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기획의도
고암 이응노(1904-1989)는 근현대한국미술사에서 세계적인 위상을 지닌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지속해야할 과제가 많다. 미술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1959년 유럽으로 이주한 이후의 활동에 주목하였고 이에 따라 콜라주, 문자추상 그리고 군상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 축적되어 왔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시기적(1958년 이후), 지역적(유럽)으로 제한된 연구 경향으로는 이응노 작품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응노 작품의 현대성, 세계미술과의 동시대성은 자신이 뿌리내린 동아시아 예술의 전통, 관습을 원천으로 삼아 성취되었기 때문에 전통미술을 수련하고 탐색하던 유럽 이주 이전 시기에 대한 연구는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성격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 이응노연구소는 이 가운데 ‘대전’을 키워드로 이응노의 삶과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연구를 2022년 4월부터 12월 초까지 약 8개월 동안 진행했다. 대전은 청년 이응노가 스승 김규진의 문하를 떠나 전주로 가기 이전 머물던 고장이자 1940~1950년대 수차례 개인전을 개최했던 곳이기도 하다. 동시에 1960년대 동백림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상처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서거 후 이응노미술관이 건립된 도시이다. ‘아카이브로 보는 이응노와 대전’이라는 전시 제목은 이렇듯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있던 대전과의 연관성을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이번에 전시된 아카이브들은 서울, 도쿄, 파리 그리고 유럽의 다양한 도시들을 무대로 활동한 세계적 작가 이응노가 그 이전 ‘충남 향토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불렸던 사실도 보여준다.
이미 많은 기록과 작품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원로들의 구술과 일기, 신문・잡지 기사 등 다양한 아카이브들은 이응노를 다시 살펴보는 과정에서 중요한 길라잡이가 된다. ‘아카이브’와 ‘대전’을 키워드로 한 이번 전시가 이응노에 대한 연구의 공간적, 시간적 확대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전시장 구성
1부 : 모색기와 새로운 현실 탐구 시기 (1920년대~1958년 유럽 이주 이전)
1부 전시는 이응노가 스승 김규진으로부터 독립하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하던 시기부터 1958년 12월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1부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전국을 유랑하며 장식미술업을 하던 이응노가 박귀희와 결혼한 후 대전에서 머물던 시기를 중심으로 하는 1920년대-1940년대 전반 시기, 그리고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이전인 1945년-1950년, 세 번째로 한국전쟁 이후 유럽으로 가기 이전 시기인 1950-1958년 시기이다.
① 1920년대 후반-1930년대
1920년대 중반 이후 전국을 유랑하며 장식미술업을 하던 이응노가 박귀희와 결혼한 후 대전에서 머물던 시기를 중심으로 하는 1920년대-1940년대 전반 시기.
1920년대 중반 이응노는 스승 김규진을 떠나 경성의 표구점, 간판점 등에서 일을 하였다. 오늘날의 실내 인테리어, 광고 디자인, 장식 미술과 같은 분야에서 일했던 이러한 경험을 살려 수원, 온양, 철원, 함경도 영흥, 원산으로 돌아다니며 사업을 벌였다. 전국을 떠돌던 이응노는 1927년 박귀희와 결혼하면서 대전에 정착하였다. 대전은 1900년대 초 경부철도가 부설되면서 새롭게 발돋움하던 신흥도시였다. 이응노가 살던 1920년대 중반에는 원동, 중동, 정동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이응노가 신혼집을 마련한 곳도 이 부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이응노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간판집을 마련하고 운영했다. 이 간판집은 그가 전주에서 운영한 ‘개척사’의 앞선 예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그는 대전역의 내부 장식을 도맡기도 했는데 1920년대 후반 대전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박승무, 〈첩첩운산〉, 1934, 종이에 수묵, 42×26.7cm, 홍성 이응노의집박승무가 그려 이응노에게 선물한 작품
이응노는 당대 유명 동양화가들과도 친분을 쌓았는데 현재 대전을 대표하는 한국화가 박승무와도 돈독한 사이였다. 이응노가 대전에서 전주로 옮겨간 후 둘 사이에 오고 간 엽서와 작품이 남아있어 두 작가의 오랜 친분을 보여준다.
② 해방 이후 - 한국전쟁 이전(1945-1950년)
해방을 맞이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주변 현실을 담기 위해 모색하던 시기
해방을 맞이한 이응노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새로운 민족미술의 방향 수립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이응노는 동양화가들의 단체인 단구미술원 결성에 참여하는 등 “양심적으로 미술 운동의 공복이 되고자” 노력하였다(1948년 이응노 자필 원고에서 발췌). 같은 해 심향 박승무와 함께 《두방전(斗方展)》에도 참석하였다(‘두방’은 작은 정사각형의 소품을 가리킨다). 《두방전》은 전쟁 재난 동포들에게 위문금을 전달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회였다.
1948년 10월 이응노는 ‘대전 원동 조흥은행 앞 중앙토건’ 빌딩 1층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충남 출신 최초의 전람회”라고 기록된 이 전람회에 대해 이응노는 “최후의 열성을 다하여 순진한 싹을 북돋우고 … 사랑받는 민족미술을 창조하는 실천과정으로 향토 수도인 대전에서” 개최하였다며 자부심을 내비쳤다. 이 개인전에 대해 『충남일보』는 「현란한 미술제전」, 「연일 대혼잡의 성황」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며 크게 다루었다.
③ 1950 - 1958년
이응노는 1955년 1월 대전 중구에 있던 대전문화원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을 시작으로 예산, 홍성 등으로 쉼 없이 이어지던 지방전이 일단락되는 전시회였다.
한국전쟁을 겪은 후 이응노의 작품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전쟁이 남긴 상처나 삶의 애환이 깃든 술집 풍경을 꾸밈없이 그리는가 하면 노동하는 사람들, 소소한 거리의 일상을 소재로 삼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또 기법적으로도 두툼한 선으로 대상을 단숨에 그리면서도 대상의 형체, 분위기, 개성을 완벽하게 전달하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대전문화원의 개인전은 이와 같은 이응노의 변모가 잘 드러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 맞춰 이응노가 직접 『대전일보』에 발표한 「회화예술과 시대성」은 이 무렵 그의 예술관을 설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전문화원에서 열린 이응노의 개인전은 대전 미술계에도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대전일보』, 『중도일보』에 전시 기사와 평이 실렸고 대전사범학교 미술교사로 대전미술계의 아버지로 불리던 이동훈은 전시 기간 내내 전람회장을 방문하여 이를 일기에 남겼다. 이응노는 다음 해 이동훈이 대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자 기쁜 소식을 상징하는 까치를 그려 보내며 축하하기도 했다. 최영근이 밝혔듯이 대전화단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성섭 역시 이응노와 각별한 사이였다. 이응노가 박성섭에게 선물한 문자추상 작품은 두 작가의 우정이 이응노가 유럽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에도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예이다.
활발한 작품활동에 힘입어 대전에서 이응노의 지명도는 점차 높아갔다. 젋은 서양화가 정영복은 이응노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서울에서 열린 《이응노 도불기념전》을 직접 관람하기도 했다. 이응노는 대전에서 작가지망생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존재였다.
2부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대전교도소 수감 시기 (1968년)
이응노는 1959년 독일을 거쳐 1960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파리의 폴 파케티 화랑의 전속작가가 되고 성공적으로 개인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곳과 전속계약을 맺으면서 이응노는 유럽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인착할 수 있었다.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에너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이응노는 1967년 뜻밖의 사건으로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짊어지게 되었다. 곧 한국정부가 발표한 동백림(‘동베를린’의 한문표현)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어 수감된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된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동베를린을 방문했던 사실이 이 간첩사건에 그를 옭아매는 빌미가 되었다.
1967년 6월 수감된 이응노는 1968년 7월 3년형이 확정됨에 따라 1968년 8월 대전교도소 이감되었다. 무기징역에서 3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이곳에서 많은 수의 옥중화를 제작하였다. 교도관들은 이응노가 감옥에서도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또 대전의 바이올리스트였던 조카 서창선을 통해 종이와 붓 등을 공급받았다. 이응노가 화구를 구입했던 여러 장의 영수증은 그의 활발했던 옥중작품활동을 증언한다.
3부 동백림 사건 이후 (1969년~ 현재)
1969년 3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응노는 5월 파리로 돌아갔다. 고국에서 추방되었음에도 이응노는 꾸준히 한국미술계에서 중요한 화가로 언급되었다. 1970년대에 이응노는 서울에서 3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특히 1973년에는 자신이 수감되었던 대전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대전 중구 선화동의 산강화랑이 개관기념전으로 연 이 전시회에는 조카 서창선이 소장했던 옥중화를 포함한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최초로 열린 이응노 전시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1977년 또 다른 정치적 사건(백건우・윤정희 납치미수사건)에 휘말린 후 이응노는 한국에서 완전히 금기시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출판된 현대회화 화집에서 이응노의 이름과 작품은 지워졌고 한국의 화랑에서 그의 그림은 전시될 수도, 매매될 수도 없게 되었다.
1988년 해금되고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개최된 이후 이응노은 다시 공식적으로 한국미술계에 등장했다. 개성 넘치는 그의 작품은 다시 활발하게 거래되기 시작했다. 현재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화랑으로 기록된 오원화랑은 대흥동 시절인 1998년 《고암 이응노전》을 개최하였다.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전시로 김진원 대표가 3년에 걸쳐 준비한 전시였다. 이후 2007년에는 이응노 유족 박인경의 기증작품을 토대로 대전 서구 만년동에 이응노미술관이 건립되었고 대전과 이응노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시제목아카이브로 보는 이응노와 대전
전시기간2022.11.22(화) - 2022.12.04(일)
참여작가
이응노, 박승무, 아카이브로 보는 이응노와 대전
관람시간10:00am - 06:00pm (매월 마지막 수요일 20:00까지)
입장시간 : 관람시간 종료 30분전까지
휴관일휴관일 1월1일, 설날, 추석, 매주 월요일(다만,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휴관)
장르아카이브 60여 점과 작품 20여 점
관람료무료
장소이응노미술관 UngnoLee Museum (대전 서구 둔산대로 135 (만년동, 대전예술의전당) 이응노미술관 신수장고 M2)
연락처042-611-9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