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는 2018년 9월 28일(금)부터 10월 21일(일)까지 이종구(b. 1954, 충청남도 서산) 개인전 《광장_봄이 오다 Agora_Spring Is Here》를 연다. 학고재에서 2009년도에 연 개인전 《세 개의 풍경》 이후 9년 만에 개최하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종구의 최근작 33점을 선보인다. 이종구 화백은 놓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서사의 맥락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고 끈질기게 천착하며 뛰어나게 형상화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과장과 추상 대신 자신이 지켜내야 할 그림의 대상이 지닌 근원적 표정을 화면에 이끌어 낸다. 오지리로 상징되는 땅의 사람들과 함께 긴 시간을 견뎌낸 이종구 화백의 미학은 이번에는 세월호 사건의 슬픔, 윤리를 저버린 정권을 질타하는 광장의 촛불 집회, 그 과정을 거쳐서 정권이 바뀌고 남북 화해가 조성되어 한반도에 희망의 봄이 오는 최근 우리의 역사적 사건을 대하소설보다 장엄하게 완성해 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작가가 지켜야 할 미학의 정신을 화면에 오롯이 구현해 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전시는 학고재 본관에서 열린다. ■ 학고재
<광장_봄이 오다>전을 열며
이종구
근래 몇 해 동안 우리는 일상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사건들 속에서 살아왔다. 세월호 사건은 국민을 위한 국가의 역할과 임무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한 충격과 분노의 비극적인 사건이었고,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의 만남과 판문점 선언,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은 금세기 최고의 역사적인 감동의 이벤트였다.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까지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밝혔다. 촛불혁명을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을 파면시켰고,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평화의 시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나의 이번 전시회 <광장_봄이 오다>는 이러한 근래의 시간과 공간에서 시작된 예술적 기록이자 증언이며 상상의 결과물들이다. 나는 ‘별이 된 세월호의 아이들’을 깊은 바다 속에서 인양하는 마음으로 <학교가자......>를 작업했고, 광화문 촛불현장에서 수집한 포스터 등을 증거로 제시하여 아이들을 세상에 부활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광장>연작은 말할 것도 없이 그 해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싸운 거룩한 시민들의 초상화이자 기록화라 하겠다. 나 자신이 십 여 차례 광화문 광장에 나가 촛불을 밝힌바 있으므로 <광장>은 개인으로부터 가족, 단체, 그리고 7개월 동안 23회에 걸친 촛불광장에 참여한 총 16,894,280명 시민들의 총체적인 촛불혁명 과정과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봄이 왔다>연작은 남북 정상의 역사적인 만남과 판문점 선언을 보고 나서 바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워낙 갑작스럽고도 감동적인 역사적 사건이어서 채 가시지 않은 격정의 감정으로 시작된 작업의 내용과 결과들은 완성도에 앞서 다소 추상적인 감상이나 민족적 감상주의를 드러낸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이번 전시회는 세월호와, ‘세월호 아이들’이 만든 광화문 광장의 촛불과,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새 정부에 의한 판문점선언은 시작과 끝이 연결된 역사의 필연, 또는 역사의 순리에 대한 나의 예술적 기록과 증언이라 하겠다. 특히 이번 작업들은 동시대의 작가로서 나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특히 분단을 넘어 평화로 가는 우리민족의 현실 앞에서 어떤 미학적 완결성보다 시대의 서사와 내용을 더 중요시하고 강조 한 측면이 크다. 그것은 내가 80년대 초 그림을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우리시대의 현실과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로서 나의 예술적 책임과 임무를 다하겠다는 생각의 확인과 실천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작업의 결과는 순전히 역량의 빈곤과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으로도 거듭 우리시대의 역사와 현실과 현장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작가로서 역할을 다 하고자 한다. 나의 궁극적인 예술적 지향은 인간다운 삶의 가치와 세상에 있으므로.
그의 손끝에서 별이 된 사람들
- 가슴 아프고 거룩한 섬광의 기억
방현석(소설가, 중앙대 교수)
판단이나 선택을 하기 어려울 때 찾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 이종구 화백은 그런 분이다. 그의 말을 따르면 지금은 곤란해도 나중에 후회할 일은 생기지 않는다. 지난해 여름, 조언을 듣고 싶어 그에게 몇 번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마다 해남의 임하도에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시원한 섬에서 그림을 그리며 여름을 보내고 있을 그를 부러워하며 나도 그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선배님은 좋겠습니다.”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고 그렇게 투정 섞인 말을 했던 나는 지난달 부평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작업실 벽 두 개를 꽉 채운 그림은 단원고등학교 열 개 반 아이들의 단체사진이었다. 작업의 규모에 대한 놀라움은 곧 전율로 바뀌었다. 열 폭의 그 그림에 담긴 아이들과 선생님들 가운데 눈빛에 영혼이 깃들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비슷한 눈빛도 하나 없었다. 눈빛만이 아니었다. 입술들은 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손끝은 서로 다른 꿈을 가리키고 있었다. 열일곱 해 그들을 키워 올린 발목의 아래로 보이는 운동화는 아이들이 가지 못한 길을 향하고 있었다. 사진은 단체였지만 그림의 주인공들은 모두 서로 다른 영혼을 지닌 고유한 개인들이었다. 그것은 작가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만나고 교감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그림들이었다.
“이 많은 작업을 언제 다 하셨어요?”
“임하도에 가서 작업했어. 세월호 뱃길이 보이는 그 섬에서.”
“힘들었겠어요.”
끝내 인양하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를 <세월>이란 소설로 쓰면서 여러 번 운 적이 있는 나는 그가 이 많은 아이와 선생님을 그리면서 얼마나 많이, 자주 울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애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어. 밤이면 잠을 자기가 무섭기도 했어.”
그는 차마 인천의 작업실에서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아이들이 떠나간 뱃길이 바라보이는 진도 앞바다 작은 섬의 폐교에서 작업을 했다. 3개월을 임하도에서 밤이면 떨려서 잠 못 이루고 낮이면 울면서 그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벗어주고 자신은 빠져 나오지 못한 정차웅 군도 있었다. 아무것도 움켜쥐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듯 두 손바닥을 활짝 펼쳐 들고 학급 사진을 찍은 1학년 1반 단체사진을 그리며 그는 몇 번이나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을까.
급훈이 낭중지추, 주머니 속의 송곳이었던 2학년 5반 아이들은 서른여섯 명 중에서 아홉 명이 살고 스물일곱 명이 희생되었다. 아이들과 최후를 함께한, 급훈을 낭중지추로 정했던 담임 이해봉 선생을 단체사진 속에 그려 넣으면서 작가는 몇 번이나 주머니를 뚫고 나오려는 송곳을 스스로 다스렸을까. 과장과 추상 대신 그가 선택한 방법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깊어지는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지켜내야 할 그림의 대상이 지닌 근원적 표정에서 끝내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랬기에 단원고의 아이와 선생님들의 표정은 깊고도 밝다.
그가 사진으로 남아도 될 사람들을 회화로 그린 것은 기록과는 다른 층위에서 기억을 다루는 일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세월호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죽었는지를, 권력이 어떤 사람을 버렸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예술적 인양작업의 과정이고,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그렇게 인양된 사람들의 깊고도 밝은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그들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광장으로 불러내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바꾸게 만든 구원자로서의 면모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봄의 근원은 바로 그들로부터 온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화폭에 소환하면서 그가 알게 된 사실과 느꼈던 감정을 부평의 작업실과 신포동의 막걸리 집에서 주고받으면서 나는 아주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그림이 이미지가 아닌 서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단원고 아이들을 위한 ‘기억의 교실’에 있는 쪽지와 편지들 봤지? 부모들과 친구들이 쓴 편지들 보면 가슴이 아프잖아. 그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한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이에게 보낸 편지였어. ‘네가 우리를 잘 좀 돌봐줘.’라고 한 대목이야.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 이야기가 가슴에서 떠나질 않았어.”
무력한 희생자들인 줄로만 알았던 그 아이들이 그저 제 앞만 바라보는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고 윤리를 상실한 권력을 바꾸고 있다는 것. 그는 감추어진 인간의 진실을 섬광처럼 포착하여 우리에게 주변이 어떻게 중심을 구원해냈는지를 눈앞에 보여준다. 그의 작품이 지닌 서정적 강렬함은 대하소설보다 장엄한 서사를 밑그림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서사적 상상력에 대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두 손을 든 적이 있다. 전쟁 중이던 2003년 이라크에 가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챙겨가지고 온 물건이 바로 버려진 교과서와 공책이었다. 요르단 암만에서 시리아의 아라비아사막을 거쳐 꼬박 28시간을 지프차로 달려 도착한 바그다드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가 챙겨온 그 물건을 보고 손을 들지 않을 작가는 없었다. 아이가 쓴 정성스런 아랍어로 빼곡한 공책이 어쩌다가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을까를 생각하며 생사를 알 수 없는 그 물건의 주인에게 공책을 돌려줄 수 있는 날을 그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부평 작업실의 다른 한 벽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은 광화문 광장의 사람들이었다. 단원고 열 개 반 아이들의 단체 그림에 이어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토와 갈색, 그리고 진도항의 짙푸른 색으로 이동해온 이종구 화백의 작품세계에서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빨강의 강렬함이 잠시 숨을 멎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회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때로는 스텐실과 콜라주 기법, 오브제 등을 세련되게 활용해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과감하게 빨강색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는 칼라의 변화를 가벼운 농담으로 돌렸다.
“물감 값 좀 썼어. 이거 예전에는 비싸서 못썼던 거야.”
하얀 종이에 까만 글자만 써온 나는 물감 값이 칼라에 따라 다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빨간색이 어두운 색에 비해 몇 배나 값이 비싸다니.
피켓과 포스터, 방송 자막으로 깔아놓은 구호를 보고 나와 같이 작업실에 들렀던 후배는 그가 화가로서 미학적 손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태연했다.
“감수하려고.”
그가 미학적 우회로를 스스로 봉쇄하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미학이 정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때만 예술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면 피카소의 작품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이번 그림들은 예전보다 더 치열한 미학적 도전이라고 보아 마땅했다.
이종구 화백이 일관되게 그려온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얼핏 광장으로 진출한 그의 그림에 담긴 인물들이 지금까지 그가 그려온 인물들과 다른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광장의 사람들 중에서 굳건하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촛불의 시작에서 끝까지, 개인으로부터 가족, 집단으로서의 시민에 이르기까지 광장으로 나온 사람들은 헛것을 쫓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가 변함없이 그려온, 땅에 발 디딘 채 견디고 버티며 살아온 사람들의 형제이고 자식이며 그 자신이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그의 그림을 보며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이란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안의 불변으로 만변하는 세상에 대응하라’는 이 말은 베트남 사람들의 영원한 아저씨, 호치민에 의해 역동적으로 갱신되었다. 그의 고향 ‘오지리’로 상징되는 땅의 사람들과 함께 긴 시간을 견뎌낸 이종구 화백의 미학은 바다의 슬픔을 품고 하늘로 날아올라 ‘지금 여기’의 광장에 착지하였다. 그가 1980년대 그림 속 주인공들을 위해 전시회를 열었던 오지초등학교는 분교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아예 폐교가 되었다. 그가 그렸던 오지리의 장 씨와 이 씨, 문 씨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빈자리가 아니라 남은 한 사람, 문 씨의 시선이 가 닿은 지점이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유일한 오지리 사람, 문 씨의 시선이 광장의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오지리의 사람들과 광장의 사람들이 바통 터치를 하는 이 절묘한 타이밍은 평생을 오지리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행운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농촌 오지리에 당도한 캘리포니아 쌀 포대와 주인을 잃고 바그다드 뒷골목에 버려진 어린아이의 공책이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어떤 서사로 연결되는지를 아는 작가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자기 안의 불변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향해 새롭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이종구 화백의 <광장> 연작을 보며 나는 2016년 겨울 밤 광화문에서 만났던 그를 떠올렸다. 그는 아직 건강을 염려해야 하는 깡마른 몸에 여윈 얼굴이었지만 늦은 시간까지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구두를 신은 이종구와 운동화를 신은 이종구, 두 이종구를 그린 작품은 시민으로서의 이종구와 예술가로서의 이종구가 다를 수 없음을 밝히고 있었다. 45개의 작품을 붙인 약 천 호 크기의 대작인 <16,894,280개의 촛불> 중에서 그는 한 개의 촛불로 빛나는 시민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미학관이 서 있는 자리를 뚜렷이 했다.
부평의 작업실에서 나를 세 번째로 놀라게 만든 것은 광장이 만들어낸 싱그러운 봄이었다. <봄이 왔다> 연작은 독립 70주년이 넘도록 휴전상태에서 ‘분단체제’를 이어온 남과 북이 서로의 손을 잡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감격을 담고 있다. 더 이상 남의 탓을 하며 외세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두지 않기를 바라는 민족의 열망이 바닥에 깔린 제주도의 유채꽃과 머리 위의 백두산 천지에 새겨져 있다. 특히 마지막 그림 속 우리 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그린 작품에서 송아지가 아닌 큰 소의 코에는 늘 코뚜레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봄의 푸른 초원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두 마리 소는 코뚜레를 벗어 던졌다. 코뚜레를 했던 흔적조차 없었다. 두 소가 내달릴 수 있는 푸른 초원을 깔아준 것은 광장의 촛불이지만 입체적 디테일은 코뚜레가 꿰인 소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며 마침내 코뚜레를 벗겨낼 날을 기다려온 그의 지치지 않는 상상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종구 화백을 땅과 농민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탁월하게 그려내 온 화가로 인식한다. 나는 그 인식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정을 나는 같은 학교에서 일하며 여러 번 확인했었다. 학생들이 농촌활동을 하는 곳에 찾아가면 언제나 그가 한 걸음 앞서 다녀간 다음이었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해마다 막걸리와 삼겹살을 사 들고 농민들과 함께 하려는 제자들을 찾아 다니는 교수를 나는 그 이외에 본 적이 없다. 어떤 기억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농민들의 주름진 인생을 그가 맡아 그려온 것 또한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인식의 절반만 맞는 이유는 그가 기울인 다른 관심과 그가 그린 다른 그림들,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작가로서의 선택과 도전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랍의 뒷골목에 버려진 교과서와 공책을 보면서 물건 주인의 운명을 떠올리는 지구적 상상력을 지닌 예술가이며 자본주의의 지구적 팽창 과정과 결과를 캘리포니아 쌀 포대에 담아 그려낸 세계 유일의 화가다. 그가 농촌과 농민을 그렸던 것은 그가 농촌화가여서가 아니라 삶의 근원적 형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아는 드문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좋은 소설은 이미지를 이야기로 만들고, 좋은 그림은 이야기를 이미지로 만든다. 이종구 화백은 놓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서사의 맥락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보고 끈질기게 천착하며 뛰어나게 형상화해 왔다. 별이 되어야 마땅할 서사의 주인공들에게 그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에 그는 게으른 적이 없었다. 그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만 오백여 명에 달한다. 그전에 그렸던 사람들을 다 합친 숫자보다도 많을 것이다.
그가 그린 별들이 어찌 오백여 개뿐이겠는가. 우리 시대를 구원하는 별이 된 단원고의 아이들과 선생님, 지구적 평화를 만들고 한반도의 봄을 이끌어낸 16,894,280개 광장의 별들까지 그 숫자는 셀 수없이 많다. 그 별들을 위해서라면 미학적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고 그는 말했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야 마땅한 아름다운 사람이 놓였던 자리를 분명하게 새겨두기 위해 거리 두기 라는 미학적 우회로를 봉쇄해버린 그의 선택으로 발생할 손해가 있다면 그건 예술의 손해이지 이종구의 손해일 수 없다. 그의 과감한 미학적 투지로 인해 그 어떤 예술보다 감동적이었던 현실이 비로소 예술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방현석 l 주요작품으로 <새벽 출정>,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세월> 등이 있으며 신동엽창작기금, 오영수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부총장을 맡고 있다.
전시제목이종구 개인전 《광장_봄이 오다》
전시기간2018.09.28(금) - 2018.10.21(일)
참여작가
이종구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소격동, 학고재)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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