기호)을 빨아들이며, 모더니즘의 관념, 즉 중심주의(centralism)라는 위계마저 빨아들인다. 우리는, 그것이 갖는 위력의 실체를, 분석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다. 다만, 막연히 불안하게 느낄 뿐이다. 그 불안 속에 묘한 희망도 교차한다.
따라서 박종규 작가의 작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진단할 수 있다. 1) 문화의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이 제시하는 순수주의를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 현대미술의 서구 기원과 서구 주도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화의 미래 지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회화의 미래는 디지털 가상의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데서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3) 환영받는 가치와 불편한 가치 사이에서 발생하는 위상(位相)에 대한 철학적 전복을 시도해야 한다. 작가는 환영받는 가치들, 가령 풍부한 물질, 명예, 아름다움[美], 빛의 영역을 시그널로 상징한다. 불편한 가치들, 가령 경제적 난항, 불명예, 추함[醜], 어둠의 영역에 노이즈를 대입한다. 실제로 우리가 직면한 박종규의 노이즈는 여타 시그널보다 아름답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노이즈의 가치를 재고(再考)하게 한다. 4) 작가는 마스터 내러티브가 상실된 이후 예술계를 이끄는 힘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다. 마스터 내러티브를 이끈 대표적 의제는 순수성(purity)과 평면성(flatness)이다. 작가는 0과 1로 구성된 세계보다 더 순수한 세계가 있을 수 있냐고 질문한다. 5) 끝으로 박종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으로) 과학 없는 예술은 무지한 것이며 (앞으로) 예술 없는 과학은 맹목적인 것이다. 과학은 길을 내는 것이며 예술은 그 위를 달리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박종규 작가는 확실히 프로그래머(과학자)가 만든 디지털 가상의 세계와 예술가의 영역인 마법의 세계(이미지)가 서로 화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박종규 작가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마크 로스코(1903-1970)가 1947년에 남긴 말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예술가의 활동에 사회가 대하는 불친절함은 예술가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적대감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 지렛대로 작용하게 된다.
작가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부당한 데서 온당한 데로 옮겨가기 위해서 작가의 저항 의지가 더욱 거세야 함은 물론이다. 지렛대의 힘은 저항이 거셀수록 힘을 발한다. 이번 전시회에 작가의 인류사에 관한 통찰부터 미래를 대하는 태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기존 예술이 제시해왔던 문법과 어휘를 맞서고 있다. 작가가 자신의 예술 속에서 ‘팬텀’을 발견한다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다름 속에서 창발한 새로운 가치
안현정 | 미술평론가, 예술철학 박사
‘옛것을 배워 새것을 창조한다(學古創新)’는 이념에서 따온 학고재, 시대정신의 올곧음을 옛것과 새것의 교감 속에서 찾고자 연 《의금상경(衣錦尙絅)》 전시 이후 박종규를 첫 작가로 선택했다. 새로운 재료, 새로운 에너지 속에서 과거 1세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개성화된 행보를 보이는 작가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새로움’이라는 한국 단색화의 테제는 ‘단색화 이론의 부재’라는 논의 속에서 새롭게 자신을 톺아 나가야 한다. 박종규 작가는 의금상경에 담긴 내면의 깊이를 다이내믹한 K-Art의 방향 속에서 읽어내는 미래형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다이내믹한 조류들을 모두 소화해내는 탁월함 앞에, ‘다름의 깊이’를 드러낸 독특한 미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평론가 황인은 「Layers of two dimension & three dimension」에서 2차원 평면과 3차원 입체라는 상이한 공간의 층위를 기반한 경계 공간의 조형적 실험을 박종규 작가의 대표성이라고 언변했다. 이는 이분법을 벗어난 다층구조의 서사를 논한 이진명의 평론에서도 발견되는 논제이다. ‘다름’과 ‘상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의 이슈들을 ‘신화를 대체한 과학’ 속에서 실험하는 방식이다. 영향을 준 클로드 비알라(1936- )와 브라코 디미트리에빗(1948- )이 강조한 캔버스의 혁신, 작품의 여러 시리즈를 연동해 하나의 세계관으로 중성화시키는 ‘무화(無化)=무한한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품들의 행간에는 아카데미즘에의 도전과 창발을 향한 한국인 특유의 미감이 자리하고 있다.
대상의 행간에서 발견한 흔적들, 사이의 내러티브
박종규의 회화는 크게 <항해(~Kreuzen)>, <수직적 시간(Vertical Time)>, <누스피어(Noösphere)> 연작으로 나눌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pixel)에서 추출한 점과 선의 이미지를 통해 ‘노이즈(noise)’를 표현한 <항해> 연작에서 ‘~Kreuzen’은 작가가 차용한 ‘순항(巡航)하다’라는 뜻으로, 디지털화돼 가는 현시대의 거대 서사를 점과 선으로 해체해 데이터의 홍수(빅브라더 혹은 빅데이터)로 종합하는 현대화된 디지털 산수를 표현한다. 백남준과 조지 오웰의 논쟁(『1984』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종합한 듯한 서술들이 ‘하나의 유기체적 산수’가 되어 긍정도 부정도 아닌 해석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미학 박사 빅브라더의 눈이 24시간 바라보는 사회, 소리는 줄일 수 있지만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의 눈이 감시와 통제로 지배하는 세상, 박종규의 <항해>에는 사회와 개인의 종말을 언급한 조지 오웰의 서술이 닿는가 하면, 빅브라더의 이념을 예술 유토피아로 조롱하듯 갖고 논 백남준의 유희가 엿보인다. 슬라보예 지젝(1949- )의 언급처럼, 우리 세상에 자리한 자본주의의 거대 논리를 ‘예술 세계 속에서 다시금 해체-재조합’하는 방식을 통해 데이터베이스의 자족적 생명력을 보편적 인류애로 치환하는 것이다. 실제 작가는 매체 활용에 매우 유연하다. 디테일하고 심도 깊은 회화 언어 속에서 영상과 설치 등의 다변구조들이 내비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가 언명한 상호 관련 없는 현상 사이의 의식 작용들은 다름 사이에서 한국 특유의 미감을 찾아온 ‘한국인의 무의식’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수직적 시간> 연작에서도 다름 사이의 미감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이른바 노이즈(noise) 미학,하모니와 상대성을 이루는 이 개념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밑바닥에 있는 틈(lack), 결핍을 대상화한다. 질 들뢰즈(1925-1995)가 『차이와 반복』에서 언급한 부정 없는 차이의 개념과도 상통한다. 차이는 무엇이고 반복은 무엇인가. 차이와 반복은 상호 필수적인가. 차이가 반복을 만들고, 반복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막연히 지나간 이러한 언어들이 수직의 반복 시그널 속에서 ‘노이즈’를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박종규가 사용하는 시각언어는 이렇듯 다름 사이를 끄집어 들어가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같은 연작 속에서도 무수히 반복되는 다름과 차이, 인생에 있어 흥미로운 발견은 극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노이즈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결핍을 노이즈로 치환한다. 결핍은 반드시 해소돼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모호하고 추상적인 관념을 시·청각적 감각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컴퓨터의 화면에 발생하는 노이즈는 플라톤이 ‘동굴에의 비유’에서 상정한 현상의 불완전함과도 상통한다.
인간은 시그널과 노이즈를 구분함으로써 세상을 예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오히려 감각의 강요와 불안을 조장한다. 작가는 이 틈을 줄이고자 시그널과 노이즈의 상쇄를 통해 균형 있는 형식미를 추구한다. <누스피어> 연작은 과학과 감성의 궁극적 세계관을 통해 새로운 영역(noösphere)으로 나아가는 시도이다. ‘누스피어’는 프랑스 신학자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이 처음 사용한 말로, 인간의 정신과 과학적 지식이 결합했을 때 인간이 사는 지층은 더 나은 곳을 향해 새로운 경지로 도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작가는 현대미술의 영역이 현실을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단계를 거쳐 기술 진보 시대의 컴퓨터와 첨단 기술, 신학 등의 궁극적 이성과 만나 ‘새로운 영역=누스피어’를 만든다고 본다. ‘외면과 내면,’ ‘물질과 정신,’ ‘개인과 보편성,’ ‘여성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 등의 극단적 대립 사이의 균형을 통해 조화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미시세계의 통찰(혼돈을 해체해 거시적 균형을 맞춰가는 일)은 시그널과 노이즈의 구분을 해소해 사각 프레임을 탈피한 왜곡·변형된 프레임(카메라의 눈으로 본 각도)을 창출했다. 누스피어는 미래를 향한 긍정의 세계관이자 박종규 작가가 확장해가는 ‘통로(通路, Lane Passage)’ 역할을 한다.
시그널과 노이즈의 균형, 한국미의 새로운 시각
다름 속에서 창출된 한국미를 드러내는 말로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찬사가 떠오른다. 정교함의극치를 담은 상감청자·은입사·나전칠기 등은 고려시대의 최첨단 기술이 조화된 한국만의 문화재이다. 실제로 삼성미술관 리움의 고미술 전시 중 최고라고 극찬 받는 《세밀가귀-한국미술의 품격》(2015) 전시는 정교한 고려문화를 향한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의 극찬에서 나다. 흔히 한국의 전통예술을 ‘여백’과 백색 미감에서 온 소박한 아름다움에서 찾지만, 다름의 가치에서 창발한 세밀가귀 속 새로움은 21세기 미감과 더욱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미의 독창성’은 백색과 비색을 잇는 상감청자(象嵌靑磁)와 나전을 끊어 시문하는 세밀한 나전칠기(螺鈿漆器)에 전 세계가 극찬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박종규 작가는 ‘文-문양, 形-형태, 描-묘사’라는 과거의 해석을 넘어 ‘세밀가귀’에 내재한 ‘다름 속에서 새로운 미감을 구현한다’는 개념적 정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면서도 선택과 종합의 측면에서 ‘시그널’과 ‘노이즈’라는 다름의 미학을 추구한 것이다. 여기서 노이즈란 청각적으로는 잡음이고, 전자통신에서는 오류로 발생하는 불필요한 신호다. 디지털로는 화면이나 시스템에 나타나는 ‘불순물’을 말한다. 청자와 칠기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사고의 전환이 없다면, 백자와 나전은 노이즈인 셈이다. 작가는 일반적 제거 대상인 노이즈를 통해 새로움의 질서를 구현함으로써 당연히 그러한 가치를 ‘새로운 창발’로 유도한다. 픽셀이 확장된 선, 무한한 점이 연결된 변용된 화면, 점과 선으로 구성된 디지털 신호들은 회화로, 영상으로, 설치로 탄생해 세상에 다시없는 하나의 추상 미감으로 재탄생한다. 본래 노이즈였던 것이 시그널이 되고, 시그널이었던 것이 노이즈가 되는 것이다.
전통을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뉴트로의 해석 방식은 학고재 전관에서 새롭게 전시된다. 새로운 영상 작업은 한국 판소리의 파장을 영상으로 만들고 파장의 한 부분을 캡처해서 평면 회화로 전환해 선보인다. 한국 판소리가 보여주는 세련된 독특함에 대한 시도는 서양 중심의 현대미술이 아니라, 한국 중심의 현대미술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오류로부터 발견된 예술 속에서 배제보다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작가는 ‘소리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통해 통감각적 예술로의 전환을 꾀한다. 인당뮤지엄(2017)에서도 아이폰으로 풍경을 촬영해 색에 따라 암호가 반응하는 작품들이 전시된 바 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 일상의 웅성거림, 열차 소리 등의 다양한 ‘노이즈’가 잡음이 아닌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다양한 스타일 가운데서도 연결된 큰 틀은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갖는다. 어느 분야와의 협업에도 작가가 당황하지 않고 도전하는 이유다. 작가에게 예술은 코드를 변주한 일상이다. 새로운 재료와 기술의 진보를 ‘한국 미감의 특질 속에서 조화’시키는 박종규 작가, 지금까지의 무대는 단순한 시작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단색화가 한 가지 색 또는 비슷한 톤의 색만을 사용한 한국식 모노크롬이라는 의의는 바뀐 지 오래다. 한국적 미니멀리즘 계통의 추상회화 작품들은 전체 속 개별 양식에 의해 다양한 레이어를 가졌을 뿐 아니라,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견인하며 다이나믹한 오늘의 시대를 ‘하나의 흔적(the aesthetics of trace)’으로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전시제목박종규: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
전시기간2023.03.15(수) - 2023.04.29(토)
참여작가
박종규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장르회화, 영상, 설치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소격동, 학고재) 학고재 본관 및 학고재 오룸)
연락처02-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