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바다와 산의 모습이 펼쳐진다. 투명하고 맑은 바다와 백사장이다. 붉은 노을이 하늘과 바다를 휘몰아치는 바다의 모습이 오롯하다. 저 멀리 두터운 능선이 중첩되는 첩첩산중이 있다. 농익은 쪽빛으로 물들어가는 밤바다의 풍경이 있다...
하연수 작가의 풍경 그림을 감상하면 문득 그 세계로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림의 이면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세계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풍경의 표현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가정을 하게 된다. 상상은 언제나 추측을 앞서고, 가정은 분석을 낳는다. 그림이 말을 걸어올 때, 비평가는 작가의 의도와 전략이 궁금해진다.
하연수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고, 그림의 대상, 기법 등은 동양화 전통 중 핵심을 계승하고 있다. 먼저 그리는 대상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가 천착하는 주제인 바다와 꽃은 자연의 일부이다. 이것은 자연을 제일의 관찰 대상으로 삼았던 동양화의 관점을 일정 부분 승계하고 있다. 두 번째는 동양화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작가는 대상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 외면의 표현보다는 자아의 투영을 우선한다. 일례로 정물화를 대하는 서양화와 동양화의 관점을 비교해보자. 네덜란드 정물화와 고흐, 마네 등 인상주의 작가들의 정물 표현을 살펴보면, 꽃의 외양을 표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꽃의 강렬한 색채 대비와 질감 표현, 사실적인 묘사는 직선 화법으로 연출되어 있다. 나아가 꽃이라는 대상은 다산과 풍요라는 알레고리로 형상화됐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인상주의 화풍의 꽃에 매료되는 원인은 바로 이런 숨겨진 거대 개념과 카리스마에서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동양화의 표현은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중심과 주변의 강약 조절과, 작가의 주관성이 묻어나면서도 조화로운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강렬한 첫인상보다는 은은히 스며드는 힘이 더 지긋하다. 작가가 그림의 구도 중심과 주변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동양화 기법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너머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야 할 것이다.
손을 뻗어 꽃잎에 손가락이 닿으면, 놀란 꽃잎은 움츠러든다. 마음은 단호하게 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거절당한 손끝에는 부드러운 꽃잎의 감촉만이 남아 있다. 화려한 세계 이면의 문이 열리면 초대받게 될, 또 다른 얼굴과의 영원한 이별이다.
하연수 작가가 정원에 핀 꽃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시절부터이다. 작가로 성장하면서 꽃 그림은 전시의 궤적과 함께 종횡으로 팽창하고 발전했다. 다채로운 꽃이 전시에 피어났고, 다양한 기법이 묘사의 실험을 거듭했다. 거처를 강릉으로 옮긴 후 부터는 꽃에서 바다로, 풍경으로 시선이 확장됐다. 그러나 작업의 씨앗은 꽃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흐름은 유효할 것이다. 보다 본격적으로 꽃의 구도와 형태, 묘사의 기법을 살펴보자.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대담한 구도와 섬세한 기법의 대비이다. 하연수의 꽃은 결코 수줍지 않다. 꽃술을 구도 중심의 하이라이트로 두고,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럼에도 꽃의 모습이 노골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모종의 미스터리다. 만약 어떤 사람의 침실을 엿보게 되었는데도 이면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연수의 꽃은 얼굴과 중앙을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도도하고 신비롭다. 그런가하면 꽃잎을 묘사한 섬세함은 꽃이라는 물성의 숭고함과 신비를 표현하고 있다. 시간을 들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 한 장 한 장의 표현이 만개한다. 감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각에서 촉각으로의 감각의 전이가 이어진다. 섬세하고 화려한 표현력이 그림의 이면을 들추어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것이 하연수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그 이면의 세계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감각 요소이다.
하연수의 작업은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강릉 바다를 매일 바라보고, 정원에서 바라본 꽃의 형태를 관찰하는 데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풍경의 장대함과 꽃의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림 묘사를 위한 관찰에 집중했지만, 매일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보니 조금씩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득 그 양상이 사람과도 닮아있다는데 생각이 미치게 됐다. 겉모습만으로는 내면을 파악할 수 없지만, 계속 내통해가며 내부에 숨겨져 있던 타인의 세계가 발견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작가는 매일의 풍경을 다른 시선으로 발견하고 그 차이점을 그림으로 포착했다. 나아가 그리는 대상을 통해 매일의 작가의 감정을 투영하고, 자신과 주변인의 마음을 그 속에서 발견했다. 관객이 그림 속에 들어가서 작가와 관객의 몰아일체를 성립하는 기법은 서양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화에 소속된 기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보다는 동시대 예술가의 개성과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동시대 미술은 장르와 이즘(ism)을 넘어, 예술가 개인의 발언에 집중한다. 하연수의 그림은 주변의 자연과 풍경을 밀도 있게 관찰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매일 다른 관점과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현대미술의 핵심을 회복한다.
소위 '전통 장르' 예술을 전공하는 작가들의 고민은, 어떻게 전통 장르를 현대화하고 나아가 작가들의 개성을 표출하는 가의 문제에 집중될 것이다. 동시대는 예술가에게 발언과 표출의 자유를 부여하였지만, 전통 장르에 대한 교육과 대중의 태도에는 아직까지 간극이 존재한다. 때문에 예술가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동양화라는 전통적인 장르를 계승하면서 예술가의 마음과 주장을 표출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하연수 작가의 경우는 색채에 대한 남다른 고민을 지속해왔다. 하연수 작가는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인 석채를 사용하고, 이 재료가 주는 독특한 느낌이 작업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앞서 서양화와 동양화의 구도와 응시를 통해 비교했던 것처럼, 유화나 아크릴, 과슈, 수채화 등의 서양화 재료와 작가가 사용한 석채(石彩)의 특성을 비교해본다면, 마티에르가 주는 두텁고 강렬한 느낌은 표면에 머무르지만, 석채가 자아내는 색채의 깊이는 대상의 본질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기까지는 먹 위에 수십 차례 덧칠하며 밀도를 통해 제 색을 내는 질료의 특성과 기법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동양화 색채에 대한 관습에 대해 동시대 예술가의 감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전통적으로 동양화의 색채는 오방색에 기원을 두고 있고, 음양오행의 원리를 색채 의식에 적용하였다. 색채마다 감정이 실린다는 이론은 여기서 근원하는데, 예를 들어 적색은 분노와 공포, 정열, 강렬함을 상징하는 반면, 푸른색은 냉정, 이상, 평화, 순수를 상징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색채 상징체계가 현대사회에 유효한지에 대한 의심을 품는다. 과연 작가의 꽃과 바다 풍경을 담은 그림의 색채는 전통적인 색채의식에 기원했다기보다는 작가의 미감과 대상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었다.
올해는 작가는 서울에서 강릉으로 거처를 옮긴지 12년째 되는 해이다. 강릉의 바다는 작가의 일상에 스며들었고, 바다 풍경에서 받은 감흥은 자연스레 작업의 대상으로 전환됐다. 일상에서 매일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 스치는 바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외부 상황과 바라보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바다의 풍경은 매일의 날씨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낮의 바다, 밤의 바다, 파도가 칠 때의 바다, 잔잔한 바다, 발끝으로 차오르는 물결로 밀려오는 바다를 관찰하며, 작가는 자연이 주는 다른 느낌과 이에 다른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찾으려고 했다. 이것은 작가가 주변의 대상을 관찰하며 자아와 인간사를 투영하여 그려냈던 원리와 같지만, 그동안 작가가 연구해왔던 색채에 대한 감각이 밀도를 더해 집약됐다. 새벽의 투명한 바다와 밤바다의 깊은 어둠을 바라보며, 색채의 풍요 속에 빠져든다. 매일의 다른 눈으로 보는 풍경 속에서 작가와 관객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 조숙현
전시제목하연수: 매일의 다른 눈으로 보는 풍경
전시기간2019.08.14(수) - 2019.09.11(수)
참여작가
하연수
초대일시2019년 08월 14일 수요일 05:00pm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월요일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보혜미안 갤러리 BOHYEMIAHN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 314 (이태원동) )
연락처02.79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