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주제
윤석남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최초로 펼쳐 놓는 전시 - 어머니 너머, 윤석남
이번 개인전은 윤석남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 마주하고자 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윤석남은 1982년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불안한 내면세계를 보여주고 여성이 가진 자애의 힘을 ‘어머니’라는 주제를 통해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의 소재로 이매창, 허난설헌 등의 역사 속 인물부터 자신의 어머니, 시어머니, 어머니로서의 친언니 등 다양한 인물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과 감사를 기리는 작업을 꾸준히 펼치면서도 미완의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여든이 되며 정작 자기 자신은 작업 뒤에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이자 여성 그 자체로 자신을 작업 속에 나타나려고 시도했고 그 시도를 전시 주제로 잡아 처음 선보이는 것이 이번 전시다.
윤석남,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최초로 펼쳐 놓는 신작들은 모두 채색 기법으로 완성했다. 채색화를 선보이는 것 또한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화려한 색채 사용으로 눈과 마음에 즉각적 호소를 불러일으키는 민화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작가가 기존에 사용하던 매체를 뛰어넘는 시도를 선보이는 신작들은 현역 작가로서 윤석남의 힘을 보여준다. 윤석남은 김만덕, 허난설헌, 이매창 등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은 역사적 여성 인물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왔다. 여성 미술가로서의 셀 수 없는 고난이 많지만, 포기하지 않고 변화를 꾀하며 긴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해내 가는 윤석남의 모습에서 역사적 여성들과 일맥상통함을 볼 수 있다.
윤석남의 작품 세계 - 작가는 지상으로부터 20cm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
‘누가 나에게 예술가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cm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예술가가 시대를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20㎝ 정도만 떠 있어도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 속에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
윤석남이 1999년 국내 신문사에 기고했던 칼럼의 한 단락이다. 윤석남은 조금 떠 있으면 몸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작업의 길이 조금 쉬울 것 같다고 말한다. 떠 있으면 자유로워지고 현실에 가려진 상상의 세계로 진입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을 좀 더 명쾌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은유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은유는 곧 예술의 본질이며 예술은 곧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윤석남의 작품은 여성에 대한 그만의 성찰이 현실 앞에 쉬지 않고 변화해 온 흔적들이다. 1982년 처음 선보인 어머니의 형상으로부터,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소외당하는 역사 속의 여성들의 모습을 나무에 새긴 작품을 거쳤다. 이후 <핑크룸>과 같은 작품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문을 품는 불안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했다.
전시서문
윤석남의 여성주의 미술: 여성 그 중심에 서다
정연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폐재와 빨래판 등으로 만들어진 패널 위에 그려진 윤석남의 <어머니>는 투박한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살렸다. 이 작품은 회화적이기도 하고 조각적이기도 하며, 나무를 이어붙인 콜라주처럼 보이면서도 입체감과 평면성을 동시에 지닌 기이한 작품이다. 작가는 나무를 갈아내고 또 그 표면을 그을린 뒤 작은 조각들을 서로 이어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 패널 위에 윤석남은 어머니의 형상을 만들며, 초상화를 완성시켜 나간다. 사진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사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머니의 강한 페르소나를 전달하는 동시에,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강한 심리적 자의식을 느끼게 한다. 어머니는 그의 작업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한복을 입고 시선을 정면에 두고 있으며, 선구자적 모습으로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 세월의 흔적을 녹여낸 이러한 <어머니>라는 제목의 폐목 작업은 199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작가 개인의 어머니로 비춰졌지만, 점차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상징성과 보편성을 띤 ‘어머니’로 아이콘화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미술가인 윤석남은 미술계에 상당히 늦은 나이에 입문했다. 그의 삶은 프랑스 태생의 루이즈 부르주아를 연상시키듯, 40세에 시작했지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집 안에 작업실을 만들어 인물 초상을 그리면서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또 주부 생활을 10년 이상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한 열정은 단순한 취미로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드로잉이나 조각적 설치, 회화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고발하며,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해오고 있다.
20세기 초반 한국 근대의 신여성들은 대부분 일본이나 유럽에서 유학을 하면서 신교육을 받았고 엘리트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가졌으나 대부분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권위에 도전했던 삶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했으며, 예술적 평가에 대한 영예와 달리, 그들은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이혼을 하거나 혹은 비참한 삶을 영위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전히 집단적인 미술가들의 활동보다는, 개별적 활동에 머물렀다. 또한 여성미술가라고 해서 여성성(femininity)을 미술 내에서 재현하려는 의식적 시도도 많지 않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주의가 등장하고 여성들의 패션 또한 상당히 현대적으로 바뀌었지만, 독재주의적인 사회정치적 상황만큼이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의식과 태도는 보수적이었고 관습적이었다. 윤석남은 여성에 뒤따랐던 관습적 태도를 미술 언어를 이용하여 대항하고 저항한 작가이다. 그의 미술은 극히 개인적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언어를 잉태하고 있으며, 여성의 관점에서 사회를 다시 보고 여성을 다시 보며, 여러 세대에 걸쳐 여성들이 겪었던 삶의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윤석남의 작품은 1980년대 당시에는 여성에 대한 관습적 인식에 역행하면서, 여성을 새로운 일상과 역사의 한 중심에 놓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선구적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80년대 초 중반부터 여성 미술가들이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서 겪는 불평등에 대항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윤석남은 여성의 관점에서 한국 미술의 재현에 뒤따르는 시각성(visuality)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화적이고 시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있는 드로잉을 그리거나 자신의 경험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재현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때때로 선은 투박하고 인체의 비율은 맞지 않지만 섬세한 색감, 표면의 질감은 윤석남 고유의 미술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연꽃을 통해서는 불교적인 색채를, 수없이 많은 유기견을 통해서는 버려진 생명에 대한 강한 애정을 전달한다.
많은 여성미술가들은 여성성과 여성적 공간을 미술 작품을 통해 구현하거나 재현하면서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것에 주저하기도 했다면, 윤석남은 여성미술가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미술가로서의 의식과 실천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1980년대부터 한국 여성 미술가들이 페미니즘 미술에 뒤따르는 강한 여성 이미지를 통해 여성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거나, 남성 중심의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서 여성성을 강력하게 전복시키는 등의 작업들을 전개할 때, 윤석남은 “여성의 시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온 여성들에 대한 억압된 기억을 개인적 서사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 안에선 어머니를 통해 타자화된 공감과 감정이입이 내재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어머니,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언니들을 통해 기억된 여성에 대한 이야기, 버려진 삶을 다룬 이야기를 재현한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는 되풀이되고, 기억은 여러 세대를 걸쳐 전승된다.
윤석남: ‘나’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
윤석남은 40세의 나이로 1980년대 초반부터 한국 화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시작 당시부터 어머니를 모델로 인물, 초상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모델로 해서 직접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이후 <어머니> 연작으로 이어진 패널 작품들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는 <어머니>라는 나무에 채색을 하게 되는데, 사실 채색된 나무 부조, 혹은 조각은 흔히 서구에서는 ‘폴리크롬’ 조각으로 불리기도 했다. 채색 조각은 모노크롬 조각에 비해 주로 포크아트나 민화의 채색을 연상시킨다. 불교 조각의 경우, 사천왕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색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이전에 마을 어귀에 서 있던 ‘천하대장군, 천하여장군’처럼 친근하기도 하지만 대신 엄숙한 분위기를 동시에 연상시킨다. 이러한 조각들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일종의 토템처럼 동네 사람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학고재에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에서 민화의 책거리를 배경으로 한 윤석남의 자화상 세 점은 이러한 전통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어 보인다. 조선 시대 민화는 양반들이 그렸던 수묵이 추구했던 문인화풍의 엘리트 정신에 대항하여 뛰어난 상상력을 구현하고 있었고, 화려한 색채로 서민들의 눈과 마음에 즉각적으로 호소했다. 윤석남은 민화풍의 자화상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지각했던 그림이 아니라, 마음과 감성에 호소하는 민화의 특징을 이용한다.
본래, 윤석남은 1985년 김인순과 김진숙과 함께 ‘시월모임’전을 열었는데, 초기의 작업은 노동을 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당시 ‘시월모임’전은 관훈미술관에서 1985년 개최되었는데, <무제>라는 작품은 일을 하고 있는 노인의 얼굴이나 손을 부분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민중미술의 맥락 내에서 읽혀졌다. 당시 윤석남은 일을 하거나 노동을 하는 여성의 이미지와 더불어,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는 불평등을 그린 그림들도 있었다. 보통 여성들은 사회 내에서 수동적인 존재로서 여성의 주체성은 주로 무시되거나 마치 정물화처럼 아무런 의식 없이 부차적인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윤석남은 일하고 있는 여성의 노동을 재현함으로써, 한국의 미술사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노동’의 주제와 더불어 ‘노동자계층’과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미술계에 등장했다. 물론 근대기 미술가들이 일하는 장면이나 휴식을 취하는 장면을 그렸지만, 이렇게 사회적 의식을 가진 노동의 장면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초기에 그려진 작업들은
(1985년 추정), <얼굴 없는 학살>(1987), <청량리 588번지>(1988) 등인데, 여기에는 시장에서 일하는 한국의 ‘아줌마’뿐 아니라, 당대의 불안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작품, 또한 지금은 사라진 청량리의 사창가 등을 통해 한국 사회 속에서 음성적으로 존재했거나 사회적 치부로 여겨지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당시 민중미술 내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는 다뤄졌다. 그러나 남성 미술가들은 남성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기 때문에, 윤석남의 여성 이미지는 민중미술과 그 맥을 같이 하지만, 민중미술 내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 그것은 여성을 미술의 중심부로 전환시키는 액티비즘이었던 동시에, 사회 계층 내에서도 중하층 계급을 주로 다룸으로써 미술의 주제로 인식되지 못한 주제들을 중심부로 이동시키는 주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1986년에 개최된 ‘제2회 시월모임전, 반에서 하나로’, 1988년에 개최된 ‘여성해방시와 그림의 만남’ 등을 통해 여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림의 중심 화두로 이끌어낸다. 윤석남의 “여성”은 남성들을 통해 투영되거나 재현된 ‘자동기계인형(automaton)’ 같은 여성이 아니라, 투박한 자신을 드러내는 자신감있는 여성이다.
윤석남은 지금까지도 자화상을 끊임없이 그린다. 그것은 자신과의 대화법이기도 하며, 수많은 자화상은 닮아있지만, 결코 같은 이미지는 아니다. 백발로 변한 머리카락은 작가 자신의 의식만큼 투명하고 생동감 있게 살아 숨 쉰다. 민화를 배경으로 화면의 중앙이 아닌 약간 가장자리 쪽에 위치한 자화상은 책거리와 같은 이미지를 가져옴으로써 여성들은 접근이 불가능했던 책이라든가 지식에 대한 갈망과 소유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윤과 같은 민중미술가들도 우리의 전통 민화 등에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윤석남에게 민화는 익명의 사람들이 그렸던 무명의 그림이면서 과거의 시간, 전통을 상징한다.
이렇듯, 윤석남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 서사를 중심으로 한다. 그의 어머니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여섯 명의 자식을 키웠는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 개인에 대한 기억과 함께 당대를 살았던 다른 어머니의 유사한 기억을 함께 소환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마치 세대 간에 이어지거나 이야기를 통해 세대 동안 억압당했던 목소리를 마치 큰 소리로 메아리치게 하는 효과를 만든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영향을 미치면서 윤석남은 그의 그림 속에 드러나는 사회적 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파급하는 결과를 만든다. 특히,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윤석남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여성들을 작품 속에 재현하거나 재구성하는데, 구체적으로는 2002년부터 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 최승희, 나혜석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들 여성은 개인적 배경은 다르지만,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들로 윤석남의 작품에서는 나무에 아크릴로 채색된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들은 미술관에 설치되거나 자연 속에 놓이는데 고상하고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가 아니라 나무 조각으로 이어진 패널로 구성된 이미지의 파편들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스러움’을 전복시키는 이미지로 보인다. 그것은 억압되었던 것들이 해방된 이미지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윤석남의 ‘회화적 조각’은 억압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분출하는 효과를 지니는데, 나무라는 소재는 자연, 대지, 여성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또 다른 제유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윤석남의 ‘핑크룸’: 여성의 집, 여성=집
윤석남은 1979년 미술계에 입문한 이후 1983년과 1984년에는 뉴욕에서 공부하면서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과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국의 박이소 작가도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85년부터는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라는 대안공간을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포인트에서 운영했다. 윤석남은 뉴욕에서 박이소를 비롯, 한국 작가들을 만나면서 동시대 뉴욕 화단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 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설치미술의 새로운 국면들을 한국의 어느 작가보다 가장 가까이서 체화할 수 있었다.
그는 1988년 민중미술이 열렸던 아트 스페이스의 전시, 1993년 퀸즈미술관에서 개최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 전시 등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한국미술이 국제미술과 교감을 이뤘던 시기에, 가장 중심에 서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1993년 이후의 <어머니> 연작들 대신, 윤석남은 여성 스스로의 욕망을 드러내는 <핑크룸>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핑크는 소녀 시절부터 여아들이 즐겨 입는 상투적인 컬러이다. 핑크 드레스, 핑크빛 환상, 핑크빛 사랑 등 유년 시절부터 길들여지는 ‘핑크’는 소녀틱한 감수성과 영원한 귀여움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는 색채이다. 온통 모든 공간을 물들어 놓은 ‘핑크룸’에는 핑크빛 소파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변을 에워싸는 한지와 거울 등 핑크빛은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언캐니한 느낌을 울컥 불러일으킨다. 소파는 누군가가 편안하고 안락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상징하지만, 이 핑크 의자는 누군가가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보이는 의자이며, “불안한 여성들의 자리”를 표상한다. 핑크색은 누군가에게 반복-강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우리를 억눌렀던 감정들을 소환한다. 여자아이라면 언제나 핑크빛 아이템 하나 정도는 있는데 이런 유년 시절에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분홍색 드레스, 장난감, 가방 등 모든 소품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윤석남은 1996년 처음으로 <핑크룸>을 제작한 이후, 여러 형태, 여러 형식의 변형을 거쳐 <핑크룸>, <그린룸> 등을 제작하는데 전시와 공간의 성격에 맞게 장소특정적으로 연출하고 새롭게 설치하기도 한다.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지만 한 번도 동일한 패턴의 장식이나 유형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차이와 반복을 여러 번 제시하면서 같은 주제를 다른 양상으로 변화시킨다. 학고재에 이번에 설치되는 <핑크룸 V>도 핑크를 강요하는 유년 시절의 기억에 맞서는 일종의 사회적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러한 특정 젠더에 가해지는 사회적 고정관념은 여성성을 불변하는 성향으로 고착화시킴으로써 여성의 수동성을 시각적으로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윤석남은 이러한 고착화된 사회적 통념을 해체시키는 예술적 제언을 통해 여성성은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취향에서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생성될 수 있는 성격을 강조한다.
윤석남의 의자들은 서구의 대표적인 가구로 한국의 아파트문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파나 의자들이다. 의자는 도상학적으로 사회적 신분이나 권위, 혹은 그 자리에 앉게 되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많이 표현된다. 그러나 윤석남의 의자는 쉽게 앉을 수 없도록 불편하게 되어 있으며, 누군가 앉을 경우 상당히 고통스러울 정도로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의자들이다. 여성의 방은 흔히 규방 문화를 상징하는 듯한데, 윤석남은 여성을 실내의 공간, 가정이라는 공간에 가둠으로써 여성을 공공의 장소로, 개방된 공간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던 한국의 현실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몸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자궁으로 생명과 온기, 사랑의 거처로 상징화되었다. 자궁은 따뜻하고 축축한데 이러한 생물학적인 특징은 전통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을 가정에 가둠으로써 양육하고 요리하는 여성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현모양처’라는 말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신교육이 형성되던 시기에도 사라지지 않던 덕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에 대한 고등교육이 시작되면서 ‘현모양처’를 요구하는 덕목은 근대기의 가정과 사회에서 더욱 이데올로기화되어 갔다.
여성의 몸은 일종의 집과 같은 공간이며, 여성적 공간은 집과 같다는 인식은 윤석남의 작업에서 페미니즘 주제로 자주 다뤄진다. ‘핑크룸’ 또한 이러한 공간을 여성의 공간으로 설치함으로써, 이러한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교육과 양육을 통해서 이데올로기화되었는지 제시해준다. 윤석남의 핑크룸 실험은 ‘방’이라는 가정 내에서의 공간에 갇혀 있던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공간이며, 여성의 몸을 방, 집과 같이 생각해온 우리의 전통에 대한 공격이자 저항이기도 하다. 이러한 윤석남의 궤적은 동시대 서구의 다른 작가들에게도 엿보였는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여성에 가해지던 여성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이를 해체하고 문제시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윤석남의 ‘핑크룸’과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여성의 몸을 집/방과 같은 공간으로 인식했는지, 스페인 작가인 엘레나 알메이다(Helena Almeida)가 <집(The House/A Casa)>(1983)을 통해 어떻게 집을 여성으로 인식하는지, 나아가 리지아 클락(Lygia Clark)이 <집은 몸이다(The House is the Body)>(1968)라는 작품을 통해 여성의 몸은 집과 같은 건축적 공간의 산물로 인식하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각기 다른 도시에서 여성의 방과 여성의 몸에 가해졌던 억압과 분노, 여성의 욕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회의 요구로, 가정의 요구로 늘 여성의 욕망은 은폐되었거나 재현대상에서 제외되었다면, 윤석남은 여성의 욕망을 거짓 없이 드러낸다.
윤석남의 페미니스트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에서 존재했던 여성들을 실제로 초상화로 재현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잊혀나간 여성들을 한 명씩 동시대의 사회로 소환시킨다. 사실, 여성사를 초상화의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문제는 문학적 상상력이나 회화적 상상력을 동시에 작동시킨다. 왜냐하면, 나혜석과 같은 근대기 여성 미술가의 경우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지만, 많은 여성들은 그들의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아서 어느 정도 비슷한 초상화를 재현하는지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역사적 초상화들과 함께 윤석남이 이번에 학고재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초상에는 남성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머니, 언니, 그리고 자신의 가족초상을 통해 세대를 이어나가는 여성의 소서사에 집중하게 한다.
윤석남의 여성적 글쓰기
2015년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2015 SeMA Green: 윤석남-심장> 전시는 1980년대부터 제작된 작업을 모두 보여주었던 작가의 대회고전이었다. 당시 상당히 많이 전시되었던 유기견은 미술관 전시장에서 모두 보여주지 못했을 정도로 많았으며, 어느 방을 가득 메운 연꽃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는 것 같은 생명력을 발산하였다. 폐목 패널에 그려진 여성의 모습, 그것은 마치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풀을 사랑으로 쳐다보는 응시와도 같게 느껴진다. 서툴게 그려진 투박한 손, 해부학적으로 다소 이상하게 조합된 신체, 나무 패널에 부유하는 듯이 그려진 여성의 얼굴, 가면처럼 이목구비만 그려진 패널, 이 모든 것은 여성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지 못했던 타자들을 초대하는 거대한 잔치였다. 이러한 투박한 패널과 서로 대리 보충으로 존재하는 윤석남의 드로잉은 여성들을 다시 그 중심에 서게 한다. 작가의 작품처럼 “나의 할머니, 단기 4268, 4.13일에 첫 딸을 낳으셨다. 그 딸이 다시 외할머니가 되셨다 (2001년 2월 23일)”라는 텍스트들은 남성들이 설명할 수 없었던 여성의 글쓰기로 제안된다. 그는 일기를 쓰듯이 그림을 그리며, 그림을 그리듯 텍스트를 써 내려간다. 글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에게 자매예술로서 남성 미술가들이 주목해주지 않았던 소소한 이야기, 여성들이 차별당한 이야기, 그냥 피식 웃게 하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 등으로 쓰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남의 여성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니, 때로는 위협적이며 무뚝뚝하며 동시에 친근하다. 그것은 그냥 우리 주변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시제목윤석남 展
전시기간2018.09.04(화) - 2018.10.14(일)
참여작가
윤석남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매주 월요일 휴관, 9/23-9/26 휴관
장르회화, 설치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소격동, 학고재) )
연락처02.720.1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