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주제
‘나는 자의적으로 살고있을까?’ 조작으로 박탈당한 자유 의지와 삶에 대한 고찰
인도 위에는 사람이 가득하고, 도로 위에는 차가 줄지어 서 있다. 마천루에 가려져 하늘은 보이지 않고 건물들의 사이에는 공원처럼 만든 가짜 숲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기계처럼 계산에 맞춰 돌아가는 것 같다. 권순관은 지방에서 성장해서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처음 왔다. 그에게 대도시의 풍경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를 보는 것은 낯설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는 사회구조의 힘과 거기에 맞춰 규범화된 행동 양상을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후 외부 환경이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또 역으로 개인은 환경에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지 고민하는 작업을 펼치고 있다.
권순관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연출된 장면을 통해 양식화된 현실의 모습을 보여줬다. 도시 풍경의 세트를 만들고 모델의 자세를 통해 도시라는 조직에 매몰된 개인의 삶을 드러냈다. 최근 작가는 이러한 작업 내용을 ‘도시’라는 공간에 한정하지 않고 역사, 사회 등을 포함하는 시공간적 맥락으로 발전시켜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숲, 바다 등 실제 존재하는 장소를 찾아 그곳에 머물렀던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사람의 흔적을 담는다. 그는 이를 통해 보편적 역사와 사적인 기억의 모호한 경계를 살피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고찰한다. 조작과 제한 속에 박탈당한 자유 의지와 삶 같은 것들이다.
사진의 대중화 속에서도 견고한 예술로서의 사진
권순관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사진 작업을 위해 지나사의 8x10인치 대형 필름 카메라를사용했다. 디지털 카메라를 주로 쓰는 요즘 현장에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고 암천을 뒤집어쓴 채 촬영하는 것은 분명 번거로운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산과 바다에서 촬영한 것들이라 파도를 온몸으로 맞는 등 더욱 그랬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촬영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리고 장비 비용은 약 50여 배가 더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전통적인 사진 촬영 방식은 작가 자유 의지에 대한 능동성을 보여주는 행위를 포함하기에 의미가 있다.
사진은 스냅 촬영이 가능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장 대중화를 경험하고 있는 표현 매체다.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그 경험의 속도도 빨라졌다. 권순관은 사진은 대중적 매체로서의 사진과 본질에 대한 탐구를 제시하는 독창적 매체로서의 사진이 맞물려 이루어지는 표현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질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며 새로운 시대의 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과 같은 작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사진은 세심한 손길로 카메라를 설정하고 긴 기다림 끝에 포착해내는 순간을 담는 사진은 내밀한 삶의 순간으로 파고드는 탁월한 매체이다. 이는 권순관의 작업에서 잘 드러난다.
전시서문
우리가 망각된 것을 마주하는 방법
라는 개인전의 제목에서 무엇이 연상되는가? 필자는 직관적으로 무덤을 덮고 있는 떼와 그 안에 묻혀진 뼈들, 과거에는 어떤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미 사라져 버린 것, 망각되어 버린 흔적들을 담고 있는 장소를 떠올렸다. 이렇게 권순관이 새롭게 선보이는 작업들은 개인의 역사와 기억은 어떻게 남겨지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며, 이는 역사라는 커다란 기억들과 어떤 공명을 이루는가에 대한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아가 작가 자신이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 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론을 실험해오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 그 시작점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습관적으로 어떤 해석을 위한 단서들을 찾게 된다. 이는 역사 혹은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기본적으로 얻게 되는 정보들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하여 미리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보편적인 잣대와 척도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권순관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에 대해 깊게 알고 있거나 혹은 무관심하여 그저 들어본 적 있는 수준의 지식이거나 나와 직접, 간접적인 상관 관계의 유무 여부와 상관 없이 모든 지식적인 구도와 관점에서 벗어나서 실제의 공간을 대면하는 직관의 경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직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단 어떤 사건의 기억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고, 장소 또한 변해버렸고, 무의식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타인의 시선과 관점이 언제라도 우리의 판단 기준에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그가 이전 작업들에서 다루어 왔던 역사라는 대상에 한정해서 이야기해 보자. 그가 다루어 왔던 ‘역사는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 그리고 이로 인해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에게는 여기서 장치로서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실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것으로 각자의 선택의 자유에 맡겨져야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제시된 틀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지속한다. 이렇게 한번 시작된 반응은 또 다시 반응하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지점으로 계속 이동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어떤 것을 망각시키는가? 여기서 망각은 집단의 논리에 의해 개인의 기억은 희생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다. 물론 우리에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은 서로의 공감 혹은 공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버린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 그 무엇들에 대해서 다시 공명할 수 있는 것은 표준화된 공동의 기억의 방식만이 아니라 한 개인이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들의 수 많은 교차점들에서도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형태, 신념, 행동들에 대한 관점들이 하나의 주체로서의 ‘나’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역사란 결국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산물이고 물론 투쟁과 타협을 통해 진행되어 나가지만 결국 이를 사유한다는 것은 기존의 범주에 의문을 가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행위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 결국 작가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행위들은 ‘나’라는 한 개인에서 출발해야 하며, 어떤 사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들과 기준들을 생산하기 위한 한 걸음인 한 걸음이다. 이렇게 그가 작업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개인의 기억들과 자신이 직관적 경험에 의해 얻어지는 감각들의 발화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이제는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어둠의 계곡>, <파도>같은 작업은 극명하게 서로 대비되는 표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매우 어두운 검은 숲의 풍경을 또 다른 작품은 밝은 하얀 파도의 포말을 담아낸다. <어둠의 계곡>은 조명 조절장치에 의해서 서서히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면서, 어둠 속에서 사진의 이미지가 서서히 밝아지면 그 숲의 어두운 형태들의 부분까지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파도>의 포말 역시 극명하게 파도의 형태를 드러낸다. 이는 막연하게 숭고한 자연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장소적인 사실에 기인해 은유적으로 어떤 사건을 대상에 전유하려는 것도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는 작가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이유로든 이미 개인의 사라져버린 기억을 현재로부터 다시 상상으로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직관적 수행을 바탕으로 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태도로 작업에 임하며,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바라보고 어떤 접근을 꾀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작가는 단순하게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방문한다. 그리고 어떤 대상을 촬영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는 단순히 그 사건의 현장에 대한 이미지를 통해 거대담론에 의해 잊혀지거나 소외된 역사의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거나 우리의 기존의 통념에 균열을 가하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미리 준비되어있는 그 모든 지식적인 정보에 온전히 의존하기 보다는 최대한 벗어나서 직관적으로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당시의 바로 그 장소가 아닌 현재의 공간에서 현재의 ‘나’는 집단과 개인, 기억과 망각, 지식과 감각 사이에서 어떤 것들을 인지하고 사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정한 장소에서 작가는 어떤 상태로 머무는가? 작가의 이야기를 빌려 언급하자면, 한 공간에 오래 머무르면서 무작정 셔터를 눌러 이미지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 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무심코 오래 바라보게 되면, 처음에는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순차적으로 떠 오르다가 이내 서로 다른 생각들이 무질서하게 드러나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리는 순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는 권순관도 다르지 않다. 이미 작가가 알고 있었던 역사의 기록들에서 시작된 정보로 인한 인식은 결국 어느 순간 분노, 슬픔, 행복, 공포, 긴장, 흥분, 불안, 기쁨 아마도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나타나는 사적인 경험의 상태로 전이 된다. 이러한 경험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체와 대상, 정신과 육체의 일치하는 순간적인 상태에서 정점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내 소멸될 것들이며, 이미 사라진 감각으로 결국 ‘나’ 안에서 흔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는 이 순간을 담아내고자 한다.
또 다른 작업들인 인물을 찍은 초상은 명확하게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모호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심리적 풍경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변함없이 한결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사람의 외면은 변해도 정신은 어떤 굳은 의지와 신념에 의해 변함 없다는 막연한 통념적인 믿음이다. 인간은 내면적으로 어떤 이상과 기준을 설정하고 ‘나’ 스스로 어떤 목표를 위한 길을 걸어가기 위해 명확하고 객관적인 지식과 신념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외부적인 영향을 통해 얻어진 것을 잣대로 하여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이런 ‘어떤’ 목적성을 가진 이데올로기와 같은 인간의 유한한 틀 안에 온전한 자신의 것을 찾아내고 남길 수 있을까? 자연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가는 기억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의미가 해석하는 그 당시의 시간을 기준하여 변할 수 밖에 없다. 이는 하나의 단어가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던 시원으로써 굳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임시적이고 임의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의미가 사라지거나 다른 의미로 쓰이는 요즘의 언어의 변화로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권순관은 이러한 변형된 인물 사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아주 명확하고 보편적인 지식의 틀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감각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초상작업은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담아낸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감각들을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전달하려 하는가? 물론 이러한 비물질적인 것은 고정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고정된 결과물로서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그 작업의 결과까지 도달하기 위한 그의 수행의 과정이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과정 속의 감각들은 함축적으로 작업의 풍경 안에서 흐릿하고 불명확하고 불확실한 대상이 아니라 명확한 형태로 순간적 찰나를 포착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반대로 사고의 주체인 인물을 대상으로 한 초상 작업에서는 사람이라는 명확한 기억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오히려 불명확한 이미지로 변형시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그의 작업은 어떤 명확한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특정한 감정들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숭고하게 바라볼 수도, 어떤 이들은 그냥 잘 찍은 풍경 사진으로만 생각할 수도 혹은 필자의 이런 번잡한 글 없이도 작가의 이러한 수행적 작업의 성향을 파악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작가뿐만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있어서도 찰나의 순간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 이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라지고 변해갈 것들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러한 도달할 수 없는 순간을 최대한 자신이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들로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시도들을 통해 관객들과 공유하며, 그들의 직관적 시각을 유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우리는 그의 수행적 태도의 결과물인 작품을 통해 그 표피에서 얻어지는 정보만을 해석하기 보다는 망각된 것들에 대해 취하고 있는 접근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그의 작업에서 한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기억과 망각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흔적들 사이를 직관적으로 파고들어 이미 사라진 시공간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러한 수행적 태도를 근간으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것들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장치와 기준에 대한 의심을 작업에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특정한 권력과 지식의 산물로서의 특별한 상황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직관적 관찰과 사유의 태도를 통해 발생하는 경험으로 얻어진 감각으로 전환해서 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작업을 보면서 아무것에도 기대지 말고 스스로 찾으려는 자세를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 신승오 (페리지갤러리 디렉터)
전시제목권순관: The Mulch and Bones
전시기간2018.10.19(금) - 2018.11.10(토)
참여작가
권순관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휴관
장르사진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소격동, 학고재) 신관)
연락처02.720.1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