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맛은 맑은 즐거움에 있다.
- 우 홍 량 吳 洪 亮
소동파는 자신의 시에서 “가는 비에 바람이 비껴 부니 소한이라, 옅은 연기와 드문드문 서 있는 버드나무가 비 그친 강변에 아름답고, 물은 흘러 청락에서 회하로 들어가니 점점 느려진다. 눈가루같은 하얀 거품이 찻잔에 떠 있는데, 풀의 새싹과 죽순으로 춘반을 채우니, 사람 사는 맛은 맑은 즐거움에 있다.” 고 했다. 한국화가 허달재는 광주 무등산 다원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만든 녹차 ‘춘설’은 그의 조부이신 허백련 선생의 ‘춘설헌’에서 유래한 것이다. 차와 그림의 정수는 동양인의 인식에서 아주 흡사한 것이다. 허달재의 작품을 보는 것은 마치 차에서 느끼는 ‘맑은 즐거움’의 희열 같은 것이다.
허달재는 내가 만나본 중에 가장 침착한 사람이다. 이’침착’함은 술을 마시거나, 차를 마실 때 사람을 대하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그가 술이나 차를 마실 때 보면 겉으로는 구별할 수 없으나 태도가 평화롭고 끝을 알 수 없다. 그가 일할 때 항상 띠고 있는 상냥한 표정이나 이따금씩 들리는 가볍지만 두터운 웃음소리에서 어떤 일이 닥쳐도 급할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그의 세계에서는 마치 모든 것이 일정한 속도로 평온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어떤 일일지라도 모두 술 마시며 차를 즐기는 가운데 미소로써 완성되는 듯하다. 이러한 면은 오늘날 심지어는 스톱워치에 따라 살아야 하는 번잡하고 어수선한 세계 속에 있는 우리에게 무척 진귀해 보인다.
중국식으로 하면 그는 1952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나이 60세로 환갑이다. 중국의 공자 말씀에 “육십에 이순(耳順)”이라 했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들어선 허달재는 아마도 “성입심통, 무소위역, 지지지지, 불사이득야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알게 되므로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도리를 아는 데 이르게 되면 생각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의 경지에 진실로 도달했는지 모른다.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기 전에 허달재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한다고 생각해, 그의 ‘침착함’이 어디에서 온것인지 따라가보자. 이는 또한 중국 관중이 한 한국화가의 예술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알아두어야할 점이기도 하다.
연구하며 회고하다.
허달재는 현재 한국의 유명한 예술가일뿐 아니라 의재 문화 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한국의 예향으로 일컬어지는 광주에서 태어나 조선 시대 남종 문인화가 허련 (1808 ~ 1893)과 허백련(1896-1977)의 남종화 원류를 계승해 점차 자기의 화풍을 형성했다. 허달재는 조부 허백련에게서 직접 배웠다. 허백련은 지난 세기 한국에서 중국의 ‘제백석’과 같은 대가다. 그는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법정학을 공부했으나 후에 그림을 전공했다. 도쿄에 있던 6년간 일본 남종 저명 화가인 고무로 스이운의 영향을 받아 전통 남종산수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해 1922년 제 1 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그의 산수화 작품이 수상하면서 관중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1927년 이후 전라남도 광주로 옮겨와 남종회화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 광주 무등산 다원에서 손수 재배해 전통 녹차를 만들었다. 그의 문화와 예술적 성취는 세상 사람의 주목을 끌어 국전 등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광주, 나아가서는 한국의 탁월한 예술 대가가 되었다. 광주의 '의재로’라 불리는 거리는 이 대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허백련이 작품 활동을 하고 차를 기르던 무등산에서 지은 의재미술관도 그를 기념하고 또한 그가 주장하던 동양 미술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허달재는 이처럼 자연 풍광이 준수한 광주 무등산에서 그의 예술 생애를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조부 허백련을 따라서 산수, 화조, 서예를 익히고 그의 작품을 임모하면서 전통적 사숙식 교육을 받는 한편 중국의 소동파, 예찬 심주, 동기창 등 문인화가의 작품과 미술 이론을 연구했다. 당시에 신식 미술 교육만을 받았던 데 비하면 허달재는 이 점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광주의 사숙식 교육 과정은 말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20년이 소요되는 이 과정은 10년 임모에 10년 묵사로 나뉜다. 10세에 사숙에 들어와 30세가 다 되어서야 학업을 마치고 자기 길을 찾아 출사된다는 뜻이다. 허달재의 경력을 보면 같은 시기에 전통 교육과 신식 교육을 함께 받았다. 1970년 18세 되던 때 한국미술대전에서 수상하면서 독립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고 1971년에 홍익 대학교 한국화과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전통 전수 작업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고, 조부에게서 배우는 학습은 1976년 허백련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된다. 현재 의재 미술관 소장 작품 한 폭에는 조부와 손자 두 사람의 필적이 남아 있어 이처럼 전통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 허달재는 지금도 여전히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글씨를 쓰면서 정경에 잠겨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한 후에 비로소 그리기 시작한다. 붓을 움직일 때마다 쓰는(寫) 상태를 추구한다. 창작을 대함에 있어서 현장을 스케치하는 방식보다는 마음에 기억하고 다듬어서 백자를 마주하는데 이로써 남종화가 그에게 미친 영향을 일견 할 수 있다. 1978년 허달재는 광주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산수, 사군자 등 전통 회화 위주였다. 1980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어 꽤 호평을 받았으나 광주에서 서울까지 영향력을 넓힌 지방 화가로서의 성공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20세기에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예술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해 시야를 더 넓히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1985년에서 1989년까지 허달재가 미국 뉴욕에 사는 동안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한국 문화 과목을 강의하고 개인전을 두 번 열었다. 이 기간에 그의 작품은 더욱 단순화되기 시작한다. ‘운(韻)’ 시리즈 작품은 현대미술과 남종화가 서로 융합하는 상태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현대미술, 특히 장치, 멀티미디어 등의 미술 형식을 많이 접했으나 서양의 언어 환경 속에서 그가 원했던 것을 찾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동양 미술의 뿌리가 무궁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허달재는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창작을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미국, 프랑스, 호주, 일본 등 외국 미술 전시회의 초청을 받는다. 이 기간에 창작한 서예적 분위기가 강한 ‘문자' 시리즈 작품이 관심을 끌었으며 1996년 프랑스 피에르 가르뎅 (Pierre Cardin) 미술관으로 건너갔는데 초청을 받아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92 년 한•중 두 나라가 국교를 맺자 허달재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상상하던 남종회화의 발상지가 어떤 모습인지 간절히 보고 싶어서였다. 그의 조부 허백련이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 간 적이 있어서 허달재는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서 중국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때 여행에서 그는 황산과 서안 비림에 갔다. 이때부터 중국 미술계와 접촉하여 교류를 시작했다.
2000년대 전후로 허달재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 미술의 표현 방식을 서로 융합해 기호적인 형상과 구성 수단의 활용 형식과 분위기의 결합으로 추상성과 동양 정신에 대해 탐구한다. 2000년에 창작한 ‘성외성(聲外聲)’시리즈가 이 시기 그의 작품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
2003년부터 허달재는 미술 창작의 중점을 전통 복귀에 두고 매화, 포도 등의 소재를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전통 회화의 틀 속에서 현대적으로 형태를 전환하는 문제를 어떻게 완성해야 할까에 관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는 서양미술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지나치게 맹렬한 기세로 쏟아져 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과도기나 소화 과정 없이 이미 서양화되고 있다. 20세기가 서양의 세기라면 이런 단일 사유의 발전이 지나치게 강해진 것은 불균형적이라고 본다. 동양의 사유 또한 마찬가지로 인류의 위대한 창조인 것이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이 인류의 재능은 평형을 이루어 발전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회화 양식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이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화면에 표현될 때 우리는 전통에서 나온 것이면서 또한 현대적 사고를 갖춘 그의 작품을 보게 된다. 그는 동양 전통에서 시작해 서양을 탐구하고 다시 전통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는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고 전통의 밀밭 파수꾼 노릇을 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속 지주는 동양 철학이다. 또 허달재는 ‘새로움(新)’의 가치, 즉 작품이 전통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되고 작품에는 개인의 품격이 녹아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의 붓 아래에는 아직도 개간 가능한 밭이 많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을 작품 속에 효과적으로 융화시켰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날로 성숙해진 품격에 따른 창조적 활력이 상실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주 발전 가능성이 많다.
그림 속 의미
2008년 허달재는 중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중국 미술관에서 열었다. 이름하여 ‘정중동 고중신(靜中動 古中新)’이다. 이제 그는 북경화원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데 여전히 ‘정중동 고중신’이라 한다. 이는 자기 미술 이념에 대한 그만의 고수와 표현인 것 같다. 허달재는 동양과 서양, 정과 동, 전통적 옛것(古)과 현대적 새로운 것(新), 어떤 것이든 모두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융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체적으로 정취와 분위기를 강조한다는 느낌이 든다. 멀리서 보면 솜씨가 섬세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면 필치는 쓰는 것(寫)을 위주로 하나 형사(形似)에 구애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의 붓으로 찍은 매화의 점법(點法)이 뼈 없는 것 같은 바탕 위에 꽃잎 구조를 빼고 점 하나 또는 몇 개의 조합으로 마무리해 형상을 묘사하고 스스로 어휘를 만든다. 작품 구도는 특수하게 공간을 비워두는 방식이 가장 큰 특색이다. 그는 매화나 포도를 그릴 때 주지(主枝)로 방향성을 띤다. 원을 구성하는 데 시계 방향도 있고 시계 반대 방향도 있다. 두 포기를 표현할 때에는 서로 껴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방식으로 그림 속의 원은 화선지 면의 사각형과 대비를 이룬다. 그 사각과 원형의 모습이 중국의 양저(良渚)문화 중 옥종(玉琮)의 천원지방(天圓地方)과 같다. 작품은 허(虛)의 중요성, 소(疏)와 밀(密)의 관계, 대상을 그리는 순환 감각을 강조한다. 이것은 화론 중의 ‘백으로 흑을 대함’과 ‘음양상생’의 상태 덕분이라 해야 한다. 그의 이런 방식은 대상의 구조적 약속에서 해방시켜 그의 마음속 형상이 된다. 황빈홍은 ‘호삼각’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허달재의 작품 속에서 원형의 미를 본다.
이런 상태는 윤곽선에도 나타난다. 허달재의 선은 한결같이 획이 짧고 교차선, 심지어 직각에 가까운 교차선을 즐겨 쓴다. 이것이 이전 사람들과 다르다. 전통 회화에서 나뭇가지의 교차를 그리더라도 예각 위주로 한다. 직각이 전달하는 현대적 분위기는 그가 보여준 ‘새로움(新)’의 가치다. 이상의 두 관점에서 허달재의 작품을 보면 그는 기본 선과 형상의 정보를 빌려 원형과 교차가 구성된 삼각형의 강약을 효과적으로 운용한다. 필묵의 취미, 장식성과 구성감의 결합이 스며들어 만들어낸 정취가 그만의 독특한 언어 방식을 형성한다.
술에서 차로
앞에서 허달재가 술도 좋아하고 차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허달재 작품에 대한 인식은 술과 차로 비유할 수 있다. 술의 진함과 심취함이 동서양의 공통점이라면 니체가 말한 ‘주신’의 힘이라는 말과 “완적이 깨어있을 때가 적고 도잠은 취한 날이 많다. 백 년을 어찌 족히 보낼까? 흥이 날 때 노래 부른다”라는 정상(情狀)이 모두 심취함에 대한 예술 매력의 표현이다. 허달재 작품의 내재적 의미에는 저절로 전통적 침향(沈香)이 담겨 있다. 하지만 동양 미술이 추구하는 것은 술의 미취(微醉)뿐만 아니라 차가 가져오는 심원에 있는 것이다. 차의 정신과 선심(禪心)은 동양인 특유의 것이다. 허달재가 추구하는 것은 술에서부터 차까지, 진함(濃)에서 담백함(淡)까지의 선사(禪思)다.
그림을 어떻게 술에서부터 차로 들어가도록 할 수 있는지는 화가의 미술 창작에서 핵심이다. 이는 그림 자체를 완성할 것인가 회화를 통해 자아를 수양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후자라면 수양의 결과가 어쩌면 종백화 선생이 『중국 예술 경지의 탄생』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런 미묘한 경지의 실현, 전업 미술가 평소의 정신 함양, 천기 양성, 활발한 마음의 비약, 그리고 정신 집중으로 적조한 체험 중에 돌연 성취하는 것”일지 모른다. 허달재는 이런 수련을 잘 안다. 그는 이야기할 때 자주 ‘그림의 품격’과 ‘인품’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그가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인화 전통 중의 품격이다. 오늘 오랜만에 듣는 이 관념이 내가 개인적으로 그의 그림과 그라는 개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까닭이다. 그는 이것을 생활 중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그가 어릴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손님 다섯 명이 집에 왔는데 조부가 차를 끓여오라고 허달재에게 시켰다. 어떻게 다섯이 모두 만족하도록 할까? 그의 방법은 모든 손님을 살피고 누가 진한 차를 좋아하는지, 누가 담백한 차를 좋아하는지 짐작함으로써 차를 끓이는 시간과 분량을 조절해 모든 손님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서양의 맥도날드가 통일된 표준화 공정을 만드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것은 생활의 사소한 일이지만 일상생활이 예술 창작에 영향을 주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작품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진선미’에 관해 가식적인 것이 아니어야 하고 이론화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예술의 ‘미’란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것이고, 아름다운 것을 그려야 하는 것이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라 한다. 그는 ‘미’를 성취하는 것이 순수한 미와 그윽한 미의 결합을 찾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일부 현대예술 중의 폭력성과 잔혹성에 명확하게 반대하고, 선정성에도 반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탐미적인 것과 내면적으로 충만한 것을 표현하기를 바란다. 이런 선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달재의 작품이 사람에게서 먼 것이 아니고 사람과 가까운 것임을 쉬이 느끼도록 한다. 이런 느낌을 한국에서 답사할 때 직접 체험했다. 같은 공간에서 허달재의 작품과 백남준, 크리스털,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가치는 형식에 있는 것보다 사유에 있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 몇몇 현대 미술가에 비해 허달재 작품에는 아담하고 우아하며 완곡하고 함축적인 품격이 숨어 있다. 그의 세계적 사고방식은 균형감이 있어 깊은 술의 분위기와 청아한 차 향기 같은 현대적 동양의 의미를 보여준다. 세계는 일체화되고 있는데 반해 문화는 같지 않기 때문에 가치 있다. 허달재는 사유체계의 동양 개념을 강조하고 동양적 사유와 재료를 사용해 오늘의 예술을 만들려고 한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허달재 선생의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그의 ‘마음’의 사고를 뚜렷이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 제백석 작품을 오랫동안 전시해온 북경화원미술관에서 열리는 허달재 작품전은 현대 동양의 의미를 담은 전시가 될 것이고 두 나라 미술가들이 술과 차를 마시는 사이에 예술을 교류하는 우아하고 고귀한 모임이 될 것이다.
전시제목허달재: Movement in Tranquility,Tranquility in Movement
전시기간2019.05.20(월) - 2019.06.08(토)
참여작가
허달재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일,공휴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표갤러리 PYO GALLERY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5길 18-4 (체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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