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갤러리는 2022년 3월 개관을 기념하여 제주가 낳은 한국적 극사실회화의 선구자, 고영훈 작가의 전시 《호접몽胡蝶夢》을 개최한다. ‘호접몽’은 고영훈의 환영과 실재에 대한 깊은 탐구를 대변한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바로 그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전시의 명제로 내세우며, 작가는 실재와 환영, 본질과 이미지, 대상과 회화 사이의 경계와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를 넘어 이윽고 ‘관조’의 경지에 도달한 작업 철학을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2021년 작가는 《관조觀照: Contemplation》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작가에게 ‘관조’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관찰하는 것이 아닌, 또 아무 의도 없이 보여지는 것을 수용하는 것도 아닌, 즉 능동과 수동의 의미가 내포된 일차원적인 의미의 ‘보다’를 넘어선 단어이다. 어떠한 - 현실에 존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여 실재화實在化하는 것이 작가가 말하는 ‘관조’인데, 이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 작가와 도자기(화재), 환영과 실재, 이미지와 대상의 ‘구별을 잊는’ ‘호접몽’이다. 따라서 이번 《호접몽胡蝶夢》은 완숙기에 접어든 고영훈 작업관의 형성과정을 전반적으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전시가 될 것이다.
고영훈은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앙데팡당(Indépendant)》전에 〈이것은 돌입니다〉를 출품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이것은 당시 추상미술을 주류로 하던 한국 미술계에 일어난 일대 사건인데, 20대 초반에 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는 작가 개인의 의미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도 중요하게 평가되는 지점, 즉 한국적 극사실회화 태동의 순간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후 작가는 2차원의 일루전 세계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문명을 상징하는 책장 위에 돌과 오브제, 꽃과 나비를 배치하며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는 1980년대의 〈돌-책〉 연작과 2000년대 이후의 꽃과 나비 등 자연물을 다루는 〈자연법〉 시리즈가 바로 그 결과다. 또한 2000년대 초반에는 고영훈 후기 시대를 대표하는 화재畵材, 항아리 시리즈가 등장한다. 문명의 상징으로 역할 했던 고서의 책장이 이루어낸 배경은 작가 스스로 인식판이라고 부르는,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의 의미를 함축한 백색 배경으로 진화했다. 극사실적으로 그려진 도자기들은 그 자체로 충분한 회화성을 획득하며, 흰 바탕 위 중력과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배치로 추상적인 개념 역시 동시에 구현한다. 작가는 더 나아가 비로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달항아리를 극사실적으로 화면에 등장시킨다. 이는 재현을 넘어 새로운 실재를 창조했다고 평가된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건 환영이 현실이자 실재 그 자체가 되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캔버스를 인식판板으로 삼아 관념 같은 목전에 당장 주어지지 않는 것까지 그리고자 한다.”는 작가의 다짐(2014)과 2021년 개인전을 준비하며 밝힌 “먼 옛날 도공이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었듯, 지금 나도 나만의 도자기를 붓으로 빚어낸다”라는 작가의 말이 그 해석이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1970년대 초반 코트, 군화, 코카콜라 등 일상의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극초기의 작업부터 시작하여 지난 2월에 완성한 최신작까지 고영훈 작가의 화업 전반全般이 소개된다. 환영과 실재라는 회화의 존재론적 화두 안에서 작가가 50년간 치열하게 수행하며 대상의 본질을 ‘관조’하는 경지에 이르는 과정, 곧 ‘호접몽’을 보여주는 고영훈의 일대기적 전시로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한국 현대미술사 연구의 측면에서도 고영훈을 선두로 하는 한국적 극사실회화의 흐름을 관찰하고 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자리는 제주갤러리의 개관과 이를 말미암은 후원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제주갤러리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중앙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의회와 행정, 작가들이 지혜를 모아 마련한 협력의 공간이다. 작가들의 창작열을 고취시키면서도 전시와 판로까지 이어지는 생태계 구축을 위해 행정과 의회가 힘을 맞대어 제주갤러리를 개관할 수 있었다. 제주갤러리가 역량 있는 제주 작가들의 전시공간이자, 제주의 문화예술을 선보이는 문화공간으로 큰 도약을 이루기를 바란다.
■ 제주갤러리
작가노트
나는 이 세상을 ‘기氣’, 즉 에너지의 바다로 본다. 다시 말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다면적多面的인 세계를 경계가 없는 전일적全一的인 사고로 본다.
또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적 존재를 관조적 시각과 명상적인 통찰로 내 인식판, 즉 캔버스에 표현하고자 한다.
I view this world as ‘Ki(氣)’, a sea of energy. With my holistic thinking, lacking boundaries, I view the images that emerge and disappear in this sea, or, in other words, the world which constantly changes just as spring, summer, fall, and winter do.
I also aim to express spacetime beings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nto my plane of perception(the canvas) using my contemplative perspective and meditative insight.
2022. 3. 고영훈
환영의 표현 방법을 근간으로 하는 나의 작업은 2002년을 전후해서 확장된 변화로 이어진다. 이전에는 이원적 사고에 의한 현실의 대립적 관점에서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 이후 근원을 찾아가는데 불이(不二)적인 세계 속에서 전일적 사고를 우선 전제하였다. 관계와 변화의 장 속에서 에너지(氣)의 바다 위에 드러나고 사라지는 직관적인 마음의 상(像)들을 관조적 태도로 응시하고자 했다. 변역(變易)의 물결 위에 떠 있는 세상의 존재들을 내 인식판(캔버스) 위에 명상적 통찰로 모색하고자 한다.
My work, which is based on the method of illusionary expression, underwent extensive change around 2002. Previously, my focus of view had been on pursuing harmony from a confrontational perspective of reality, based on a dichotomous way of thinking. But later, holistic thinking became my prerequisite, according to which I have searched for origins in a non-dualistic world. Amidst the field of relations and change, I have endeavored to gaze contemplatively at images of the intuitive mind, which emerge and disappear on the sea of energy. With a meditative insight, I intend to continuously search for beings of the world floating on the waves of change, on my plane of perception (the canvas).
■ 2021. 3. 고영훈
시각적 환영을 넘어 사유의 전환으로
:고영훈의 예술세계
김영호
중앙대 교수, 미술평론가
Ⅰ. 보이는 것 이상을 보다
고영훈의 예술세계는 해 질 무렵 대양을 바라보며 누렸던 소년시절의 시지각적 경험 위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바다 풍경에서 바위와 돌과 책 등으로 바뀌었을 뿐,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로부터 연유된 그림은 소년시절에 경험했던 바다를 바라보는 지각방식과 연계되어 있다. 해질녘의 일상에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경이로운 환상의 경험은 실재가 환영이 되고 사물이 역사의 기호로 변주되는 지각의 능력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화가로서 그 지각능력은 화면 위에 새로운 차원의 공간과 시간을 표상하는 독자적 형식을 창안하는 차원으로 이어져 왔다. 공중에 부유하는 돌멩이 형상을 그리며 고영훈은 자신의 캔버스가 공간과 시간을 품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 “나는 내 앞에 놓여진 돌과 내 손가락 사이의 싸늘한 공간을 느끼며,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돌멩이에서 시간을 느낀다” [중략]
1970년대의 「이것은 돌입니다」 시리즈를 서두로 1980년의 책갈피 위에 트롱프 뢰이유trompe l’oeil 기법을 쓴 「돌-책」 시리즈,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자연물 시리즈인 「자연법」과 항아리 그림에 이르는 고영훈의 작업은 입체물로서 오브제가 평면 위의 일루전으로 표현되고 다시 회화적 실재(현실)로 환원되는 순환의 사이클을 체감하는 인간의 시지각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시해 왔다. 고영훈의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평론가 김복영 교수는 1998년 개인전 이후 ‘기존의 사물들을 미지의 초월적 세계를 위해 탈실재화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고영훈의 작업사를 일괄하면서 ‘일루전이 허구가 아니라 거꾸로 실재하는 사물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뜻이 있다’고 하여 작가의 작품세계가 존재물을 둘러싼 현실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Ⅱ. 트롱프 뢰이유trompe l’oeil를 넘어 트롱프 레스프리trompe l’esprit로
고영훈은 이러한 실재로서 환영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 극대화하기 위해 사물이 캔버스 공간의 앞으로 돌출되어 튀어나오도록 연출한다. 그의 작품이 입체영상을 보는 듯한 3차원성을 띠게 되는 것은 바로 오브제 이미지를 허공에 부유하게 보이도록 장치한 그림자 효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책이나 신문의 페이지를 배경으로 콜라주해 배치함으로써 착시현상을 심화시켜 왔다. 작가의 조형 탐구는 여기서 중단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발전된다. 2014년 개인전 《있음에의 경의》(2014. 5. 2–6. 4, 가나아트센터)에서는 다수의 캔버스에 항아리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항아리에 가해진 시각의 복수성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초점에 의해 흐려진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배치해 그림으로써 항아리 그림에 시간성을 함께 표상하려 한다. 고영훈의 항아리 그림은 이 단계에서 3차원적 공간을 넘어 시간을 더한 4차원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중략]
Ⅲ. 창조하는 삶에서 소요하는 삶으로
[중략] 고영훈의 소요하는 삶의 태도는 혁명적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시지각 방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무관심적 수용의 태도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에서 항아리에 이르는 고영훈의 치열하고도 고난한 작업 노정은 이러한 시지각 방식에 도달하기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대상의 형상을 과감히 지워버리고 궁극적으로 평평한 색면을 통해 절대성에 도달한 미니멀리즘의 시대에, 고영훈은 대상의 형상을 극사실적 묘사를 통해 대상에 개입되는 실재와 환영의 벽을 혼돈시켰고 이윽고 실재와 환영의 영역을 하나의 지각 현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전하는 존재물을 직관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 된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이 회화를 평면구조를 지닌 하나의 독립된 오브제로 인정하는 순간 회화의 종말을 맞게 되었다면, 고영훈은 극사실적 재현 방식의 이미지를 통해 회화를 종말의 벽으로부터 다시 회복시키려 한다.
고영훈이 캔버스에 그린 이미지는 환영일 뿐 결코 피사체와 동일한 실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캔버스에 그려지기 이전에 두 눈에 포착된 사물의 이미지는 실재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지각적 대상으로서 망막이라는 감관 위에 비추어진 허상 이미지는 실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아가 우리의 지식과 신념과 감각은 모두 이 망막 이미지라는 허상적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은 인정한다면 실재라는 것의 본질은 사고의 체계에서 이미지와 동일시될 가능태로 제시될 수 있다.
고영훈의 일원적 시지각 태도는 색즉시공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동양적 사고의 메커니즘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작가의 실험적 노정이 어떠한 예술적 가치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는 현대의 사상과 시지각 이론의 변화에 따라 달리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의 관심이 되는 것은 고영훈이 전개해 온 환영적 회화세계의 원천이 소년시절의 바다에 대한 시지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작품은 그 체험의 기억을 동시대의 선구적 경향인 극사실적 조형언어로 펼쳐놓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 안에서는 돌멩이와 작약과 나비 그리고 달항아리와 각종 오브제들이 노닌다. 그것은 이제 실재와 환영의 벽을 넘어선 세계를 지향하고 있으며 사색과 명상의 정원을 소요하는 작가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환영幻影의 극한, 고영훈의 ‘피그말리온’ 시대
김복영
서울예대 석좌교수⋅전 홍익대 교수
그의 전기 시대(1970s~1990s)는 패기만만하게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회화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모양새가 지금와 생각하니 마치 근대철학에 대한 어느 탈근대 철학자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그의 반론은 결코 회화의 경계를 범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화가로서 마땅히 염두에 두어야 할 비판임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한 세대에 해당하는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렇다고 어디 반론만 하다 세월을 보냈겠는가. 더 많이는 자신을 『삼국사기』에 전설처럼 등장하는 솔거率居를 모상하는 데 심혈을 쏟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전기 시대는 자신의 회화적 입지를 확실히 자리매김하고자 치열했던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략]
고영훈의 생각에는 마그리트가 형상으로서 파이프를 지칭해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 건 회화의 필요조건을 방기했거나 적어도 형상으로서의 회화란 모조리 사이비라고 폭언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파이프다’라고 계속해서 말했어야 했다는 거다. 마그리트가 이를 부인하였기에 형상을 다루는 회화란 회화로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말과 같은 추상기호에 기생함으로써 회화의 명맥을 부지한다는 건 회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거라고 보았다. 당시 고영훈의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형상으로서 파이프’가 회화로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환영과 사이비 환영을 구별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형상이 물어져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존재했다. [중략]
고영훈의 전기 시대는 이렇게 해서 환영을 회의하고 폄훼한 마그리트와 정면대결하면서 형상에 의한 환영의 권위와 위엄을 전면에 부각시키기 위해 형상의 회화적 필요충분조건을 탐구하는 데 생애를 걸었다. 그는 마그리트가 예의 파이프를 소재로 한 작품 말고도 <유리 열쇠La clef de verre>(1959) 등의 작품에서 공중 부양하는 돌이나, 망망대해의 하늘에 띄운 돌의 성곽을 그리면서, 돌을 투명유리나 아르곤 같은 휘발성 가스로 대체해서 그리는 태도를 비판하고 이 또한 회화를 기호로 대체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했다. 고영훈이 돌을 그리면서 돌이 아닌 것으로 대체하는 일체를 비판한 건 이 때문이었으며 돌을 다루되 동어반복적으로 돌에 육박하고자 한 건 이 생각에서였다. 1970년대 <이것은 돌입니다>에 이어 ‘솔거시대’로 상징되는 1980년대의 <돌 책>과 1990년대의 <자연에서 자연으로>의 연작에 이르는 전기 시대가 이렇게 해서 펼쳐졌다. [중략]
그의 후기를 알리는 정황이나 징후는 전기의 연장선상의 것이면서도 차별적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그 단서는 애니미즘이나 물신에 대한 관심, 실존하는 것들, 살아 있는 생명체들을 응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분청사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릇의 몸체보다는 용트림하는 패턴을 강조하고 송죽과 난을 강조한다든지, 전통 밥그릇과 국그릇 같은 일상적인 삶의 편린들을 부각시키는 여러 면모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건 그릇 자체를 다루면서도 이것들이 시공간적으로 특정 장소를 떠나 부동浮動하는 동태를 드러내고 인간적 체감을 강조한다는 거다. 이를 위해 그릇의 자태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점이漸移과정은 물론 클로즈업과 클로즈다운을 시도하는 방식이 전기 시대의 그것과 현저한 차별성을 보인다. 이러한 차별성이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에 의해 사물의 가변성을 강조하고 생명있는 것들을 응시하려는 데서 비롯되고 있는 데 후기 시대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중략]
근자에 그가 다루는 사물은 전기 시대의 그것과 궤를 달리한다. 달리하려는 데서 환영의 또다른 극한을 붙잡고자 한다. 현실과 환영을 갈라 어느 한 쪽 만이 아니라 이것들 모두를 아우른다. 캔버스의 앞과 뒤 판 전체를 아우른다. 현실로 존재하는 사물(돌)과 형상(환영)을 이분법으로 가르지 않고 하나로 아우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전체와 하나가 따로있는 게 아니라 일체가 더불어 있다는 걸 강조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물은 그의 시선에 주어져 있거나, 주어져 있지 않거나, 다른 처소에 있거나, 생각이나 관념으로 존재하거나, 이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데 있다. 이것들이 특정 시간과 공간을 빌려 현전하는 모두가 ‘환영’이고 현실이 된다. 정확히는 환영의 극한으로서 현실이자 실재라는 걸 강조한다.
그의 후기 시대를 특징지어 말할 수 있다면, 이 정황을 한마다로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전기 시대가 실재 하나 하나를 입증하는 데 강조를 두었다면, 그의 후기 시대는 ‘환영이 현실로 되고 실재가 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틀림이 없다면 여기서 말하는 환영이란 현실과 실재의 소재가 아니라, 환영이 곧 현실이자 실재라는 것, 다시 말해 환영과 현실 그리고 실재가 하나의 ‘등가물equivalent’이라 할 수 있다.
고영훈은 이렇게 해서 환영의 극한을 필요로 했고 환영의 극한으로 존재하는 실재(현실)를 허용하고자 했다. 그는 환영의 극한에서 사물들이 곧 현실이자 실재로서 ‘있음’의 권리를 갖는다고 확신했다. 그에게서 이러한 있음의 권리가 가능함으로써 회화가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실재의 ‘권화權化, incarnation’일 수 있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있음’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에서 생명의 경이를 보았던 순간이다. 경이驚異, wonder는 불가능하리라 믿어 자포자기 상태에 있다가 상황이 긍정적인 것으로 급반전되었을 때 일어나는 놀라움이다. 그래서 경의敬意가 솟구친다. 경의는 그것이 그 순간 그렇지 않을까바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된다. 경의의 어원을 풀이하면 인간의 인간됨을 뜻하는 ‘오마쥬homage’다. 오마쥬는 옛 시절 신하가 군주에게 바치는 충성을 뜻했다. 고어에서는 ‘충성을 바치고 신하가 된다’는 걸 일컬었다. 이 말이 현대어로 전용되어 ‘경의를 표한다’는 걸로 되었다. 과거 왕권시대 인류는 왕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그의 신하가 되었을 때 인간됨의 극한을 느꼈을 거다. 그들에게 왕은 하늘같은 존재요, 그래서 그와 더불어 있을 때 인간됨의 극한을 느꼈을 것이다.
고영훈의 근작 세계를 말하면서, 그가 마침내 환영의 극한으로서 ‘있음’에 주목하는 또다른 연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그의 근작들을 보노라면 무엇인가가 현상세계를 뛰어 넘어 그 극한에서 저며오는 불가사의한 게 감지된다. 그가 그리는 환영은 무엇인가가 그 안과 바깥에 은폐되어 있다는 걸 고지한다. 그의 환영에서 그가 은폐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는 순간 사람들은 환영과 실재(현실)가 경쟁관계에 있다는 걸 직감한다. 그가 그린 형상과 환영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서다. 경쟁관계는 실재가 환영의 지척에 있다는 걸 감지할 때만 가능하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경쟁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있음의 극한에서 경의가 솟구쳐야 한다. [중략]
이를 작가 고영훈으로 되돌려 말하면 ‘인식의 판cognitive version’이 총체적 장으로 되는 순간이다. 인식판이 총체적 장이 됨으로써 환영이 현실이 되고 실재가 된다. 인식의 총체적 장은 애초 우리가 사물과 세계를 지각하는 시공간의 존재방식이다. ‘그건 자연이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은폐해 놓은 비밀의 트릭이자 그 진원을 알 수 없는 하나의 능란한 기술이다. 이에 의해 현상(환영)의 세계가 현상의 세계로서 우리 앞에 전개된다’(칸트)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게 고영훈의 작품에서 확인되는 건 환영의 극한이 그의 그림에서 발로되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현실에서는 이게 으레 그렇게 됨으로써 현실로 인식되지만 회화에서는 기이하게도 환영의 극한이 야기될 때만 허용된다. 이 경우 회화가 야기하는 경이는 놀라움을 자아낼 뿐 아니라, 이 때문에 ‘예술’이라는 이름에 갚음 되는 기쁨이 충천할 것이다. [중략]
근작들은 전기 시대와 같은 차가운 물상物象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언제나 느끼는 것 같은 현실적 체감을 동반한다. 시간에서 시간으로 이어지는 변전태가 분청사기와 인물을 감싸고 ‘감성적 다양체sensuous multi-modal being’가 등장하듯이 그린다. 단일체를 다루는 작품에서 마저 전일시wholist view가 스펙트럼을 방출한다. 그래서 그것들 하나하나는 전기 시대의 그것과 같은 차가운 물상이 결코 아니다. 이는 시공간적 아우름이 지적 개념 저 너머를 조율하는 데서 연유한다.
고영훈의 ‘후기 시대’는 이렇게 해서 전기 시대보다 좀 더 진화된 패러다임의 리얼리즘을 지향한다. 겉으로 보아 여전히 환영을 구사하지만 ‘있음’을 포괄하는 전일적 버전이 환영을 감쌈으로써, 그의 후기 시대는 이를테면 피그말리온이 꿈꾸었던 살아있는 세계를 실현한다. 애초 삼라만상이란 환영이거나 실재이거나의 이분법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은 원래 하나의 등가물로 존재하는 환영이자 실재라는 의미에서, 이분법적으로가 아니라 일원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강조한다. 환영의 극한을 다루는 근자의 정황이 이것이다.
전시제목고영훈 개인전 《호접몽胡蝶夢》
전시기간2022.03.16(수) - 2022.04.11(월)
참여작가
고영훈
초대일시2022년 03월 16일 수요일 04:00pm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제주갤러리 jeju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관훈동, 인사가나아트센터) 제1전시장, 본전시장, 제2전시장, 3개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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