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아트랩 신작지원 2022 : 김효진 <에코의 초상>
기획자 홍예지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 김행숙, 「인간의 시간」, 『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사, 2014, 11쪽.
길을 걷다가 무심코 밟아버린 풀들이 떠오른다. 발바닥 모양으로 뭉개진 자리에 까딱까딱 고개를 흔들며 살아 있는 풀들. 이 시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인가? -예언 혹은 저주처럼- 불가항력으로 ‘사랑’에 빠지리라 외치는 목소리들. 떠나는 이의 뒤통수를 향해 밤이 늦도록 울려 퍼진다.
그런데 ‘우리’가 수상하다. 밟은 것은 나이고 밟힌 것은 그들이지만, ‘우리’라는 말은 이 차이를 초월한다. ‘깊고 부서지기 쉬운’ 것은 나이고 풀들이다. 우리는 모두 휩쓸린다. 물결처럼, 터져버린 둑을 넘어 밀려오고 밀려간다.
끝없이 흔들리는 존재가 겪는 시간은 변화의 시간이다. 그러한 시간의 ‘한가운데’란, 어떤 사태의 한복판처럼 들끓고 있을 수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할 수도 있다. 언제나 변하는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우왕좌왕 할수록 시야에서 북극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향(指向)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김효진 개인전 《에코의 초상》*은 시련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생명들을 보여준다. 가느다란 붓으로 촘촘히 그려낸 풀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 다른 몸짓으로 제 몫의 삶을 살아낸다. 풍경을 그렸음에도 ‘초상’이라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이들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받쳐주는 배경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김효진의 화폭에서 풀들은 더 이상 구경거리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다. 그동안 볼품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얼굴이 시선의 빛을 받아 환히 밝혀진다. 가려졌던 품위가 드러난다. “거센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임을 아는(疾風知勁草)” 것처럼.
멀찌감치 물러나서 보면 벽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읽힌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각각의 생이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저기 튀기고 흩뿌려진 색깔들- 빗방울이라 불러도 좋고 빛방울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온몸으로 맞서는 존재들이 여기 있다.
바람의 방향을 감지하며 전시장을 한바퀴 돌아보자. 느닷없이 난기류를 만난 풀들이 보이고, 고비를 넘긴 뒤 잠시 숨을 고르는 풀들이 보인다. 이들의 몸은 사건을 겪은 몸이라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군데군데 긁히고 심지어 꿰뚫리기까지 했다. 전에 없던 이상한 무늬가 생겨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우당탕퉁탕” 지나온 삶이다.
바람은 다시 불어오고, 삶은 계속된다. 어떠한 위기도 풀들의 존엄을 해치지 못한다. 찬란한 생명의 노래가 바람결에 실려 온다. 골짜기마다 메아리 친다. 풀 한 포기에 깃든 기운이 파동처럼 번져 나간다. 하나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사방으로 확장된다. 각자 흔들리며, 주변의 흐름에 올라탄다. 서서히 형성된 연결망 위에서 희망이 움튼다. 다시 한번, 순환이 시작될 것이다.
*본 전시명은 김행숙의 시집 『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빌려 왔다.
작가소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의 보편적 관심사인 ‘생존 방식’에 대해 물음을 던져, 스스로가 사회라는 생태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보존’하고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 중이다. 사람과 자연의 생존 방식의 접점을 활용하여 작품 속에서 상상의 생태계를 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업소개
<수림아트랩>은 예술가의 ‘오늘’을 탐구하고, ‘내일’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수림문화재단의 창작지원 사업입니다. 기존 작업에서 탈피하거나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격려하며 최대 2년까지 창작활동을 지원합니다.
전시제목김효진: 에코의 초상
전시기간2022.08.01(월) - 2022.08.29(월)
참여작가
김효진
관람시간11:00am - 06:00pm
입장마감 17시
휴관일일요일, 공휴일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김희수아트센터 아트갤러리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118 (청량리동, 수림문화재단) 김희수아트센터 아트갤러리)
기획홍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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