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상호관계의 바다에 휩싸여 놀라울 정도로 적절하게 새로운 틈새의 장으로 빨려 들어간다.”
– 진 시겔, 『현대미술의 변명』
갤러리JJ는 동시대미술에 있어서 과거 이미지의 자유로운 차용과 해체적 표현방식에 관심을 갖고 신건우, 이윤성 작가의 전시를 마련한다. 전시는 이들의 작업이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전통적 요소와 동시대성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해체하면서 다층적인 의미의 망을 생성함에 주목한다.
오늘날은 수많은 원천으로부터 급속도로 유입되는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이분법적 경계가 모호해지고 문화적 혼종화가 한층 가속화되고 있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는 출처가 불투명한 글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다원적인 공간으로서 문화의 수많은 핵심들을 차용하여 만들어진다.’ 신화와 역사 등으로부터 불러낸 재현적 요소를 작품에 끌어들이는 신건우와 이윤성의 작업은 기존의 텍스트를 새로운 맥락에서 재사용하면서 차용과 몽타주, 병치와 전위의 전략이 두드러진다. 서로 다른 맥락의 이미지나 사물, 양식을 병치 혹은 중첩시키는데, 이렇게 시공을 넘나드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겹침은 서로 간의 개입으로 인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독해된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를 전후하여 추상미술에 의해 폐기되었던 형상성의 부활과 함께 과거의 미술과 대중매체로부터 이미지를 끌어다 쓰는 ‘차용’ 전략이 빈번해졌다. 당시의 정치,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만연했던 노스탤지어는 미술에서 내용이든 양식이든 모든 역사적 유산을 차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종종 과거의 이야기를 취하여 서사로서 불연속적인 동시에 현재와 관련 있게 다루어졌다. 작가 엔조 쿠치의 경우 이러한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위기로 가득 찬 세계에서 “매달려있을 만한” 견고한 어떤 것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건우는 전통적인 서술방식으로 통합되지 않는 개별 이미지들을 섞어놓으며 이를 회화와 조각이 겹치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몰고 간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의 이미지로부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혹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경계를 유희하면서, 이를 평면과 부조, 입체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구현한다. 통일성이 결여된 부조리한 장면은 현대생활의 혼란스러운 관계에 대한 진술이자 모순이 가득한 세상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은유이다. 이윤성의 작업은 서양고전과 만화라는 전혀 다른 문맥을 참조하여 하나의 회화적 표면에서 교차시킴으로써 대중문화의 정서와 순수회화의 형식을 결합한 복합적인 양상으로 특성화된다. 그는 대상이 되는 이미지 자체가 가진 힘과 역사에 주목하여 이를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적 상상력과 표현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평면과 부조, 조각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되며, 신건우의 신작과 이윤성의 에로스와의 사랑을 테마로 하는 프시케 시리즈를 새로 선보인다. 창의적이고 특별한 것은 기존의 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라기 보다는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을 다르게 바라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전시를 통해 동시대적 예술 어휘를 가늠하는 동시에, 신화적 상상력이 주는 즐거움과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으로 새롭게 인식되는 세계의 재발견을 기대한다.
“새로운 질서의 탄생,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 피터 버크, 『문화 혼종성』
/Testimony
“나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은 스스로를 과장하고 왜곡하면서 이미 존재했으나 인식되지 못했던 내러티브 위에 무중력의 상태로 부유한다.” –신건우의 작가노트
하나의 화면 속에 알 듯 모를 듯한 인물들과 특정 사건들이 뒤섞여 등장하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은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파편적이고 찢어진 틈을 비집고 불쑥 솟아나오기도 하는 이미지들은 들여다 보면 동서양의 종교와 신화, 고전작품, 현대사회의 장면들로서 서로 전혀 연관이 없어 보여 꿈처럼 비현실적이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가 경험하고 인식했던 기억들의 이미지를 조합하고 현실의 모티브로 재-이미지화한 것으로, 이는 무의식 속에 놓여있던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나 타자와 서로 다른 인식의 간극을 발견하고 이것을 의식의 전면으로 다시 끌어올리는 일이다. 이때 예술적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자신이 관심 많았던 문화와 역사 이미지들로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떠오르게 된다.
다양한 역사적 영향과 참조를 되살려내는데 있어서 그가 불러낸 과거는 피에타 도상에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불교의 사천왕 그리고 현실의 작가와 친구까지 망라한다. 이렇게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온 서로 뒤엉킨 이질적 형상들은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알레고리는 가장 확고한 사실주의를 가장 초현실주의적 바로크 양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가 무의식 속에서 건져 올린 알레고리적 도상들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다른 의미로 교체되며,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통해 다의적 층을 가지게 된다. 의식의 전면으로 끌어올려진 사소하게 간과되었던 미시적인 일들이나 희미한 흔적으로나마 인식의 틈새에서 부유하던 수수께끼 같은 개별 이미지들은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실재를 증언하는 이미지로 남는다.
익숙하던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 불합리하고 생경한 세계와 대면할 때의 긴장감과 당혹감이 그로테스크로, 16세기 그로테스크를 지칭하던 또 다른 표현은 ‘화가의 꿈(sogni dei pittori)’이었다.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고 꿈 같은 비현실적 공간을 추구하는 주체가 화가,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것인가. 비평가 볼프강 카이저는 이러한 체험의 세계에서는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진실인지 숙고하는 일도 무용지물이라고 말한다. 작품 속 형상들은 작가 특유의 매체적 특성과 결합되어 묵직한 양감을 가지고 마치 현실세계로 한발 나올 듯 견고한 형태로 다가오지만 오히려 박제된 듯한 정적인 긴장감으로 인해 더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부조리하고 다의적인 장면들은 그래서 오히려 더 불가하고 모호한 이 세상의 모습과 닮았는지 모른다.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데 적합한 매체라면 가리지 않고 선택하고 섞는다. 기억 속 상황의 배경이나 주변에 남아있는 분위기 표현은 주로 평면으로 작업하는데, 알루미늄 판 위에 처음 그린 이미지를 긁어내고 위에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흔적들, 겹겹의 층을 남긴다. 그의 독창적인 ‘페인팅-부조’ 스타일은 회화와 조각의 요소를 모두 가지는데, 그는 이러한 부조 형식이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간극 즉 현실과 이상, 허구와 실재, 신과 인간세계의 간극 같은 경계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 이미지들의 병치와 전위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간과하고 있던, 미처 보이지 않던 작은 틈새들을 노출시키면서 삶과 존재를 이야기한다. 신건우의 작업에는 문화적 다중성, 시간적 다중성, 가속화되는 세계의 불평등 같은 동시대성의 광범위한 조건들이 들어있다.
/Nu
“토르소, 그냥 조각난 무엇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상상이 되고 설명이 된다. 파괴되고 훼손된 것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윤성과의 인터뷰
작품 <토르소>의 비너스를 비롯하여 다나에, 헬리오스, 프시케 등의 작품 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윤성의 작품에서 베이스를 이루는 것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자 서양미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도상들이다. 이윤성은 대상이 되는 이미지 자체가 가진 힘과 역사에 주목한다. 그의 작품 역시 많은 내러티브가 들어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작가는 자신이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화나 고전 그 자체에는 이미 이야기가 충분히 내포되어 있으며, 현대의 이야기는 과거의 무한반복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작 관객은 고전적 이미지가 아닌, 휘몰아치는 분위기와 달콤한 색상 속에 과장되게 귀엽고 환희에 찬 표정의 미소녀와 마주한다. 이윤성의 회화 작업은 한눈에 대중 만화를 연상시키고 또한 그 임팩트가 강하다. 그의 작업은 고전을 소재로 이러한 미소녀 캐릭터 및 면 분할, 검은 윤곽선, 평면성이 두드러지는 납작한 만화책의 전형적 형식을 적용하지만 가까이 보면 붓 자국이 살아있는 유화이다. 프레임 또한 만화 컷 형식으로 결합과 분리가 가능한 전체 이미지와 각각 독립적인 개별 작품들로 이루어진다.
은 다나에 시리즈 중 독립적인 부분작품이며, 는 태양신 헬리오스를 중심으로 각각 미소녀로 치환된 12 별자리의 개별 캔버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조디악> 시리즈에 속한다. 그의 작업 특성은 남자를 포함한 고전 속의 모든 대상이 만화적 캐릭터의 미소녀로 치환된 새로운 스타일의 도상, 그리고 이미지가 제시되는 새로운 형식으로서 만화 컷 분할로 변형된 캔버스로 각각 ‘Nu-Type’과 ‘Nu-Frame’이라는 개념으로 고찰된 바 있다. ‘새로움’을 뜻하는 ‘Nu’는 다중적 의미로 쓰였으며, 그 중 불어의 뜻이 ‘누드’임은 이윤성의 작품이 일정부분 여성 누드화의 맥락임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현대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미술과 일상 간의 경계는 무너지고 고급미술과 대중미술 간의 교류는 빈번해졌다. 이러한 만화적 표현방식으로 과감하게 재해석하는 감각은 작가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만화를 친숙한 이미지로 유희할 수 있는 문화적 감수성이 작용함을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었다. 이윤성 작업의 혼성적 성격은 역설적으로 기존의 전형성 및 상용화된 표현들을 극대화시키고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온다. 회화의 아날로그적 방식을 고수하고 만화 미소녀의 전형적 특징과 작법을 빌려오고, 신과 인간의 근원적 이야기, 헬리오스는 태양신의 상징인 빛나는 가시관을 쓰고 있어야 하고 빛을 상징하는 황금색, 사랑을 테마로 하는 프시케는 분홍색이라는 상용적 표현을 적극 참조한다.
그가 다루는 신화들은 미술사 속 화가들이 즐겨 다루었다. 다나에는 티치아노를 비롯하여 렘브란트, 클림트 등 르네상스부터 근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비스듬하게 기대 누운 자세의 관능적인 여성누드라는 전형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같은 주제지만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어 왔다. 역사 속 다나에는 이제 이윤성의 다나에까지 이르렀고, 만화 스타일의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미소녀로 재해석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 순수회화와 대중문화, 대상화되는 여성 신체에 관한 담론 등에서 오늘날의 문화 혼종성 Hybridity의 시대 코드가 자연스럽게 반영된다. 이제 시간은 서양의 전통적 누드화와 만화 속 미소녀의 간격만큼이나 지나왔다. 작품은 신디 셔먼의 분장처럼 한편으로 만화 속에서 오늘날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미소녀들의 이미지가 갖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재구성하여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의 해체를 성취하고 있다.
생각보다 고전은 우리 가까이 산재해 있고 현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오늘날 도처에서 쓰이고 있는 상징과 이미지들의 근원과 변화를 탐구하고 싶어한다. 바쁜 현대생활에서 새로움에 집착하는 동안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들. 작가는 우리에게 그 잃어버린 이야기의 한 조각을 찾아준다.
- 갤러리JJ 대표 강주연 전시제목Nu Defiance전
전시기간2019.08.30(금) - 2019.10.12(토)
참여작가
신건우, 이윤성
초대일시2019년 08월 30일 금요일 06:00pm
관람시간11:00am - 07:00pm, 주말 12:00am - 06:00pm
휴관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JJ Gallery JJ (서울 강남구 논현로 745 (논현동, biesse) 앙드레김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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