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소리 내는 방식’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보이는 방식’으로 소리 내는 것도 없다.”
Nothing looks the way it sounds. And nothing sounds the way it looks.
- 크리스티나 쿠비쉬(Christina Kubisch) -
빗소리, 바람소리, 모닥불 소리, 속삭이는 소리, 쓰다듬는 소리… 청각을 중심으로 공감각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며 ‘ASMR(자율감각쾌락반응)’이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일상의 환경소음을 트리거로 하는 감각적 경험이다. 형체도 없이 주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이즈는 우리를 문득 낯선 경험으로 데려갈 수 있다.
갤러리JJ는 소리를 시각화하는 사운드설치(Sound Installation) 작업으로 잘 알려진 김영섭의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지금껏 김영섭 작가가 갤러리가 아닌 미술관에서 수많은 전시를 해온 소위 미술관급 작가인 점을 감안하거나, 갤러리JJ 공간에서의 첫 사운드 관련 전시라는 면에서도 이번 <케이블도자기 그리고 소리 Ⅱ> 전시는 새롭다. ‘케이블도자기 그리고 소리’ 작업은 과거 2006년 독일을 시작으로 파리와 빈, 룩셈부르크, 토론토 그리고 2007년 서울에서 한차례씩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기존 작업과 비교해 보았을 때 최신 전자 장비로 녹음된 사운드가 더 첨가되었고, 시각적으로도 특히 다양하고 풍부해진 색감과 형태들이 불러일으키는 인공적 매끄러움이 눈길을 끈다.
김영섭은 보이지도 잘 들리지도 않는 우리 주변의 소리환경에 주목한다. 독일에서 ‘소리-시각예술(Audiovisuelle Kunst)’을 전공한 그는 1세대 사운드아티스트인 크리스티나 쿠비쉬의 지도 하에 이미지와 음악, 소음을 통해 시간과 공간, 재료들의 종합적 상호관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왔다. 주로 일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소리를 채집하여 편곡한 후 이를 시각화하는 작업으로, 그의 예술세계는 이미지와 사운드, 재료들 간의 충돌하는 상호관계 속에서 다분히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가지고 개념적으로 다양하게 읽힌다.
지난 작업들을 돌아보면, 무의미하게 도시를 지배하는 노이즈는
에서 하나의 권력적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꿈에 대한 인터뷰 음성인 는 사회제도와 관습이 만든 획일성을 드러낸다. 일상을 지배하지만 형체 없이 존재하는 일상의 소리들을 시각화시킨 <정원에 대한 새로운 기억>, 현대인의 욕망을 마우스의 클릭소리와 결합시킨 , 도시의 삶을 사로잡는 수많은 정보와 광고들의 거대한 웅얼거림 <숲2007>. 이쯤 되면 김영섭 예술세계의 큰 그림이 그려진다. 그것은 현대 도시사회와 문화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잉여적 소리와 소음들을 공간을 지배하는 방식이나 사회문화적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메타포로 차용하여 타성에 젖은 우리 삶의 현재 생태를 말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김영섭의 작업은 시각과 청각이 함께 시너지를 발휘하는 확장된 감각 작용과 함께 이렇게 우리의 인식체계에 깊이 관여하여 개념적 의식의 장이 열리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나의 작업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습이나 제도, 정보가 우리의 인식이나 정서에 어떠한 형태로 작용하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현대사회 속에서 제공되는 그것들은 우리에게 편안함이나 익숙함을 제공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의적 혹은 타의적인 어떤 강요가 스며있다. … 특히 스쳐가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현대사회의 소리들조차도 관습 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김영섭 작가노트-
그는 소리와 설치를 병행하는 사운드인스톨레이션 형식을 구현하면서, 사운드아트와 시각예술 사이의 균형을 잡고 있다. 돌이켜보면, 소리(음악)가 예술의 매개체가 된 것이 미래주의 선언문이나 뒤샹의 개념적인 사운드작업을 선두로 이미 지난 세기 초에 일어난 일이다. 이후 개념주의의 성행과 함께 도약했으며 특히 청각을 시각으로 나타내는 Sound Visualization의 다양한 시도는 미디어아트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발전되어 온 분야이다. 예술에서의 감각성은 ‘이론적 감각들인 시각과 청각’(헤겔)이며 이 두 감각만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는 관념론적 사고 하에서 이들의 결합은 기대되는 것이었다. 예술과 기술의 만남은 미디어아트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김영섭의 시청각 작업은 기술적인 현란함보다 사운드와 시각 이미지와의 일치와 불일치를 통한 새로운 해석과 의미 산출에 좀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미지 소리 오브제_ 일상과 예술의 접점에서
이번 전시 역시 주변에서 끊임없이 흘러 나오지만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않는 노이즈들을 선택 채집하여 이를 문맥에 맞게 가공한 후 재생하여 구체적인 시각 오브제로 보여준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다수의 도자기 형태의 오브제들이 보이고, 이들 오브제를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반복’과 ‘재생’에 의거한 미니멀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청각 환경에서 일종의 소리 오브제로 여겨지는, 케이블을 돌돌 말아 올려 만든 케이블도자기에서 들리는 사운드는 냉장고 등의 생활용품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음들을 녹음하여 오채질굿(농악 가락의 한 종류이자 사물놀이 가락)의 길게 늘인 박자로 재구성한 소리이다. 이 음향은 이번 전시장의 공간에 맞게 2채널 서라운드로 제공되며 동시에 중첩되어 울린다. 전시에는 작가가 소리를 이미지로 표현하여 만든 드로잉과 악보도 포함된다.
지속적으로 느린 템포의 알 수 없는 아날로그적 사운드, 이와 맞지 않게 매끈거리며 시선을 유혹하는 오브제들, 말끔한 디지털에 최적화된 우리 감성은 그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계속되는 보기와 듣기가 교차하며 이끌어내는 우리의 인식, 기억, 시간과 공간은 어디를 향하는가? 이 환경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가 선택한 도자기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오브제의 질료인 케이블과의 묘한 관계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케이블은 소리를 전달하고 충전할 때 사용하는 등 평범한 일상용품이지만 여기서 도자기의 형태를 부여 받는 순간 작품으로 기능하게 된다. 재현 이미지로 제시된 도자기 형상 또한 마찬가지로, 도자기는 예전에 쓰임새 있는 일상 생활용품이었다. 저장용품, 운반용품, 난방용품 등 12가지 용도가 도자기 혹은 소위 항아리라는 물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능은 오늘날 기술의 발전에 따라 다른 손쉬운 제품들로 대체되고 대신 도자기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놓이는 예술품, 관조의 대상이 되었다.
사운드의 음원을 제공한 PC나 냉장고, 전기밥솥, 커피포트 등이 바로 도자기의 옛 기능을 대신하는 사물들이며, 이 사운드의 기본 박자로 쓰인 농악 가락은 예전에는 길거리 등 일상에서 행해지는 서민 음악이었지만 현대에 와서 무대 음악이 되었다.
많은 것들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되고 우리는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 주류와 비주류, 잉여 같은 문제들… 작업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이처럼 일상과 예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고 이러한 뜻밖의 어우러짐은 새로운 가치로의 전이와 의미를 형성한다.
질료, 징후
주로 스피커와 스피커케이블, 그리고 직접 채집한 소리를 재료로 하는 그의 작업에서 스피커 설치 작업을 제외하고는 케이블은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작가는 선을 감추지 않고 아예 드러내어 개념적으로 활용한다. 이번 전시에서 케이블은 소리를 전달하는 실질적 기능의 매체일 뿐만 아니라 형상을 구성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에서 종종 스피커 선은 사운드를 담는 그릇이나 화분, 도자기 등 재현적 성격의 오브제로 변신한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도자기로 보고 있는 오브제는 실제 도자기가 아니라 우리 관념 속에서 도자기라고 알고 있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배반은 우리의 관심을 어쩔 수 없이 눈 앞에 놓인 색색의 케이블로 향하게 한다. 케이블이란 사물은 산업과 통신 발달이 가속화되는 오늘날 더욱 필수품이 되었다. 소리 오브제로서의 새로운 도자기의 질료는 흙이 아닌 이러한 케이블이다. 오브제의 색감 또한 화려하고 매끄럽게 키치(Kitsch)적 느낌을 주면서 재료 자체의 물성이 도드라져 그 실체가 합성수지, 인공 플라스틱임을 더욱 드러낸다.
이렇게 도자기에 대한 흙과 케이블의 전치는 자연의 요소보다 도처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사물들로 일상 공간이 점령당한 현실의 징후일 수 있다. 케이블오브제의 소리 역시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키워지는 인공의 소리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대량 소비 후 쉽게 버려지는 소모품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인공사운드를 생산하고 있는가. 음원이 되는 현대 일상용품을 추적해가면 역시 플라스틱과 알루미늄 등 ‘인류세 Anthropocene’가 남기는 물질들, 초과사물인 ‘하이퍼오브젝트 Hyperobjects’에 이른다. 이는 인류가 자신 있게 발전시켜온 기술문명의 이면에 대한 동시대의 질문, 우리 감각으로 틈입한 인공의 잔해에 대한 비판적 사유에 관해 시사하는 바 있다.
조작된 사운드 환경
사운드 작업에서 소리는 오브제처럼 선택되고 채집된 일상의 질료들로서, 그는 이러한 채집된 날것의 소리를 양과 흐름, 고저를 조절하는 등 약간의 조작을 거쳐 작곡하여 새로운 상황으로 바꾼다. 사물놀이 박자를 이용한 소리의 작곡 및 편곡, 악보 제작에 대한 감각은 과거 작가의 10여년간의 풍물놀이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자신이 고안한 표기법에 따라 소리를 이미지로 표현한 ‘악보’는 청각 차원의 구조적 스케치이다. 마치 작곡처럼 정확한 사운드를 만들어서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악보를 만든다는 것은 그가 정확히 소리에 관한 계획을 세우고 작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물놀이 박자는 일상용품 소리와의 조합으로 새로운 노이즈로 전환된다. 채집된 소리는 발생된 당시 상황을 담고 있는 동시에, 도자기의 형상이 개입된 현재의 문맥이 서로 작용하면서 묘한 불일치가 발생한다. 작가는 이러한 낯선 조합으로 이들이 서로 간섭하도록 모든 장치와 상황을 연출하면서 관람자를 일종의 부조리한 연극적 상황 속에 놓이게 한다. 우리의 익숙했던 감각들은 엇갈리는 시간과 공간, 보기와 듣기 사이에서 낯설게 경험되고, 일상적 공간을 부유하는 무수한 소음들, 의미로 발화되지 못하고 잠재된 틈새의 것들이 인식과 기억 사이를 오간다.
전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노출되는 사운드 환경을 일깨우며, 우리에게 사회적으로 이미 주어진 어떠한 삶의 조건을 돌아보게 한다. 획일적이며 끝없는 자기 복제에 빠진 사물들과 소리들의 난해한 결합은 곧 현대사회의 일련의 증상에 다름 아니다.
글│강주연 GalleryJJ Director 전시제목김영섭: 케이블도자기 그리고 소리Ⅱ
전시기간2020.11.13(금) - 2020.12.26(토)
참여작가
김영섭
초대일시2020년 11월 13일 금요일 05:00pm
관람시간11:00am - 07:00pm
휴관일일,월요일 휴관
장르설치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JJ GALLERY JJ (서울 강남구 논현로 745 (논현동) )
연락처02-322-3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