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언어는 그 매개체로서 사람의 몸을 통하여 끊임없이 만들어지며, 이미지 행위를 통한 언어가 생산됨으로써만이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노트–
갤러리JJ는 ‘그리기’를 중심으로 인간 탐구를 실천해오고 있는 서용선 작가의 개인전을 다시 마련하였다. 지금까지의 전시는 2018년에 자화상, 2019년에 콜라주 및 오브제라는 각기 다른 초점으로 작업을 조명하였고, 이번 《서용선의 생각_가루개 프로젝트》 전시는 다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지난해 5월부터 약 10여 개월에 걸쳐 서용선 작가와 갤러리JJ가 함께 철거 예정인 빈집에서 벌였던 ‘생각 중’ 가루개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하는 전시이며, 언어를 바탕으로 텍스트가 회화의 주된 조형 수단으로 다루어지면서 서용선 작업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국면을 지켜볼 수 있다. 프로젝트 현장에서 제작된 모든 작품과 그곳에서 일어났던 무형의 활동에 대한 기록물들이 전시되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그 성과와 의미를 짚어본다. 도록은 프로젝트에 관한 책으로 전시 중에 출간된다.
전시 작품은 콜라주 방식의 평면작업을 비롯하여 벽화, 유리창문, 문짝 등 다양한 매체를 바탕으로 하며 한글의 조형성과 그 예술적 함의도 주목한다. 인류문명과 예술의 시초가 된 이미지와 문자는 그 기원에서부터 밀접한 관계이며 또한 오늘날 미술에서의 문자나 언어의 활용이 커지는 만큼 이는 역사를 더듬어 언어의 본질과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찾아가는 계기가 된다. 또한 쓰기와 그리기, 읽기와 보기 사이에서 우리의 지각은 경험되며 전시는 더욱더 풍요로워진 ‘그리기’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용선 작업의 모든 시각적 형상은 기본적으로 사람, 실존적 삶에 대한 관심으로 함축될 수 있으며 이는 곧 현대인, 인간의 삶을 조건 짓는 ‘사회’와 관계 지으면서 지금까지 도시 인물과 역사화 그리고 신화, 자화상, 풍경 등으로 나타났다. 그의 예리한 시선은 우리 삶의 현실을 파고드는 힘과 서사적 면모를 발휘하였고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은 많은 비평에 회자하여 왔다. 한편 작가는 지속적으로 ‘철암 그리기’와 같은 예술공동체프로젝트를 통하여 공동체와 삶의 시공간을 기꺼이 함께해왔으며 이번에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실행하였다.
전시의 기반인 가루개 프로젝트(2020.5.20~2021.4.24)는 양평군 가루개 마을의 비어있는 한 평범한 농가 건축물을 상대로 벌인 한시적이고 진행형인 예술프로젝트이다. 곧 철거 예정인 빈집을 건축의 공백 기간 동안 작가가 마음껏 작업의 매체 혹은 재료로 사용하였다. 누구에게나 공간이 개방됨으로써 완성된 작품이기에 앞서 ‘창작 과정’과 ‘관객 참여’가 중요하였고 지역민들의 악기 연주회, 토론, 퍼포먼스 공연을 마련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작업에 반영하는 등 함께 공감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폐가는 남아있는 삶의 흔적 위에 새롭게 몸이 만들어내는 말과 글, 움직임과 소리, 에너지가 흐르는 장소로 거듭났다. 이러한 예술적 개입으로 인해 빈집은 타인과의 소통을 유도하는 공공장소가 되었고, 프로젝트는 ‘한시적인 공공미술’, 지역민과 함께 하는 ‘장소로서의 미술’의 성격을 띤다.
이때 작가는 언어적 작업을 시도하였다. 집의 외벽부터 실내 구석구석 이어지는 회화로서의 글쓰기, 벽화이었다. 프로젝트의 시작으로 매일 집 담벼락에 조금씩 자신의 생각과 떠오르는 일상 속 단어들을 썼고 이후 실내작업에서는 외벽에서의 생각들이 좀 더 구체화하면서 문장, 다른 문자들이 섞이고 형상이미지들이 함께 어우러졌다. 이동 매체는 물론 벽면, 유리창, 문짝 등 30여 년간의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건축물의 구성요소들이 예술 매체가 되었다. 프로젝트는 조형적 실험이자 미술과 공간이 일체를 이루고,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는 환경이었다.
이제 프로젝트는 장소를 떠나 갤러리 공간의 전시로 구현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리기로서의 텍스트 작업이 새로운 축을 이루면서 다양한 매체들의 사용과 더불어 회화의 장르가 더욱 풍성해졌다. 전시장에서 비록 현장의 환경을 다 느낄 수는 없지만 직접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온 건축물의 일부분들, 장소성과 현장감에 영향 받은 작품들, 영상과 집의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본래적 장소를 실감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신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 구성에는 회화와 드로잉, 오브제, 사진과 영상, 그 외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아이디어스케치들이 포함된다. 특히 벽화와 유리창 작업이 선보이고, 각종 현실 사물들이 이어지고 붙여진 콜라주 방식의 회화작업이 많다. 작가는 일상 속 나무 판넬, 박스종이, 커튼 천, 버려질 건축자재인 유리창과 콘크리트 벽까지 회화의 매체를 자유자재로 가져온다.
/ 이러한 현대사회의 소비재로서 흔한 일상용품, 건축재료 등 동시대의 기호는 현대인의 삶을 대변한다. 붙여진 사물 또한 은박지나 음료상자, 커튼 천 등 일상 재료들이며 이러한 작업은 회화의 재료인 물감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관계하며 그것들이 가진 물질성과 재료에 내재된 리얼리티를 가져온다. 이는 우리가 속하고 경험하는 사회와 처해진 상황들을 가리키면서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한다. <미스트롯>은 그 제목만으로도 현시대 상황과 징후가 보인다. 작품 <고구려>는 작가가 중국 지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여 현장에서 피부로 와 닿았던 고구려 유민들의 고된 삶의 기억을 품고 있다. 고구려의 기억은 지난 번 전시에서 <북두칠성>으로 만난 적이 있다.
<웃는 얼굴>, <들여다보는 눈>, <강변걷기> 작품 속에 들어온 우유, 견과류 등 텍스트가 쓰여진 포장재들은 자신이 섭취하였던 기호식품의 패키지들이다. 서용선의 작품 속 ‘사람들’이 늘 어떠한 상황과 얽혀있듯이, 작품 재료에는 건강을 강조하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정보 텍스트가 들어있다. 작가는 ‘먹거리도 변하고 있고 그것을 먹는 내 신체도 변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 순간 특정한 상황과 더불어 존재하고 그때마다 모습이 같을 수는 없다. 전시에서 작품 속 인간 이미지들은 콜라주로 구현되어 형상의 윤곽만 가까스로 남아 있다. 서용선에게 있어서 생로병사를 거치며 실존적 삶 속에서 결코 고정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내는 일이란 어렵고 불가능하며, 차라리 이렇게 극도로 환원된 기호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리라.
작가는 일루전적 평면보다 사물 속으로 더 들어가서 질문을 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몸이라는 물질성을 가진 ‘사람’과 ‘사물’과의 경계에 맞닥뜨린다. 프로젝트의 집 벽의 수많은 단어들에서 가장 빈도가 높았던 것도 사람들의 이름이다. 서용선의 관심은 어김없이 사람이며 이번에도 새로운 형식적 실험과 사유를 가지고 인간을 탐구하는 여정에 나섰다.
/ 작품 <가림토 글자>는 고대 한글로 구성되어 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 기호는 먼저 형태로 다가온다. 훈민정음의 어원을 이 가림토 글자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의 관계로 얘기하기도 한다. 훈민정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형상화’한다는 개념하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소리 언어에 형태를 부여하여 만든 문자로서, 음을 나타내는 자모의 형태는 소리를 내는 발음기관의 모양에서 가져온다. 즉 정음은 음을 그리는 일이었다. <가림토 글자>는 작가가 첫 한글이 ‘그리기’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린, 곧 소리를 그린 작품이다.
초기 한글의 조형성, 형상적 상상력에 관심을 둔 또 다른 작품으로 <훈민정음>과 <월인석보>는 프로젝트 집의 유리창문으로 만들었다. 책의 한 구절씩을 인용한 텍스트를 조형요소로 하는 이 작품은 마침 같은 기간 중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전시 《ㄱ의 순간》에 출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텍스트 사용은 지금까지 서용선의 화면에 지하철역 이름이나 간판 그리고 그림을 그렸던 날짜 등으로 종종 이미지 사이에 나타났다. 이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자 조형적 요소, 글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특성이며 기록하는 일이며 그 저변에는 작가에게 내재된 서화일치사상, 그리고 언어적 개념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그가 막 작가로서 시작하던 80년대 한국 미술계는 다원적인 경향 가운데 백색 모노크롬이 주류였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서화일치론의 그림자마저도 희미해지고 대학에서는 물론 당시 지배적이던 모더니즘의 기치 아래 회화에서 텍스트는 배제되었다. 한편 이응노의 문자추상, 남관, 김창열, 박서보의 에크리튀르 등과 같이 문자적 경향도 남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미지와 문자는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이후 상형문자같이 그 기원에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글과 그림은 공존하거나 비교 논의되어 왔다. 서화일치론과 서예, 기독교시대의 성경필사본, 이후 미술의 모더니즘에 의해 미술에서 문자가 배제되었다가 20세기 들어 입체주의 콜라주, 초현실주의, 다다, 개념미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른다. 한편 현대 기호학은 이미지와 텍스트를 새롭게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미지와 언어학의 관계는 세상의 모든 것을 ‘기호’로 해석하여 서로의 관계와 ‘구조’로 밝히려는 구조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분석하며 많이 거론되었다. 우리는 종종 텍스트가 읽는 대상에서 보는 대상, 즉 이미지가 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를테면, 사이 톰블리나 로만 오팔카의 아름다운 회화에서 그것을 느낀다. 제니 홀저, 바바라 크루거, 쉬빙 등의 작품들을 보면 현대미술에서 텍스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지 알 수 있다.
/ 작품 <마고>, <몸짓>까지 모두 소리에 관련된 단서들로 연결된다. 프로젝트 집에는 ‘율려’, 음악 등 소리에 관한 단어들이 많았는데 <마고>는 율려에서 비롯된 마고 신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출품을 시작으로 종종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율려는 파동이자 에너지, 음악의 질서, 모든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부도지』의 한국민족 창세기 신화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와서 생겨난 율과 려가 있고 모계사회의 마고 신화와 연결된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를 전후하여 언어유희적인 플럭서스의 작품과 함께 당시 백남준과 보이스의 소리에 관한 퍼포먼스, 존 케이지의 자연음을 비롯하여 언어학, 음성학에 기반한 많은 예술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전시에는 벽면을 잘라낸 벽화가 3점 포함된다. <에너지 흐르는 집1>, <에너지 흐르는 집2>, <몸짓>은 프로젝트 초기에 그려져서 지금까지 거실의 한쪽 벽면을 구성하고 있던 이미지로, 이제 유목적인 작품이 되어 우리 앞에 놓여졌다. 여기에는 가루개 프로젝트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뱉어내는 몸짓의 말과 글’, ‘움직이는 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간’, ‘관음의 일상을 기호화한 그림기호’라는 텍스트들은 곧 현장의 공간 느낌을 대변하고 언어와 현상학적 경험에서의 인간 몸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결국 말과 글, 즉 언어는 이를 지각하는 몸을 가진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일이다. 움직이는 우리의 몸은 언어를 살아있는 것으로, 말을 계속 생성하고 또 지각한다.
작가는 지하수, 모터, 전기, 태양 같은 단어들과 함께 프로젝트 집을 하늘 아래 ‘에너지 흐르는 집’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저변에는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많은 것들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작동하고 있는가. 인간이 침묵하면 더 많은 존재의 소리가 들린다. 작가는 자연의 소리, 그를 에워싸는 사소한 물질들과 사물들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것은 마치 프루스트가 상실된 아담의 언어를 되살려 사물과 소통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예술 언어를 통하여 주변 사물들을 드러나게 하고 그것의 고정된 의미를 해방하여 자유롭게 하는 일일 것이다. 전시는 지금껏 보여온 탄탄하고 독자적인 조형언어와 시대정신을 담은 작가의 사유가 보다 넓어진 스펙트럼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에 주목한다.
글│강주연 GalleryJJ Director
전시제목서용선의 생각: 가루개 프로젝트
전시기간2021.03.12(금) - 2021.04.24(토)
참여작가
서용선
관람시간11:00am - 07:00pm
휴관일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JJ GALLERY JJ (서울 강남구 논현로 745 (논현동) )
연락처02-322-3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