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가 다룬 작업의 모티프들은 '죽음'과 매우 밀접해있거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한 경험할 수 없는 것이고, 기껏해야 타인의 죽음에 관한 경험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음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내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죽음은 단지 삶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어둡고 무서운 것이 아닌, 삶의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죽음이다. 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경계들에 대해 집중한다. 그리고 죽음을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죽음 자체를 찬미한다는 의미에서의 긍정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긍정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애착 속에는 이 세상의 온갖 비참함보다도 더욱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과 함께 삶의 다양한 부분들을 관찰하고 발견하기를 원한다.
모든 아름다움의 깊숙한 곳에는 비인간적인, 처절하고 냉혹한 무언가가 가라앉아 있어서, 그것들은 쉽게 허망한 의미들로 덧씌워진다. 나는 덧씌워진 머나먼 존재들과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것들에 집중한다. '과연 예술가로서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떤 삶 속에 살아남았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세상은 점점 냉혹해져가고, 비극은 잦아들 줄 모르고,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결코 그침이 없다. 한쪽에서는 풍족함과 청결함, 화려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불에 타는 아이들과 폭력, 물자 부족, 질병들이 있다. 지금 이곳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고, 저곳에는 죽지 않고 하루를, 혹은 일주일을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 있다. 나는 고통 받는 이들을 '난민' 혹은 '추방되고 이탈된 자'들로 규정하여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스스로를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것들과 끊어지지 않는 고통의 악순환들로 인해 병들고 나약해지는 것들, 죽음과 밀접한 것들이 가진 에너지 모두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주변을 '목격'하는 자이고, 함께 아파하는 자이고, 함께 행동하는 자이길 바란다. 우리는 결국 모두가 삶의 이방인 (Outlanders)이다. 우리는 주변을 너무 쉽게 방관하고, 어두운 진실을 대면하지 않으며, 고통의 표상들을 보기 꺼리는 자들이 된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만 회피하고 관찰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2017년에 작업했던 「더 디바인 코메디 The divine comedy: 공허한 인간들」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들 사이에서 공허해지는 인간 군상들을 현대의 지옥으로 표현했다면, 이번 전시는 타인과 공유하는 이 시대가 빚어낸 고통과 자각에 대해 더 심도 있게 표현하려 했다. 죽음에 다가가는 것을, '날개가 타는 것을 무릅쓰면서 촛불에 달려드는 나방'이라고 표현한 장켈레비치처럼,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들을 포용하고 표현하고 싶다. 그것들을 오롯이 대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서고운
'슬픔'을 감각하기 : 서고운의 그림에 대하여
화가의 욕망, 믿음의 윤리
나는 종종 화가의 욕망이 무엇인지 다른 '화가'에게 묻곤 한다. 모든 화가에게 던지는 물음은 아니다. 질문하게끔 하는 그림이 있다. 예를 들어 2차원의 화면 위에 그려진 회화적 재현 너머 작가의 삶의 궤적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때이다. 반대로 회화적 표현으로 가득 찼지만, 텅 비어 있는 평평한 화면으로 다가오는 그림에도 해당한다. 그렇다고 '화가의 욕망'에 대한 물음이 회화적 조형성에 대한 위계를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근본적인 추동에 대한 물음이다. 말하자면 나는 '회화적 본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고루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하여 '그림을 왜 그리는가?' 혹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끝도 없이 해 보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 심지어 그림의 제 문제를 생각할수록 의혹이 더 깊어지는 상황을 맞닥뜨리곤 한다. 그런데도 그림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의식과 본질을 계속 캐묻는 게 '화가'의 의미라면 의미일 것이다. 이미 회화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본질'에 매달리는 것은 화가가 지닐 수밖에 없는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서고운의 작업에서 '화가의 욕망'을 떠올린 것은 그녀가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해 제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회화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뇌의 흔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가해진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포착하여 그려내는 것, 즉 '재현의 불가능성'을 끝도 없이 고민하며 그것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윤리일 것이다. 서고운은 재현의 가능이나 불가능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폭력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에 있어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재현의 윤리를 지켜내기 위해 구도(求道)적 자세를 취한다. 그녀의 그림에서 보이는 제의적, 종교적 분위기는 아마도 폭력적 이미지를 대하는 이 구도적 태도 자체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림이 이 사회를 바꾸는데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 믿으며, 그 맹목적 믿음에 헌신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예술가가 지닌 맹목적 믿음을 다룬 카프카의 『단식 광대』를 떠올리게 한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단식 광대 Ein Hunger Kunstler』는 단식하는 기술을 공연으로 보여주는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밤새워 지켜볼 정도로 관객들이 열광했고, 40일이 지난 후 단식을 끝내라는 흥행사의 권유로 공연을 마치곤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관객들이 더는 이 '굶기의 예술가'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는 마구간 옆의 동물 우리로 밀려나게 된다. 단식 광대는 그의 단식일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단식을 이어나간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단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 빈 동물 우리는 젊고 싱싱한 표범으로 채워진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이 소설은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광대는 예술가를, '단식'의 기술은 예술 그 자체를 은유하는데 이는 비생산적이며 비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을 의미한다. 단식이라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광대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입에 맞는 음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단식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예술의 의미와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예술가의 믿음, 예술이 사회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을 뜻한다.
믿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카프카는 말했다. 그에게는 소설이라는 믿음이 그를 살게 했을 것이다. 화가 역시 무용하지 않은 그림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림의 무구하고 연약함을 누구보다 알기에 그림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며 도달 불가능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 자들이 화가이다. 그렇게 부딪혀 깨달은 불가능의 자리에서 그림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그려나가는 것, 그것이 화가가 지닌 믿음의 윤리이다.
'애도'라는 수행
서고운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녹아내리는 듯한 인체의 형상은 아마도 끔찍한 구조적 폭력에 희생당한 이름 없는 자들의 은유일 것이다. 머리가 제거되고 얼굴이 지워진 육체는 각각의 개별성을 잃으며 군집한 채 녹아내리고 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이유도 모른 채 고통받는 개별적 존재들을 재현하는 작가가 그들을 녹아내리는 '상태'로 그려낸 건 아마도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경계에 서서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연된 시간'은 작가에게 최소한의 '윤리'를 확보하는 장치이다. 그녀는 이 개별적 존재들을 '죽은 몸'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고통을 재현할지언정 최소한 그 고통을 '죽은 몸'으로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지연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의 고통을 끝까지 고통으로 놔두는 것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목도하고 체념하는 데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들을 연민의 바탕 위에서 '희생자'로 바라보지 않기 위한 작가가 지닌 애도의 윤리이다. 이 '미완의 애도'는 애도의 행위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들며 폭력으로 점철된 비극적 현실을 우리의 삶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이는 애도 속에서 애도가 끝날 수 없게 만들며 타자의 타자성을 유지한 채 나의 삶 안으로 그들을 품고자 하는 시도이다.
한편, 작가는 이번 전시의 신작 중 하나인 「사상도」(2018)는 구상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일본의 불화 중 하나인 구상도(九相圖)는 풍장(風葬)을 지낼 때 사람의 시신이 지상에 노출되어 자연히 소멸하는 모습을 9단계로 나눠서 그린 그림이다. 시신이 썩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관찰하여 그려낸다는 것은 서양 회화사에서도 그 흐름을 찾을 수 있다. 렘브란트와 차임 수틴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이어지는 계보 말이다. 특히, 샤임 수틴(Chaim Soutine)의 「가죽이 벗겨진 소 Carcass of Beef」(1925)는 서고운이 시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유사한 태도를 지닌다. 수틴은 1920년부터 1929년 사이 렘브란트의 「살육된 황소 Slaughtered Ox」(1655)에서 영감을 받은 동물 사체 연작을 10여 점 그려냈다. 죽은 동물의 사체의 모티브는16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도축장의 풍경 자체를 정물화처럼 다룬 렘브란트가 그린 소의 사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그 뒤를 이어받은 수틴의 작업은 삶을 제압하는 죽음의 절대적인 힘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 수틴이 그린 동물 사체 정물화는 사체가 부패해가는 과정의 생생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도축장의 풍경이 피가 덜 빠진 상태의 고깃덩어리가 '아직 살아 있음' 혹은 '아직 존재함'을 외치고 있다면, 수틴의 그림들은 죽음에 이미 압도된 채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는 듯 보인다. 「사상도」 역시 육신이 썩는다는 상태 변화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인다. 육체를 떠나보내는게 애도의 출발점이듯 그녀는 애도를 수행하기 위해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죽음의 과정을 그린다. 그렇게 죽음을 기억하며 상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죽은 후 제대로 애도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 그녀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타인의 슬픔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또한, 죽은 동물의 사체, 효수된 머리, 도살된 짐승의 고깃덩어리 등 폭력이란 말에 즉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다룰 때 작가는 그것들을 마치 정물화의 정물을 다루듯 그린다. 이미 저질러진 폭력을 응시하며, 그 폭력을 보란 듯이 전시한다. 일종의 소격 효과로 볼 수 있는 이 방식은 보는 이를 목격자로 만들어 모종의 책임을 느끼게 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악의 복화술」(2016), 「살육과 우울」(2016)에서도 화면 중앙에 희생된 것들을 그린 다음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삼각 피라미드 구조 안에 넣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폭력이 우리 주변에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듯 말이다. 종종 그녀의 작업에서 삼각 구도로 구축된 화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신성한 기운을 지닌 인물을 중심축으로 하는 제단화의 삼각 구도와 닮아있다. 이는 풍경을 다룰 때도 보인다.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구도인 화면을 가르는 수평선 중앙에 솟은 나무와 산봉우리 혹은 화면 중심축으로 대칭되는 구성은 종교화에서 많이 쓰이는 구도이다. 게다가 캔버스 여러 개를 병풍 구조로 이어 붙인 작업은 마치 12장의 패널 위에 그린 겐트 제단화(The Ghent Altarpiece)의 구조를 위시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삼각형 캔버스를 이용하여 삼각 구도를 더욱 강화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라진다」(2018)에서도 역시 회화의 제의적 성격과 불가능한 애도를 수행하려는 작가의 구도적 자세를 볼 수 있다. 삼각형 캔버스는 마치 십자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성은 그녀가 희생자들을 성스럽게 여기며 애도하는 것 자체를 제의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애도의 대상을 일종의 제의적 희생물처럼 성스럽게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성스러움은 그 기원에 원초적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성스러움'이 어떠한 폭력의 기반 위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며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제어하기 위해 제의적으로 '희생양'에 폭력을 가함으로써 다른 폭력을 덮는다고 했다. 서고운은 애도의 대상이 제의적 희생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따라서 그녀는 폭력의 이미지를 소재주의적으로 다루는 것을 경계하며 희생자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진정 체화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내면화하여 그들의 실제적 고통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림/미술은 그것을 가능케 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나 한 것일까?
맞불의 세계
작가는 종종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파국 catastrophe'을 언급한다. 아마 그것은 '절망'의 다른 말일 것이다. 그녀가 화면에서 재현하는 절망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도와 다를 바 없다. 이미 그녀는 한 차례 「더 디바인 코미디 The Divine Comedy」(2017) 시리즈에서 '절망적인 세계'를 보여준 바 있다. 아마 이 절망은 폭력으로 인해 불행의 겪는 이들이 그 불행의 이유도 모른 채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파국의 기미가 난무하는 세계의 풍경을 그린듯한 그녀의 그림은 절망과 고통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들이 경험하는 불행과 고통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충분히 애도 받지 못한 죽음을 슬퍼하며 세상이 끝나버린 후에도 여전히 남아버린 '남겨진 삶'을 걱정한다. 그러며 그들의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게 이 세계의 폭력적 구조를 알레고리적 함의를 덧입혀 그려낸다.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재현하여 보는 이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레고리적 요소들이나 상징들을 사용하여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폭력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른 채 그대로 굴러가는 이 끔찍한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어떤 의미 작용을 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녀는 이 화장터와 같은 세계에서 남겨진 불씨로 맞불을 놓는다. 현재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폭력적 세계를 바라보며 더 큰불을 지핀다. 모든 것이 다 타버린 자리에서 그동안 발화되지 못한 죽음들의 울음소리가 우리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맞불을 놓으며 슬픔의 구조를 그려내는 것이 그림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으며 말이다. 예술은 실재적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다시 말해 감각을 발생시키며 민감하게 만든다. 서고운은 그들의 고통을 다루며 '슬픔이라는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려 한다. 그렇게 슬픔의 구조를 캔버스라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 펼쳐내며 그리기라는 제의적 행위를 통해 그림의 가능성에 다가간다. 모든 가능/불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헛된 것이라 여겨질 때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슬픔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믿으며 말이다. ■ 장파
Sensing "Sadness": The Paintings of Seo Goun
The Painter's Desire, the Ethics of Belief
I have often asked other artists what the painter's desire is. This is not a question I ask of all artists; rather, there are paintings that raise the question. For example, it may occur when I sense the impression of an artist's life trajectory beyond the pictorial representation shown on a two-dimensional canvas. Conversely, it also applies to paintings that are filled with pictorial images, yet come across as flat and empty canvases. The question of the "painter's desire" is not meant to gauge some sort of hierarchy of pictorial formativity. It is an inquiry into the fundamental impulse that drives one to paint. I am, so to speak, a person of the old-fashioned belief that there exists a separate "painterly essence." I am constantly asking questions like "Why does one paint?" or "What is painting?"– but I must answer that I do not yet know. I have even found that the questions only deepen the more I think about the various issues associated with painting. But if there is any meaning to "painter," it lies in this continued questioning of the self-consciousness and essence of the painting medium. For a painter, it falls in the realm of unavoidable belief to dwell on the "essence of painting"– even when the limits of painting have already become clear.
The reason Goun Seo's work calls to mind the "painter's desire" is both because she possesses a ritualistic attitude toward the act of painting itself and because she shows signs of agonizing over what painting is capable of. The ethics of the painter may be to capture and render the structural violence that society has inflicted on the "other" without objectifying the other's suffering – to paint such things while endlessly considering the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Goun Seo's aim is not to examine the possibility or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she adopts the approach of a seeker of the Way, upholding an ethics of representation that inevitably assumes a level of controversy when one is painting images of brutality. The ritualistic, religious mood seen in her paintings seems perhaps to stem from this very seeking stance with regard to violent imagery. She believes that paintings can actually serve to change a society – and dedicates herself to that blind belief.
This belief calls to mind Franz Kafka's "The Hunger Artist," a work that concerns the artist's blind faith.
Kafka's short story (Ein Hungerkünstlerin German) tells of an artist who stages performances showing his fasting technique. At first, the crowds go wild, staying up all night to watch. But by the time 40 days have passed, the artist has typically ended the performance after the promoters recommended that he quit his fast. A few years later on, audiences are no longer interested in the hunger artist, who is shuffled off to an animal cage next to the stables. Even though there is no one keeping track of his fast, the hunger artist continues to starve. He finally confesses that the reason he has continued to starve himself is because he could never discover any food to his liking. With that confession, he passes away, and the empty cage he leaves behind is taken over by a young and vigorous panther.
This story is typically understood to be about art and the artist's existence. The performer stands in for the artist, while his fasting technique is a metaphor for art – art that is inevitably unproductive and antisocial. What desire could have driven the performer to want to show his fasting abilities? Perhaps what enabled him to fast was the belief that there might be some food "to his liking." This is a reference to the artist's faith in seeking to approach the meaning and essential of art – an almost blind faith that art can do something for society.
Kafka said that it is impossible to live without belief. It may be that the faith of "fiction" was what enabled him to live. Painter too are people who believe in the potential of paintings that are not useless. Yet painter are also people who know the innocence and frailty of painting better than anyone, and who believe the best recourse is to show the imperfections of painting while proceeding toward something unattainable. To paint from the realm of impossibility one has run up against, believing blindly in painting – that is the ethics of belief possessed by the painter.
The Performance of Grieving
The seemingly melting human shapes that appear over and over in Goun Seo's work may serve as metaphors for those nameless individuals victimized by terrible structural violence. Bodies with their heads excised and faces erased gather and dissolve, stripped of their individuality. In her representation of these individual entities suffering without understanding the reason for the violence inflicted again them – depicting them in a melting "state"– the artist may seek to stand at the boundary where their human dignity disappears, hoping to delay that moment by even a little. But this deferred time is a device to ensure the artist a modicum of ethics. She does not approach these individual entities as dead bodies. The deferred time is necessary to at least avoid objectifying the suffering as "dead bodies" even as she represents it. In other words, her forever leaving the suffering of those victimized by violence as just that –suffering –represents both her desire not to become resignedly "used to" witnessing violence against others, as well as her own ethics of grieving, her wish not to view them as "victims" from a position of pity. It is an "incomplete grieving" that takes the act of grieving into the present tense, placing before our own lives a tragic reality marked by violence. Within grief, this prevents the grieving from ending, seeking to embrace the other within our lives while retaining its otherness.
For Four Figure Paintings (2018), one of the new works in this exhibition, the artist has said that she drew on a kusôzu motif. A form of Japanese Buddhist painting, the kusôzu(九相圖) depicts the nine stages of natural decay as a human body is expected to the elements in a sky burial. The observation and rendering of the decomposition process is also a current that can be found in Western art history – a lineage that includes Rembrandt, Chaim Soutine, and Francis Bacon. Soutine's Carcass of Beef (1925) in particular adopts a similar attitude to Goun's in observing bodies. Inspired by Rembrandt's Slaughtered Ox (1655), Soutine painted around a dozen works showing animal carcasses between 1920 and 1929. The dead animal motif can be seen in many Dutch works from the 16th century; the slaughtered ox by Rembrandt, who treated the slaughterhouse landscape like a still life, recalls Jesus Christ sacrificing Himself on the cross. Carrying on that legacy, Soutine's work suggests the absolute power of death in subding life. Soutine's still life images of animal carcasses further capture the decomposition process in all its graphicness. Where the still-bloody meat in the abattoir landscape seems to declare some continued life or existence, Soutine's images seems to show a process of accepting death after already being overwhelmed by it. Death is likewise accepted in Four Figure Paintings through the decomposing body's changing state. Just as letting go of the body marks the beginning of grief, Goun paints the process of death all the way through the body's extinction as a performance of grief. In this way, she remembers death and confronts loss. For the sake of those whose deaths were never properly grieved, she seeks to remember, to record, and to approach the sadness of others.
When dealing with the kinds of images that are more readily associated with "violence"– animal carcasses, decapitated heads on display, slaughtered beasts –the artist does so as though approaching the objects in a still life. She confronts violence that has already been perpetrated, exhibiting it ostentatiously. What could be seen as a kind of alienation effect is a device to turn the viewer into a witness, making him or her sense a sort of responsibility. For Ventriloquism of Devil (2016) and Depression and Slaughter (2016), Goun painted the images of the slain at the center of the canvas and then placed them within a triangular pyramid structure for further emphasis – preventing viewers from simply passing them by, as though to remind them of the continued existence of violence around us.
Images with a triangular composition can often be found in Goun's work, resembling the triptych structure of an altarpiece where a figure with some divine spirit is positioned at the center. They are also seen in cases of landscapes. The compositions frequently used by the artist – trees and mountain peaks rising up at the center of the horizon as it divides the canvas, symmetry around the canvas's central axis – are often found in works of religious painting. Works in which several canvases are connected into a folding-screen structure give the sense of having originated in the structure of the Ghent Altarpiece, a work painted across 12 panels. All That Exists Disappears (2018), which uses a triangular canvas to intensify the triangular structure, shows both the ritualistic character of Goun's painting and her compositional attempt at an impossible performance of grief. The triangular canvas serves a purpose akin to the cross – a composition showing that the artist views the slain as holy and is ritualistically addressing grief itself.
This is a different matter from viewing the object of grief as a kind of ritual sacrifice. René Girard said that all sacredness conceals the primitive violence at its source; in Violence and the Sacred, he inquired into the foundation of violence upon which the sacred function. He also noted how the ritual inflicting of violence on "scapegoats" to control internal conflicts within a community serves to cover up other violence. Goun Seo is alert to the way the object of grief may be seen as a ritual sacrifice. Because of that, she is wary of approach images of violence in an "issue-centered" way, striving to actually embody the suffering of those sacrificed as her own suffering without objectifying it.
For all these efforts, there are certain questions that repeatedly arise. Is it possible to internalize the suffering of others and approach their actual anguish? And does painting/art even possess the capability to enable that?
The World of the Counterattack
In explaining her work, the artist often refers to "catastrophe"– possibly as another word for "despair."
The despair she represents on the canvas is no different from the images of hell that appear in Dante's The Divine Comedy. Indeed, she has already shown the world of despair once before in her The Divine Comedy (2017). That despair may stem from the fact that those suffering misfortune through violence suffer without knowing the reason for their fate. Seeming to depict the landscapes of a world where signs of catastrophe abound, her paintings are not meant to represent despair and suffering. Goun is asking what meaning could possibly exist in the misfortune and anguish they experience. She grieves the deaths of those insufficiently mourned by our society, while also worrying about the lives "left over" once the world has ended. To prevent their suffering from being meaningless, she depicts the violent structure of the world with an added layer of allegorical allusion. While she could represent the tragic incidents in Korean society in an explicit way and confront the viewer directly, she instead maintains distance by using allegorical elements and symbols – she believes this is the best that she can do, hoping some meaning can be produced by rendering a terrible world so inured to societal violence that it simply moves along, not even recognizing violence as such.
Goun answers with her own fire, using the embers left over in this crematorium of a world. By resisting the structural violence of today, she observers a brutal world and stokes a bigger fire. She believes that this is what painting is capable of doing – rendering a structure of sadness and lighting a response fire where everything has burned away, so that we can hear the cries of deaths hitherto unspoken.
Art guides us into real experience. It causes senses to arise, sensitizes us. In dealing with suffering, Goun seeks to keenly capture the "sense of sadness." Displaying this structure of sadness upon the two-dimensional canvas, she uses the ritual act of painting to approach the possibilities of painting – believing as she does that while the whole debate over possibility/impossibility may sometimes be seen as vain, it can at least add to the depth of sadness. ■ JANGPA
□ 오프닝 공연 「Dream-Doom」
- 일시: 2018. 11. 10 오후 6시
- 장소: 갤러리 조선 2층
- 공연자: 트라이벌 퓨전 퍼포머 Demi Han
- 소개: 서고운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색과, 이미지, 메시지에 영감을 받아 움직임을 만들었다.
삶과 죽음, 파멸과 회생, 고통과 위로의 경계를 트라이벌 퓨전 퍼포먼스로 표현한다.
전시제목서고운: 아웃랜더스 Outlanders : 처연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전시기간2018.11.10(토) - 2018.11.24(토)
참여작가
서고운
초대일시2018년 11월 10일 토요일 06:00pm
관람시간10:30am - 06:30pm
휴관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조선 gallery chosun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4 (소격동) )
후원서울문화재단
연락처02-723-7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