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멸明減하는 심상의 투영들
피에르 데카르그 | 평론가
“작품을 설명하기 보다, 다만 주시해 보아주었으면 한다.”
어떤 주제가 아닌 리듬과 색으로 표현하는 작가를 소개하려면, 그의 작품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볼만한 이유가 주어져야 한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굳이 곽수영을 다른 한국 화가 예컨대 내가 파리에서 알고 있는 이응로 — 그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 와 연결시키지 않겠다. 그런 관계를 찾는다면, 기껏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지구 저편의 예술에 대해 전문가인양 하는 일 밖에 안 될 터이지 않는가? 그런데 실상 나는 어떤 예술에 대해서건 특별한 전문가로 자처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프랑스인들은 재불 한인 작가들을 많은 관심 속에서 맞이한다. 그들은 모국을 떠나 외지에서 작업하고 있거니와, 그 가운데서 새로운 정보를 찾고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작가가 자신의 진면목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의도에서 꾀하는 변모를 뜻한다. 실상 작업의 성질은 끈임 없이 변화될 수 있다. 마치 우리 존재의 전체 모습이 그대로이면서 신체 세포들은 끈임 없이 새롭게 바뀌어지는 이치와도 같다.
곽수영과 이응로의 작품에서 민족적 예술성을 간파해내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아마도 숙달된 눈으로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그들의 공통된 원천을 분간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어떤 단체나 그룹, 전반적 경향을 개괄하려 하지 않고, 개별 작가를 평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곽수영은 단연코 주목할 특이한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이곳 파리에서 제작됐음은 우리에게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작품들을 대할 때, 사람들은 흔히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분간하거나 식별해내고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요컨대 그들은 단순히 주시하는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곽수영은 제목에 비추어 요약돼 버리고 마는 작품을 하는 작가가 아니다. 우선 그의 캔버스 위에는 식별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거의 아무것도 없다. 잠시 후 우리는 그런 작품 표면에서 떠오르는 여인이라든가 어린아이, 말들, 사람의 무리들 등을 분간해내며, 작가는 거기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제목을 부여한다. 실제로 그의 회화는 무엇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지 않다. 부스러기와 가루들, 미세한 물감 덩이들 그리고 실낱 같은 선들이 서로 뒤엉켜 있을 뿐, 그나마 그런 뒤엉킴 조차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의 형태들은 비물질적인 몽환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은 극단의 영역 또는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 감상자로서는 간파해내기 어려운 위기의 상태라고나 할까?
아마도 작가는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갖는, 설명하고자 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곽수영이 제시하는 형태들은 우리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보았다고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의 형태들은 의심스러운 불분명한 기억 속에 머문다. 구체적 현실성이 가능한 최대로 소거된 상태라고나 할까? 그러나 반대로 그의 작품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분명, 인체나 동물의 해부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진 않지만, 그의 형태들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여인이나 어린아이의 생명력이 아니라, 다른 화가들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작가의 작업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생명력이다. 하지만 곽수영의 작품은 그 생명력을 구구하게 드러내 보이거나 강조하여 환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생명감은 부재(不在)의 영역 한 켠에서 솟아나고 있다. 어떻게? 실상 우리 모두는 삶의 한 가운데서 이런 부재를 체험하지 않던가? 예컨대 기억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말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아주 우연히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아래 전시장들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그의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부재(不在)감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강조된 존재감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사실에 대해 숙고해 볼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어느 작품과 마주치게 되든 간에, 나는 항상 작가가 작품 속에서 추구하는 바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1947년, 페르낭 레제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도 그랬고, 장 팅글리의 시골 작업장과 몽빠르나스에 있던 이브 클랭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도 그러했다. 그들과 만나면서 나는 항상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고, 그들의 작품에서 — 특히 페르낭 레제의 경우 — 너무 성급하게 작품 파악을 하기 보다, 마치 길을 걷는 보행자가 거리의 흐름과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듯, 시간의 여유를 갖고 작품의 이모저모를 바라보며 숙고해야 함을 깨닳았다. 그 덕분에 나는 장 팅글리의 기계작품이 만들어내는 불규칙의 리듬이 죽음의 개념이 아닌 《에스프리》로 통하며, 이브 클랭의 《청색》이 비가시성으로 통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곽수영의 작품 앞에서 자문하거니와, 여러 질문들 중에서 어렴풋한 《투영》과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성》을 중심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내가 보건대, 작가의 작품은 스스로 《누구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제기된 질문은 바로 《내가 존재하는가?》이다.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곽수영의 작품들은 분명한 지각 체험의 한계 밖에 머물며, 감상자가가 명명하기 직전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내가 존재하는가?》란 근본적 의문을 떠오르게 하면서 동시에 회화가 실재와 비실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에 대한 대답을 구하고자 한다. 곽수영은 그런 점에서 관심 있게 고찰해볼 작가이다. 좀 전에 말했듯이, 그의 작품의 형상들은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기 전에 지나가 버리며, 명명할만한 상념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의심스러운 기억의 영역 안에 머물기 때문일까? 구체적 현실로 인식할 수 있는 조그마한 참고도 혹은 근거가 될 그 어떤 원천도 주어져 있지 않다. 곽수영의 작품은 아주 어렴풋이 존재를 환기시킬 뿐, 이를테면 존재의 지워진 상태를 혹은 더 이상 그 자취조차 볼 수 없게 된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다만 그의 작품 표면에서 볼 수 있는 마티에르가 우리로 하여금 작가의 정신성을 엿보게 할 수 있으리라.
곽수영의 회화는 서구의 유화 전통, 이를테면 반 아이크 형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회화의 전통 안에 머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속도감, 그것도 현대적인 속도감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제작방식과 공존하는 두 가지 시간관념과 마주치곤 한다. 각각의 캔버스는 바탕칠 작업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작가는 이 바탕칠을 일곱 혹은 여덟 차례에 걸쳐 반복하며, 겹겹이 쌓인 물감의 층들을 말리기 위해 대략 삼 개월을 기다리게 된다. 마침내 물감 층들이 마르는 긴 준비기간이 끝나면, 작가는 비로소 물감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번에는 반대로 매우 속도 빠른 작업이다. 물감 층들을 긁거나 파고들면서 혹은 벗겨내면서, 드러내거나 긁어낼 표면을 결정짓는다. 작품은 몇 주 만에 완성에 이른다.
곽수영의 작품의 불분명한 형상들은 이처럼 긴 기다림과 오랜 —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 매우 빠른 속도의 — 작업에 의해 떠오르게 된다. 그것은 행위와 마티에르가 어우러진 작업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과거 수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던 오토마티즘과 같은 유의 제작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모든 것은 명확한 의식의 흐름 가운데서 이뤄지고 결정된다. 실상 곽수영은 캔버스에 최종 형상들을 떠올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테마들을 에스키스하고 데생을 통해 준비하는 과정을 거친다. 감상자가 보는 불확실한 형상들은 따지고 보면 작가의 바로 이와 같은 명확성에 대한 욕구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요컨대 작가는 지워지거나 혹은 반대로 나타나고 있는 형상들을 통해 비확정적 실재들을 추구하며, 나름의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곽수영의 회화는 이런 측면에서 끊임없이 문제들을 떠올린다. 그가 표현하는 여인들, 어린아이들, 동물들 그리고 인간 군상들은 마치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는 브라운식 세포 진동원리를 응용하여 묘사된 듯이, 캔버스 표면 위에 그어진 무수한 가는 선들과 미세한 물감덩이들의 진동을 통해, 그 가운데서 그리고 그 진동대로 드러내어지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형상들의 존재를 지각할 수 있을까? 그 실재들을 길거리나 야외에서 마주칠 때처럼 오랫동안 인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원자나 분자들 혹은 파동의 과학적 원칙대로 금방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하지만 곽수영의 작품 표면에서 형상들은 여전히 인지할 수 있는 채로 남아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의 화면들은 여전히 형상들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달리 말하자면 작가가 제시하는 그 형상들이란 생명의 결정적 이미지들로 요컨대 동굴벽화 시대 이후 계속 추구되어 온 그런 확인될 수 있는 생명의 이미지들이 아닐까? 나는 곽수영의 작품에서 우리가 이처럼 숙고해볼 수 있는 사색의 여지를 품고 있음을 확신한다.
미술은 그 동안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제기해본 적이 없지 않았던가?
전시제목곽수영: 심상의 빛: The Light of Imagery
전시기간2021.12.17(금) - 2022.01.16(일)
참여작가
곽수영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장르회화
관람료일반 3000원
장소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가나아트센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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