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시뮬라크라를 찾아서: 실재도 허구도 아닌 조문희의 반(半) 풍경
이곳은 어디인가? 조문희의 사진을 보는 자는 누구나 이 질문을 떠올릴 것이다. 사진이 탄생한 이래 180여 년 동안 우리는 사진에서 사진 밖의 무언가를 찾는데 길들여졌고, 본능적이고 즉각적으로 이미지 표면에서 대상을 암시하는 정보를 찾아 헤맨다. 지표성이라 일컬어지는 사진의 고전적 역할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는 <반풍경> 연작에서 마비된다. 이 사진들에는 대상을 지시하는 표식들이 제거되어 있다. 간판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특정한 지역성을 드러낼 고유한 식생이나 특수한 건축 양식도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금속이나 콘크리트, 벽돌로 지어진 미니멀하고 무표정한 근대식 건물이라는 것뿐 이곳이 어디임을 짐작할 수 있는 표식은 발견하기 어렵다. 힌트를 얻고 싶어 캡션을 본들 ‘야경’, ‘타운하우스’, ‘옥상’, ‘맞은 편’ 같은 일반적이고 중성적인 제목은 사진을 전통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관객의 욕망을 가로막는다.
대상을 가리키는 지표가 상실된 사진은 뿌리를 잃은 채 부유한다. 아무 곳도 아닌 것 같은 비현실성은 이곳이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혹 영화 세트인가 하는 의혹을 낳는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파스텔 톤의 바닥, 모형처럼 똑같이 줄지어 늘어선 타운하우스는 이 같은 의혹을 부추긴다. 그도 아니라면 혹시 합성일까? 하지만 건물에 비친 그림자와 원근법적 비율, 간혹 발견되는 표면의 재질감은 그런 추정이 틀렸음을 가리킨다. 적어도 이 사진의 원본은 물리적 실체임이 분명하다.
보는 이를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사진의 모호함은 실재도 허구도 아닌 붕 뜬 풍경을 연출하기 위해 작가가 피사체와 촬영 방식, 후처리를 의식적으로 주의 깊게 선택한 결과다. 작가는 서울 외곽 주변의 신도시를 돌며 대형 쇼핑몰이나 창고, 멀티플렉스, 집단주택, 카페 등을 촬영한 후 특정 장소임을 표시하는 표식들을 지워 실재도 허구도 아닌 반풍경(middle space)을 창출했다.
작업으로서 이 사진들이 지니는 매력은 익명성에 있다. 어디서 본 듯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듯도 한 풍경의 기묘함은 이곳들이 어디라도(everywhere) 가능한 동시에 아무 곳(nowhere)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 매체나 광고, 게임 등에서 보았을 수도 있고 다른 신도시에서 보았을 수도 있는 선경험한 풍경을 연출했다는 작가의 말[1]은 이들이 2020년대 한국의 시뮬라크르임을 가리킨다. 1980년대 보드리야르가 미국을 여행하며 느꼈던 하이퍼리얼이 신자유주의의 버전으로 제3세계의 외곽에 재림한 포스트 후기 자본주의의 로컬 풍광이 조문희가 찍은 비장소(nonplace)들일 것이다. “아메리카는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하이퍼리얼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마치 실현된 것처럼 체험되어온 유토피아기 때문에 하이퍼리얼이다. 이곳의 모든 것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지만, 당신을 꿈꾸고 있도록 내버려둔다”[2]는 보드리야르의 말은 원흥과 운정, 이천, 일산의 모처에도 고스란히 더 강화된 형태로 적용된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신도시 인근이라면 어디서도 볼법한 기획 도시의 풍경이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어떤 시대적 징후를 가리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진들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적 증거나 유형학적 아카이빙으로 볼 수는 없다. 정작 조문희의 <반풍경> 연작이 바라보는 지점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 혹은 ‘익명적 풍경을 사진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하는 형식적 탐구에 더 방점이 있다. 현실의 구체적 대상에서 출발하되 특정성을 지운 풍경은 일차적으로 쇼핑몰이나 멀티플렉스 같은 피사체의 특수성에서 출발한다. 쇼핑몰은 철저히 내부지향적 건축이다. 고객의 눈은 건물 내부의 상품을 향해야 하는 것이지 외부로 흩어지면 안 된다. 그렇기에 이런 건물들은 쇼핑 몰입도를 방해할 수 있는 창문이나 외벽 장식을 최소화한 밋밋한 외관을 가진다. 불필요한 부가물이 없는 평평한 표면과 단순한 직사각형의 윤곽은 그 자체로 통속적이고 기능적이며 불특정하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익명적인 소재는 작가의 연출에 의해 모호함이 한층 가중된다. 기실 피사체에 가한 사진적 가공이 <반풍경> 연작의 핵심이자 사진적 차별성이다. 이 지점에서 조문희의 <반풍경> 연작은 토마스 루프의
(1987, 1991) 연작과 갈라진다. 작가의 스튜디오가 있던 뒤셀도르프 인근의 1950~70년대에 지어진 평범한 건물들을 찍은 는 피사체나 접근 태도 면에서 조문희와 겹치는 면이 있다. 건물이 전면에 등장하고, 특정 시공간의 지역성(locality)을 드러내면서도 보편성(placelessness)을 강조하며,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지물을 지우거나, 데드팬(deadpan)적인 톤과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사진의 방점이 사회적 조사가 아니라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측면에 있는 점 등이 유사점으로 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마치 초상을 찍듯 건물의 전체 윤곽이 드러나게 사진을 찍는 루프와 달리 조문희는 건물의 원근감을 훨씬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해 사진의 실재성을 축소한다. 그녀의 사진 속 건물들은 3차원적 원근감이 최소화되도록 근접 촬영된 경우가 많고, 대체로 건물의 일부를 잘라내어 평면성이 도드라진다. 크로핑되어 파편화되고 납작해진 건물은 실제 시공간과의 접속이 끊어져 실재와 허구의 중간에서 떠도는 이미지가 된다. 더욱이 조문희의 경우 원본 사진의 일부를 지워내는 후처리가 사진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이다. 루프의 경우 사진이 실제 풍경을 찍었다는 다큐멘터리적 인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리터치가 들어간다면, 조문희의 사진에서 리터치는 훨씬 적극적으로 이미지의 허구성을 강화한다. “가능한 한 최소로, 허나 필요하다면 최대한 손댄다”는 루프의 원칙은 조문희에게 훨씬 잘 적용되는 문구일 것이다. 카페 마당 나무의 전구를 지우고, 이케아 건물의 간판을 지우며, 타운하우스의 창문과 화분을 지운 조문희의 풍경은 실재와의 연결을 약화시켜 부유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하이퍼리얼 시대의 표상을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강화한다. 본질적으로 표면일 뿐인 사진 이미지는 이제 재현의 환영에서 가일층 멀어지지만 실재와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는다. 완벽한 CG로 나아가지 않고 실사의 변형에 머무는 이미지의 모호함은 물리적 실체이나 다른 한편 초자본주의의 환영이기도 한 우리 시대 흔한 쇼핑몰의 정체이기도 할 것이다. “진짜가 아닌 것의 세계적 중심”[3]을 보드리야르가 캘리포니아에서 찾았다면, 30여 년 후 한국판 시뮬라시옹은 조문희가 찍은 경기도 외곽의 익명 풍경에 기거할지도 모르겠다. 진짜도 가짜도 아닌, 실재도 허구도 아닌 중간 상태가 오늘날 시대의 본질이요 사진 이미지 일반의 실체니까.
■ 문혜진 미술평론가
[1] 조문희 작가 노트, 2020.
[2] 장 보드리야르(주은우 역), 『아메리카』 (서울: 산책자, 2009), 58쪽.
[3] 위의 책, 190쪽 전시제목조문희: Middle Landscape 반풍경
전시기간2020.02.13(목) - 2020.03.25(수)
참여작가
조문희
초대일시2020년 02월 13일 금요일 06:00pm
관람시간월-금요일 09:00am - 06:30pm
토요일 11:00am - 06:00pm
휴관일일요일, 공휴일
장르사진
관람료무료
장소송은 아트큐브 SongEun ArtCube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421 (대치동, 삼탄빌딩) )
연락처02.3448.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