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원미술관은 2022년 10월 6일(목)부터 12월 16일(금)까지 진민욱 초대전 《어제 걸은 길 The road that I walked yesterday》를 개최한다. 본 전시는 한국미술계의 주요한 허리 격인 기성 작가들의 재발견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수년간 창작활동에 매진해온 이들은 작업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저마다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며, 작가로서의 긴 호흡을 위해 예술적 역량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이에, (재)한원미술관은 다양한 장르 속에서 매체에 대한 고민과 다변적 실험을 거듭하는 작가들의 행보를 주시하여, 신작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작업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전시를 통해 한국미술계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함은 물론, 예비 중견작가에게 전시를 기획‧지원함으로써 활발한 활동의 전환점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밑거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전시 목적은 (재)한원미술관의 설립 취지와도 맞닿아 있기도 하다.
본 전시는 현대미술의 범주 안에서 동양화의 현대성을 추구하며 전통채색화의 명맥을 계승해 나가는 작가 진민욱을 선정하였다. 진민욱은 지난 2019년 (재)한원미술관에서 개최한 제10회 화가(畵歌) 《화첩: 심상공간心象空間》에 참여하여, 전통회화의 이동 시점에 따른 대상과 배경의 경계가 도식적으로 구분된 화면을 선보인 바 있다. 진민욱의 투명하고 담백한 색채와 풍부한 조형미에서 발현되는 노련함은 작업의 무게감을 실어주며, 이는 성실함과 집요함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숙련된 표현기법으로 다져진 결과이기도 하다. 진민욱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은 그의 손길과 사유, 일상의 정취가 담겨있는 농밀하고 섬세한 관찰과 묘사, 그리고 투영의 대상이기도 하다. 전시 제목이 시사하듯,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체류했던 도시나 그의 소소한 일상과 생활반경에 인접한 주변 풍경에서 받은 인상들을 바탕으로 그날 느꼈던 감정의 소회들을 회화작업으로 풀어낸다. 작가는 꽃, 곤충, 동물, 바위와 같은 평범한 소재에서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작은 존재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어 이를 심상의 ‘재현’으로 담아내기 위한 회화적 실험을 거듭한다.
우리는 우연히 스치듯 지나간 풍경에서 새롭고 낯선 시선을 느낀다. 진민욱은 평온한 일상을 산책하며, 작가 자신과 세상과의 연결점을 찾고자 자연과의 교감을 시도한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행자의 특징을 지닌다. 인간은 그 자체로 여행자이며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나그네다.[1] 즉 삶은 곧 여행인 것이다. 진민욱의 '걷기(stroll)'의 계기는 사적인 경험에서 기인한다. 걷기는 느리고 단순한 행동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사유가 생겨나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걷기는 ‘정신(spirit)’과 ‘신체(body)’라는 두 요소의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행위이다. 진민욱이 길 위의 풍경을 사진이나 스케치로 기록하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물들을 채취하는 것은, 어쩌면 걷기가 우리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있는 장소에 대한 정체성이나 개인적 감성을 들춰내는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걷기는 자유롭게 유동하는 정신적 활동에 유익한 행위로써, 걸으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것들은 우연과 필연이 교묘하게 결합된 순간일 것이다. 게다가 걷기는 시간과 서사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여정이기에 이동에 따른 장소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인지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민욱은 대상을 직관적인 시각과 관조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마음속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들을 사유하는 산책자(Flâneur)가 된다.[2]
근래에는 주로 그가 머물렀던 장소 특히, 일상의 주변 사물들로부터 느낀 깊은 감명을 모티브로 삼아 풍경화 연작을 그려왔다. 작가는 고전문헌에서 자연의 경탄을 묘사하는 문학적 표현인 ‘상춘(常春)’의 의미를 빌려 내러티브(narrative)를 만든다.[3] 또한, 전통회화에서 흔히 접하는 ‘이상향(理想鄕)’, ‘도원경(桃源境)’과 같은 동양적 세계관을 정지된 화면 속에 투영함으로써 도시 산책을 통해 거닐었던 장소들-주관적인 장소들은 작가의 상상이 더해져 현실 속의 낙원으로 변모한다.
우리는 풍경 속에서의 찰나의 발견과 깨달음 그리고 묘한 감정들이 맞닥뜨렸을 때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다. 진민욱은 풍경을 마주한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 감각들을 시차를 두고 다시 화폭에 옮겨지는 순간에 집중한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사진, 현장 드로잉, 관찰지역의 자료를 리서치한 결과물과 대상과의 교감에서 오는 순간적 감정을 응시하고 수집하며, 정리된 기억을 바탕으로 화면의 밑그림을 구성해 나간다. 화면 전면에 자유롭게 배치된 이미지들은 작가의 기억 속에 체화된 장면들과 연결되어 장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작품 제목 또한 그림 속 풍경을 단순한 서사적 기록이 아닌 삶 속에서 경험하고 기억으로 되살리는 시간의 풍경으로 읽히게 된다. 그런데도 그가 선택한 보편적이고 익숙한 소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기억 속 풍경들을 쉽게 환기한다. 작가는 비단의 앞면과 뒷면을 오가며 석채의 고운 안료를 반복적으로 덧칠하는데, 이때 비단 사이로부터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색감은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걷기는 ‘움직임(stroll)’과 ‘멈춤(pause)’이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다양한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들이 형성되고 펼쳐진다. 작가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성찰의 순간을 기념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작업 〈 Stroll&See 〉(2021)와 〈 작은 은거 〉(2021)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진민욱은 주변의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정서적 연결고리를 찾아낸다. 〈 Stroll & See 〉 연작은 ‘작은 자연풍경’과의 교감을 통해 삶 속에서 서서히 발견되는 작은 가치들에 주목했던 이전의 〈소소경(逍小景)〉 연작보다 형식적 측면이 한층 더 성숙하고 발전된 사유방식이다. 〈 Stroll & See 〉는 장소와 장소 사이를 이동함으로써 이 과정에서 감각과 사유를 경험하게 된다. 기억, 감각, 신체적 움직임의 요소들이 어우러진 다양한 형상들은 마치 콜라주(collage) 기법처럼 부분적으로 강조하거나 생략하여 작가의 주관적인 방식에 따라 재구성된다. 이를테면 실제와 환영 사이를 오가는 상상의 공간-휴식의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또한, 2021년부터 새롭게 선보인 〈작은 은거〉 연작은 그가 채집한 사적인 풍경과 고전문학의 시적 표현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에 착안하여, 도심에서 바라본 산의 경치나 작가가 수집한 자연물 형태의 윤곽선을 염두에 두고 전통회화의 형식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변형 캔버스 작업이다.[4] 이번 신작은 병풍의 구조적 형태를 재해석한 수직적 형상을 갖춘 설치물을 제작한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에게 움직임을 유도함으로써 다층의 레이어를 통한 시각-촉각-사유의 궤적을 함께 공유하고 감상해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시그널이다.
어떤 장소의 의미가 어떤 사람에게만 결부되지 않는다. 함께 걷는 행위는 특정 장소가 지닌 의미를 공유하는 방법이자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상징일 수도 있다. 이처럼, 진민욱은 동시대의 풍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의 일상과 그 주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산책자’의 자세를 견지한다. 그러나 표상적 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닌, 색채를 통해 작가의 심상과 내밀한 심리를 풍경에 반영시킨다. 관객과 유기적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진민욱은 우리가 사는 현재의 도시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걷는지, 잠시 느린 발걸음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보기를 권유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시적 풍경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 안에서 작품과 작품 사이를 거닐며 각자의 리듬으로 감상해보기를 제안한다. 어제 걸은 길을 찬찬히 되짚으며 그날의 강렬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해보자.
(재)한원미술관 선임큐레이터
전승용
[1] 홍승식, 『가브리엘 마르셀의 희망의 철학』, 가톨릭출판사, 2002, p.11
[2] 플라뇌르(Flâneur)는 ‘한가롭게 배회하는 산책자’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로,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일어나는 근대화 현상을 지켜보는 자들로 명명하며, 1863년 『르 피가로』에 기고한 「근대적 삶의 화가」라는 글에서 '도시를 경험하기 위해 도시를 걷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후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도시의 관찰자’ 이자 ‘탐색자’로 해석하면서 현대 도시의 소비주의와 소외를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로서 주요한 사회과학 개념으로 발전했다. 즉, 이들은 여유롭고 느린 산책을 즐기며 곳곳에 산재한 찰나에 반응한다.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을, 흔한 것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발견하길 기대하며 일상과는 또 다른, 새로운 삶의 경험을 추구한다.
[3] 진민욱의 상춘(常春)은 사계절의 ‘봄(spring)’이 아닌, 심리적, 감정적 표현에 더 가깝다.
[4] 작품 제목인 〈작은 은거〉는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 ‘중은(中隱)’에서 관직에서 벗어나 강호, 산림과 같은 자연으로 들어가 세속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는 ‘은거(隱居)’의 삶을 읊는 구절에서 차용하였다. 전시제목진민욱: 어제 걸은 길 The road that I walked yesterday
전시기간2022.10.06(목) - 2022.12.16(금)
참여작가
진민욱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일·월요일 및 법정 공휴일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한원미술관 Hanwon Museum of Art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23 (서초동, 한원빌딩) )
연락처02-588-5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