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토피아의 지평에서 숲을 보다
김유림의 푸른 풍경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우리는 저마다 유토피아의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본질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이상향인 유토피아는 우리의 일상 밖에 존재하는 세계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유토피아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다. 1960년대 중반에 창안되어 공간 인식에 새로운 지평을 연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사람인 미셸 푸코에 의해 창안된 헤테로토피아는 한마디로 ‘현실화된 유토피아’다.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자, 유토피아가 현실 안에 존재하면서 이상적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가 헤테로토피아의 세계다. 다른(heteros)와 장소(topos)를 합쳐 만든 신조어 헤테로토피아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그림속의 세계로 해석할 가능성이 주어진다.
김유림의 숲은 우리에게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으로 다가온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이상적 세계인 유토피아와 현실로 존재하는 실재의 장소가 마주치는 풍경을 그린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실에 속한 꿈의 공간이라 할까. 좌절과 우울이 지배하는 ‘피로사회’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내는 냉혹한 현실은 떠나고 싶지만 그리할 수 없는 세계다. 여고 시절처럼 지나고 나면 아름답게 기억될 시간이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도피하고 싶은 세계라 할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이 마주치는 헤테로토피아의 세계는 화가들에게 주어지는 치열하고도 숙명적 장소로 다가온다.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세계에 <사려니 숲>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그리고 그 숲의 이미지를 온통 푸른색으로 표상해 놓았다. 몇몇에는 삶의 연속적 흐름을 나타내는 <블루의 시간>이라는 제명으로 공간에 시간의 개념을 더해 놓았다.
김유림이 선택한 사려니 숲은 제주시 봉개동에서 서귀포시 남원읍에 이르는 약 15km의 숲길을 끼고 있다. ‘신성한 숲’이라는 의미를 지닌 사려니 숲은 기생화산인 절물오름, 괴평이오름, 물찻오름, 붉은 오름, 사려니오름 등을 품고 있는데다 온대 산지의 자연림이 함께하고 있어 독특한 생태계를 품고 있는 곳이다. 신화와 무속의 공간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유림이 제주의 사려니 숲을 그림의 소재로 택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대학 시절 출사와 사생의 과정을 거치며 친숙해진 숲 그림이 어느덧 작가의 작품 트랜드가 된 것은 숲의 풍경에 개성적인 색채로서 블루를 사용하게 되면서였다. 이른바 블루와 숲의 조합으로 표상된 사려니 숲은 작가의 실존적 상황을 드러내는 매우 특수한 공간이 되었다. 사려니 숲은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향이자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는 심리의 공간으로 표상되었고, 그것은 헤테로토피아적 장소가 되었다.
김유림이 사용하는 푸른색은 다양하다. 코발트 블루(Cobalt Blue), 울트라 마린 블루(Uitramarine Blue), 그리고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는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안료 들인데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가령 코발트 블루는 그에 있어 따뜻함과 차거움이 함께하는 느낌의 색이자 위로의 색으로 분류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러시안 블루는 차거움이 지배하는 색, 이른바 냉정함의 색이다. 그리고 군청색으로 불리우는 울트라 마린 블루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밤바다 같이 심연을 드러내는 색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렇듯 작가가 다루는 푸른색들은 다양한 시간대와 분위기를 나타내는 재료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푸른색의 색감으로 표현된 블루의 시간을 새벽녘으로 정했다. 동트기 직전의 숲은 여행중인 이방인들이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어둠이 사라지고 산새와 풀벌래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자 자연에 생명현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새벽을 헤치고 나온 여명이 대지를 밝히는 때가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블루의 시간이다.
블루의 시간은 사려니 숲이라는 현실 공간에 흐르는 시간이다. 그것이 작가의 예술세계로 영입되면서 비현실이고 이상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른바 유토피아와 실제의 세계가 서로 얽혀 존재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장소로 재설정되는 것이다. 캔버스 앞에 선 작가는 이러한 변이의 과정을 주도하며 자신의 조형 방식을 모방 이상의 기법으로 펼쳐 보인다. 이때 그의 그림을 지배하는 주된 조형 언어는 자유분방한 선묘다. 삶의 공간에 세워진 캔버스 앞에서 벌어지는 세밀하고도 거친 한바탕의 몸짓은 어느덧 앙상한 가지가 되고 나무둥치가 되며 그 사이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을 탄생시킨다. 행위로 남겨진 푸른 선묘들은 작가가 펼쳐내는 삶과 그곳에서 얻은 온갖 상념의 흔적으로 표상된다. 작가가 행위를 하는 동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환각처럼 펼쳐진다. 작가에게 사각의 캔버스는 벗어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현실이자 이상적 세계가 만나는 타협의 공간이며 기억을 소환하는 꿈의 장소로 다가온다.
작가의 드로잉 방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선묘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크게 구분해 보자면 덧그리기와 스크래치의 방식이 순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감을 덧칠하는 방식과 얹혀진 물감을 긁어내는 방식의 차이점은 작가가 드러내는 숲 그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형식의 변화에 따른 내용의 변화이거나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미묘한 형식 실험은 향후 작가의 숲 그림에 어떤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경과 주제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방식은 작가가 취하게 될 헤테로토피아의 세계에 대한 연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김유림이 사용하는 고유한 색채와 선율 그리고 질감과 터치는 모더니스트들이 고수해 온 형식주의를 넘어서 있다. 그의 작품은 무의식과 같은 비가시적 세계를 드러내며 동시에 작가의 개인적 삶의 메시지를 함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유림의 작품에 나타나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은 현대 지식사회의 특성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상대적이고 불확정적인 세계의 표상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려니 숲 풍경은 고독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이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하나로 구현된 제3의 장소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이 높게 평가될 수 있는 사연은 창작 의도의 진정성과 더불어 동시대성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22.8)
파란색 주관의 풍경화
반이정 미술평론가
8년 전 개인전 < Blue Hole >은 내가 김유림 작업을 처음 만난 시점인데, 제목에 적힌 Blue를 출품작들과 유심히 연결시키면서 보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니스처럼 파란 바다에 에워쌓인 해안도시를 소품에 담은 작품을 모은 전시였던 데다가 2014년 연말에 열린 2회 개인전의 전후로 어떤 작업이 전개되었는지 알지 못했던 탓에 개인의 여행기록화 정도로만 생각했다.
당시 개인전 제목에 포함된 파란색은 김유림을 구성하는 몇 개의 일관성 중 단연 독보적인 키워드라는 걸 후일 알았다. 다른 일관성 가운데에는 숲, 3면 이상의 다면회화, 외길 등을 고를 수 있겠다. 이번 전시 출품작이 모두 3개 이상의 캔버스를 연결해 숲을 그렸는데, 그림 속 숲이 제주 사려니숲길이라는 걸 작품 제목을 확인하기 전까진 알아채기 어렵다. 미디어나 방문자 개인이 찍은 기념사진들이 보여주는 사려니숲길은 촘촘하고 빼곡한 삼나무 침엽수림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그것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려니숲의 천편일률적인 이미지 혹은 객관화된 이미지는 나무들이 올곧은 기둥처럼 솟은 초록색 장관에 가깝다. 큰 숲과 대비되는 작은 방문자의 모습은 사려니숲길이 표방하는, 현대인을 치유하는 힐링이라는 판촉과도 연결된다. 김유림에 숲은 단번에 삼나무 침엽수림처럼 보이질 않으며, 인적 없이 숲만 단독으로 화면 가득 채우는 식으로 출현한다. 김유림의 사려니숲 혹은 숲 그림은 기대되는 객관적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인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의 풍경화다.
풍경화 전통은 낭만주의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도시인의 자연에 대한 향수와 자연의 아름다운 볼거리에 방점을 둔 픽처레스크 풍경화와 자연 앞에 나약한 인간을 강조하려고 자연을 숭고의 대상으로 묘사한 경우로 크게 나뉜다. 김유림의 숲 풍경화는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이라는 두 범주에 넣어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풍경에는 개인의 감정 투사가 나타나는 것 같다. 주관의 풍경화. 단일한 색채와 엮인 미술 작가는 각인 효과가 생긴다. 자신이 고안한 파란색에 특허신청까지 한 이브 클랭의 경우가 아니어도, 빨간색 노란색 흰색 등 단일한 색채와 연결되는 미술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색은 화려한 수사법보다 몇 갑절 강력한 전파력과 각인 효과를 갖는다. 세계인이 약속한 것도 아님에도 분홍은 여자와 파랑은 남자와 연관되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쓰인다. 각 색채가 지닌 성질을 연구한 역사는 길다. 괴테는 말년에 1790년 시작한 초고를 무려 20년 가까이 첨삭해서 완성한 저작이 있는데, < 색채론 Zur Farbenlehre >(초판 1810)이 그것이다. 그는 책에서 노랑과 파랑을 양축으로 두고 노랑을 긍정과 밝은 성품으로, 파랑을 부정과 어두운 성품으로 연결 지었고 자기 이론을 기반으로 소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1774)에서 실연으로 권총 자살하는 주인공 베르테르를 파란 재킷 차림으로 등장시켰다.
미술가로는 칸딘스키가 <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 >(1911)에서 목차의 한 장을 색채이론에 할애했다. 노랑과 파랑을 대비시킨 점은 괴테와 같다. 괴테와 칸딘스키가 색을 인문학적 사유로 풀이했다면, 과학적 검증으로 색채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후대에도 계속됐다. 1990년 이뤄진 색과 생리 및 심리 반응에 관한 공동 연구에선 빨간색이 교감신경계를 자극하고 혈압을 불규칙하게 하는 반면, 파란색은 평온을 유지시키고 집중을 보조한다고 소개되었다. 이런 숱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색채치료는 통상 사이비과학으로 폄하된다. 색채치료의 성공사례가 부풀려졌고 환자의 기대심리에 의존한 치료, 즉 플라시보의 혐의가 크다는 지적 때문이다.
실제로 색채이론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1890년 이래 성인 대상 색선호도 조사에서 단 한 차례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파란색은 정치적 우파의 상징색이며, 만족 고요 조화 안정 등과 연관된다고 설명되며 이에 많은 이가 동의하면서도 파란색이 또한 우울감과 고독감을 표현하는 색에 쓰인다는 걸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모든 색마다 고유한 성질이 있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수용자의 기대심리에 따라 성질은 정반대로 바뀌어 쓰이기도 하는 게 색채이론이다.
내가 처음 김유림의 작업을 접했던 2014년 두 번째 개인전처럼 김유림의 파란색은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이 지배하는 여행도시 베니스를 선택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다가, 이후로 파랗다고 단정할 수 없는 대상마저 자신의 주관적 필터로 파랗게 물들인다. 비에 젖은 노면처럼 보이는 빛나는 코발트블루 아스팔트가 도시의 차가움을 표상한 2015년 연작 < Nowhere Blue >는 그림 속 푸르른 아스팔트를 보기에 따라 비에 젖은 아스팔트의 효과인 것처럼 관객이 색감을 주관화시키게 만든다. 이 같은 작가의 주관적 필터링에도 불구하고 외부 관객은 거의 눈치 채지 못하면서 김유림 주관의 풍경화에 동화된다. 그녀의 숲 그림은 파랗다. 혹은 거의 파랗다. 어둡게 묘사된 그녀의 숲 그림이 검푸른 숲이라는 세간의 표현과도 통하기도 하고, 교통신호등의 녹색 조명을 파란불이라고 스스럼없이 합의하는 오랜 언어문화와도 통해서, 녹색이 아닌 파란색 숲은 주관적이되 어색하지 않다.
이번 전시 출품작 8점 중 4점 정도가 일점투시원근법으로 숲 안에 난 길을 묘사했지만, 김유림의 그림에서 (외)길은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관성 중 하나로 보인다. 2017년에는 풍경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외길만 모아놓은 파란 풍경화 연작을 제작했는데 연작 제목을,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 완벽한 고독Complete Solitude >이라 붙였다. 황량하고 광활한 대지를 뚫고 시원하게 종심 깊게 뚫린 도로 그림이다. 파랗게 물든 숲 그림이 작가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의 풍경화이되 외부인도 자연스레 동화된 것처럼, 숲에 난 외길에 작가가 유독 눈을 둔 그림들 혹은 숫제 인적 없이 황량한 외길만을 그린 연작들(Complete Solitude)에선, 결정적인 순간에 홀로 직면하는 게 삶이라는 진실과 맞닿으리라 본다.
이번 전시에선 캔버스 3개를 이어붙인 삼면화가 기본 포맷이고, 최대 8개의 캔버스를 위아래로 이어붙인 다면화까지 출현한다. 캔버스를 두 개 이상 이어붙인 다면화는 중세 초기기독교 미술부터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현대 화가까지 개별 패널마다 독자적인 이야기를 담고, 각 패널들을 연결시켜 큰 이야기를 만드는 유기적 구성을 위한 묘안인 경우가 많다. 반면 공교롭게 초대형 다면화의 대상을 큰 나무 혹은 숲을 재현하는데 사용한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림의 부피를 확장하려고 캔버스를 이어 붙였을 게다. 규모에서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유림의 숲 다면화는 이 경우에 가깝다. 추가로 확장된 화폭은 파란 밀도를 연장시키려는 작가의 욕구가 투영된 것일 게다.
전시제목김유림: Forest, Blue
전시기간2022.08.17(수) - 2022.08.29(월)
참여작가
김유림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매주 화요일
장르회화
관람료없음
장소제주갤러리 JEJU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관훈동, 인사가나아트센터) 제주갤러리 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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