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되고 끝나는 자리, 흙
사실주의 화풍으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해 온 원로화가 이상원 화백의 신작을 발표하는 전시이다.
이상원 화백의 작품은 한지에 먹과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기법으로써 한국화와 서양화의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지난 4년 여 기간 동안 이상원 화백은 꾸준히 사용해오던 재료에 황토를 가미하여 표현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흙은 회화의 재료로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재료라고 할 수 없다. 간혹 수묵화의 배경에 은은하게 물을 들이는 정도로 다뤄져왔다.
이상원 화백은 먹과 유화물감으로 이미지를 그린 그림 위에 고운 황토가루를 물에 섞어 물감처럼 사용하여 작품을 완결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흙은 작품의 주된 주제이자 재료로 쓰였다. 흙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생명’, ‘근원’, ‘삶의 현장’을 대변 한다고 할 수 있다.
전시에는 총 80여 점의 작품이 발표되고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100호 크기의 폐기된 타이어를 그린 28점의 작품이 전시장 세 벽면 전체를 가득 메워 설치될 예정이다. 흡사 폐기된 타이어의 무덤을 연상시키는 설치작품은 과거 눈 덮인 땅 위의 자동차 타이어 자국을 그린 ‘시간과 공간’연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바퀴는 문명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던 대표적인 발명품이며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켜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였다.
이상원 화백은 남겨진 것, 사라질 것들을 화폭에 담아왔고 이번 신작도 그러한 기조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술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폐기된 바퀴의 잔해가 흙먼지와 뒤엉킨 초상을 그려낸 것이다.
두 번째는 전쟁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그린 작품이다. 실제 한국전쟁 시기에 쓰인 철모와 군인용 배낭을 다룬 작품이다. 학도병 신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이화백은 전장의 참혹한 기억을 지녀왔고 오랜 시간이 지나 노화가가 되어서 조심스럽게 기억의 단편을 꺼내 표현하였다. 단순한 형태의 철모는 녹슨 철의 색감인 붉은 물감이 흙과 뒤엉키고 균열이 생겨 전장의 참혹함을 드러낸다. 사실적인 표현을 줄곧 이어온 이화백은 철모를 그린 작품에서 추상적인 표현으로 넘어갔다. 기억을 실어 나른 매개체인 철모는 끝내 그림 속에서 사라지고 오직 전쟁에 대한 기억과 감정의 흔적들만 남았다.
흙과 함께 그려진 나머지 대상들은 농경을 대변하는 배추와 지푸라기 더미, 예술가를 상징하는 색소폰이다. 친숙하면서도 다양한 사물들을 뒤덮은 흙으로 말미암아 작품은 마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상기하라는 메시지처럼 다가온다.
흙은 생명이 잉태되는 자리이자 마지막에 돌아가는 자리이다. 우리는 흙에 대해 근원적이면서도 친근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지구상에서 발생한 흙의 생성이나 흙을 토대로 한 생명체의 생존은 말 그대로 전장이라 표현할 만큼 혹독하고 냉엄한 과정을 거친다.
이상원 화백은 흙에 대해 골몰해 있다가 문득 흙을 입어 넣어 먹어보았다고 한다.
‘흙을 먹어보니 쓴 맛이 났다. 흙은 우리를 비롯한 생명이 나오고 돌아가는 곳이다’ 라고 말했다.
이상원 화백이 흙을 통해 표현하는 삶에 대한 해석은 이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생이 배태되기도 하고 멸절되기도 하는 현실의 거친 모습을 직시하려는 작업이다. 흙은 生은 좋은 것이고 死는 부정적인 것이라는 인간의 입장에서 내리는 가치판단과 무관한 현실을 상징한다. 엄혹한 현실이 있는 그곳이 우리의 근본자리이고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내재해 있다. 이상원 화백의 흙 작업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면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수묵과 유화, 흙으로 표현한 생에 대한 해석
이상원 화백의 작품은 흔히 천년 한지라고 불리는 닥나무로 만든 질기고 두꺼운 장지를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겹쳐 만든 종이가 밑바탕이 된다. 유화물감을 거칠고 담백한 종이에 물들이듯 맥여 넣어 표현한다.(이상원 화백은 유화 채색을 종이에 맥인다고 표현한다. 먹이다의 사투리 쯤으로 볼 수 있겠다.) 먹물도 두껍고 거친 한지 위에서 시원하게 퍼져나가는 법이 없다. 짙은 먹의 표현이든 맑은 먹의 표현이든 물을 많이 섞어 충분히 적시면서 그려주어야 한다. 질기고 강한 한지는 표현에 어려움을 겪게 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원하는 이상원 화백의 취향을 잘 받아낼 수 있는 재료이다.
한지에 먹과 기름기 있는 유화를 먹이고, 흡수시키며 원하는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담백하면서도 꼿꼿한 감성의 결과물이 탄생된다. 마치 땀자국과 얼룩으로 떡 진 작업복이나 작업화에서 느낄 수 있는 진한 삶의 정서가 흘러나온다.
이상원 화백이 이번 작품을 통해 천착한 흙의 정서와 흙에 대한 해석은 이러한 이상원 화백의 작업 스타일과 일관된 맥락이다. 흙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가능하지만, 이상원 화백에게 흙은 삶의 바탕이자 그 자체이며 결코 복합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이다. 인간의 경험과 의식 안에 담기에는 벅찰 만큼 크고 냉엄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실체인 것이다. ‘숭고’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흙을 뒤집어 쓴 채 표현된 사물은 폐기된 타이어, 군용 철모, 군용 배낭, 지푸라기 더미, 배추, 색소폰 들이다. 언뜻 서로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작품들은 각기 이전 작품들과의 연관성을 지녔다. 타이어 그림은 타이어 자국을 그렸던 <시간과 공간 연작, 1977~1999>과 연결된다. 군용 철모와 군용 배낭은 작업화이자 군용신발인 <군화 연작, 2008>과 이어진다. 향토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었던 지난 작품들에 의해 지푸라기 더미나 배추 등은 매우 자연스러운 연결성을 갖는다. ‘색소폰’은 가장 낯선 대상이다. 그러나 녹슬고 흙으로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려한 선의 미감을 드러내는 악기는 선의 아름다움만큼 한때 고운 소리를 내었음이 틀림없다. 생존에 필수적이지는 않으나 인간 정신에 꼭 필요한 예술을 상징하는 오브제이다.
이상원 화백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다루는 소재는 그의 삶과 연결된 계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스케치여행길에서 만났던 땅의 흔적, 논밭과 들판에서 느끼는 생명에 대한 외경, 문명의 발전과 이면의 폭력성을 함께 내포하는 자동차 바퀴 등등. 이러한 소재는 그의 회화에서 표현되어지는 정서와 만나서 보편적인 삶의 증언자가 된다. 그가 바라보는 삶을 색상으로 표현하면 흙의 색감이다. 삶의 모양과 내용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 안에는 모순과 고통, 극복의 의지, 소멸이 담겨있다. 작가는 엄혹한 삶의 현장을 느끼며 뜨거운 의지로 맞서고 있다. 그의 작품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팔순 중반에 다다른 나이에도 여전히 삶이라는 거대한 질문과 씨름하는 한 인간의 사투에서 비롯된다.
전시제목이상원: 歸土 귀토
전시기간2019.04.03(수) - 2019.08.31(토)
참여작가
이상원
관람시간화~일요일 10:00am - 06:00pm (5시 입장마감)
휴관일매주 월요일
장르회화
관람료성인 6,000원
초·중·고 학생 및 65세 이상 4,000원
이상원미술관 멤버십회원: 무료
장소이상원미술관 LEESANGWON MUSEUM OF ART (강원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587 )
연락처033-255-9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