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침묵, 화려한 불안
이주은, 성신여대 교수
정명조의 작품과 마주쳤을 때 잠시 당혹스러운 이유는 인물화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상대가 실제 사람이든 그림 속 주인공이든 습관적으로 얼굴을 보고, 제일 먼저 눈을 맞추거나 표정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그러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다 보면 다른 부분을 찬찬히 바라 볼 기회는 자연스럽게 놓치고 마는데, 화가는 이런 점을 알고 아예 얼굴을 그리지 않기로 한다. 옷의 색채와 패턴에 우리를 한껏 몰입하게 하기 위해서다.
화가는 우리 전통 의상이 지니는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여졌을 때 그녀의 작품은 결코 색채와 패턴에서 머물지만은 않는다. 아름다운 옛 옷을 차려 입고 뒤돌아 선 여인에게서 우리는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오랜 회한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어디에 있어도 과거를 싸 안고 다녀야 하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찾아내기도 한다.
작품의 의미가 이렇듯 다양한 맥락에서 읽히는 것은 화가가 옷만 그리지 않고, 옷을 입은 여인을 그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얼굴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대상이 인간이라면 보는 사람은 숙제처럼 사회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자아정체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가 인간을 소재로 삼았다면 그 그림의 의미는 결코 단순해지기 어렵다.
색채의 언어: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원색의 찬란한 의상을 입은 여인이 어렴풋이 붓글씨가 씌어진 흰 바탕의 벽을 보고 서 있다. 황진이가 펼친 속치마에 시를 적었다는 벽계수의 일화가 스치듯 떠오르면서, 조선시대 주류를 이루었던 고고한 선비문화와 그림자처럼 선비문화의 풍류를 위해 존재했지만 늘 미천하게 여겨져 왔던 기생문화가 대비를 이룬다. 단색조의 배경은 1970년대 우리나라 화풍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모노크롬 회화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상태에서 작품과 작가의 정신 그리고 세계가 합일 지점에 이르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삼았던 모노크롬 회화는 색이나 형태를 가능한 배제하였는데, 그 이유는 색이나 형태가 어떠한 감정이나 연상작용을 자극함으로써 순수한 하나의 통합된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선비의 고결한 묵상에 기생의 존재가 방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개개인이 단일민족이라는 기치아래 하나로 묶여졌던 1960-70년대 한국의 근대화 시기에, 단일한 색상이 하나의 평면을 가득 채웠던 모노크롬 회화가 유행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모노크롬 회화 가운데에서도 유독 백색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던 것은 그것이 조선의 선비정신이라든가 유교주의적 절제, 백의민족의 순수함, 그리고 가난극복을 위한 금욕주의적인 성향과 맞물리면서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추진하는 방향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을 그리면서 화가는 마치 이것 좀 보라는 듯이 비단옷감의 광택과 금박의 번쩍임, 그리고 한복의 원색적인 선명함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흰색의 단색성에 저항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흰색이 무색을 위장한 채 순수함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 다른 색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우리 일상 속으로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방식은 색으로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원색의 형태가 아니라 눈에 띠지 않는 백색의 형태이다. 단일 색으로서의 흰색의 순수성 배후에는 다양한 ‘차이’를 지닌 사람들이 각각 자기만의 색채를 표출하지 못했던 아픈 기억이 숨겨져 있다는 진실을 화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관점을 바꾸면 원색적인 것이 흰색보다, 다색이 단색보다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인간다운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정명조의 그림에서 사용된 검은 바탕 역시 어느 지배적인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개별적인 가치들을 변별력 없이 덮어 버리는 상황을 상징하는 듯하다. 검은 바탕 위에 놓여진 신부 혹은 왕후의 모습에서는 은연중에 비운의 명성황후를 떠올렸는지 마치 죽음을 향해 서 있는 사람처럼 암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찬란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지금 막 컴컴한 검은 용광로 속으로 녹아 들어갈 운명에 처해 있는 것만 같다.
검은색은 여러 색을 혼합하여 만들어진, 모든 색채들을 전부 포용하고 있는 색들의 왕이지만, 그 왕은 다양한 색상들의 가치를 그 어느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 독재자임에 틀림없다. 색들의 무덤과도 같은 검은색 앞에서 울긋불긋한 색채들이 마치 죽음 직전의 시한부 생애처럼 마지막 빛을 선명하게 발하고 있다.
정명조가 화려한 색조를 단색 바탕 위에 두드러지게 대비시킨 것은 개성을 수용하지 않는 단일방향적인 문화 속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는 억압들을 들추어 해방시키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흑백 동질성의 문화 속에 스스로 용해되어버리지 않으려는,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화려한 발악이자 저항이 바로 정명조가 택한 멀티크롬일 것이다.
침묵의 목소리: 모든 것을 거부하다
정명조의 작업은 지금까지 공적으로 말해지지 못한 여성의 이야기, 즉 대대로 이어지는 여인의 내적 역사를 침묵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전통 옷을 매개로 해서 나와 어머니, 다시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 이어지면서 여인의 내면의 역사가 엮이게 된다. 그렇게 여러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작품의 배경은 지극히 가부장적인 유교윤리가 잔존하고 있는 공간으로 바뀐다. 극도로 통제되어 있었던 여인의 삶, 가내노동, 인내, 기다림, 그리고 표현되지 못한 열정 등 내밀한 삶의 이야기가 침묵 속에 전해져 온다. 말없는 뒷모습은 여러 명이 떠들어대는 알 수 없는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강렬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
침묵은, 특히 오래도록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영화평론가인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언급한 바 있듯, 이미 부여된 의미를 수용하는 묵인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로서의 말없음이다.
정명조가 그린 침묵은 후자이다. 세상을 등지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지나간 것에 대해 일말의 미련도 가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뒷모습은 곧 떠나는 자의 모습이다. 떠남으로써 여인은 기존에 자신에게 부과되었던 모든 사회관계를 더 이상 지속하지 않으려 한다. 행여 그것이 열정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침묵과 보이지 않는 얼굴, 그리고 등돌림은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은유가 된다. 즉 역사적 사회적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한 여행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떠남이란 결국 떠돎을 뜻하기도 한다. 타협하고 묵인하며 그 틈새에서 적당히 자기 자리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사회에 정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남이란 그 어느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한 자들의 서글픈 이야기이며, 불확실한 미래를 싸 안고 가야 하는 스스로와의 막막한 약속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 멈추어 서 버린 여인은 결코 전통적인 여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충분히 자유롭고 활짝 열려있는 세상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 자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물음을 계속해야 하는 오늘날 자신들의 모습이 바로 정명조가 그린 여인들인지도 모른다.
화가는 여인의 얼굴을 끝내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게 함으로써 전시장에 온 관람자를 본능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얼굴 없는 여인은 상대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비로소 안심하고, 상대를 통해 나를 알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에 충격을 가한다. 색채와 패턴의 풍요로움을 감상하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자아정체성에 대한 지극히 현시대적인 고민들을 작품이 암묵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제목The Paradox of Beauty
전시기간2010.06.11(금) - 2010.07.04(일)
참여작가
정명조
초대일시2010년 06월 11일 금요일 05:00pm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일요일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가나아트센타) )
연락처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