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건네는 조용한 말들.......
조광기 전시회에 부쳐
포천아트밸리 예술감독 윤 제
조광기를 처음 알게 된 때는 그가 대학 1학년일 때이다. 그 이후에는 드문드문 보게 되었지만, 그가 그로부터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거의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한사람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주위와 함께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즐거워했고 그의 주위와 때로는 함께 기뻐하고 때로는 함께 슬퍼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한가정의 가장이 된 그의 삶은 그 가족과 더불어 단출한 가운데 그 의미를 새겨 가리라.그는 그의 세상의 중심을, 자기중심을 철저히 그의 삶 중앙에 새겨 넣고 있지 않은가 싶다. 미술제도권 안에서 한 작가라는, 엘리트주의 같은 프로근성으로 설정하는 것을 무엇인가 괴리감이 있지 않았나하며 반문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작품의 브랜드화라던 지, 작가의 캐릭터 화된 모습들은 일종에 스포트라이트만을 바라보는 한 순간의 계산된 설정은 마치 연예인들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은가? 평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지, 한순간의 정점을 바라보고 예술을 행하는 것인지? 한 번 숙고해봐야 할 대목이다. 삶의 스펙트럼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인생전반을 아우르는 예술작업은 정녕 대가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는 개인적 삶의 궤적과 작가적 삶의 궤적이 많이 일치하지 못할지언정, 작가의 모습과 삶의 모습이 따로 노는 것 처럼 이율배반적인 모순은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도권의 미술이라는 것은 시대나 특정 장르의 형식들이 우선시 되다보니 작가의 작품은 그러한 문맥위에 걸리고 작가는 그것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고루한 생각일지라도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시대의 얼굴이나 상업적인 가치만을 따지기 보다는 한 개인의 인생관, 세계관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소용이 없을까?
상업적 미술이 어느 때보다 활달한 요사이 미술 판에서나 대학교 등등에서 보면 모든 가치는 속칭 잘나가다는 작가의 작업은 미술사적이거나 시대상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도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것들의 의미는 그야말로 잘 팔리는 것만으로 가늠하면 될 것이다. 그것들이 이시대의 지표나 미술사적인 의미까지 함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장황해진 말들을 일단락 시키지자면, 그린다는 행위와 작가라는 입장은 일반화되어 인사동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또 다른 의미와 가치들을 위해 계속 지속되어야한다
조광기 그는 지금 인사동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류의 작가는 아니다. 최고의 미술대학을 나와 당연하게 미술판에 있어야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자신들의 삶의 영역은 그것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예술가가 아니라는 말은 모순이다. 미술판이 아닌 곳에서 끊임없이 자기의 세계관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것을 표현애 내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길이다. 그는 그가 속한 위치에서 중앙의 제도권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그가 원했던 철학적인 어느 한 정점에서, 그것을 위해 내재된 희망과 아니면 나약한 매너리즘의 양면성을 가지고 그렇게 그만의 시간 속에 있었다.
그의 대학교 친구들은 고루한 선배들의 작업세계들을 반대하고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형식의 미술을 찾아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떠났다. 그당시 미술은 형이상학적인(결코 서구의 형이상학이 아닌 기득권자들의 장막으로만 이용되는) 스승들의 권위와 그것들과의 관계를 청산한 민중미술 밖에는 우리나라에는 어느 다른 형식의 미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매체와 퍼포먼스 등등의 제3의 표현 방식을 찾아 나섰지만 그에게는 그것들조차 낯설고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관이나 판단할 수 있는 가치관들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것들 보다 그가 선택한 쪽은 우리 역사의 문맥등과 같은 오랜 세월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나, 고유한정서의 것 같은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가 판단하기에 그의 친구들의 퍼포먼스나 매체 작업들은 단지 미술판 안에서의 하나의 이벤트내지는 충격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액션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체의 형성이 어느시기에 정점이 된다면 그정점의 가치판단으로 그 이후의 세계관은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범용될 때까지 스스로 싸우고 방어하고 함락당하는 결렬한 작용이 있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르게 새로운 것들에게 매우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쉽사리 변화되고 따라가는 양떼 같은 면이 있다. 하지만 조광기의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그의 고집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그것들과 유사한 유물이나 작업들을 함께 화면에 등장시켜 어렵고 거창하지 않고 쉽고 편안하게 그의 작업관을, 그의 세계관을 전달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암석화나 이중섭의 작업 같은 것은 그의 작업에서 그가 보이려고 하는 세계에 길목에 있는 일종의 좌표인 셈이고 그것들로 인해 안내되는 그의 세계관은 앞서서 말한 소박한 자연관과 지금까지 연연히 이어지는 우리들의 동양적인 세계관이다. 언제나 자연과 함께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등한시 되었던 우리주변의 꽃과 나무 동물들에게서 살아있고 그리고 살아가는 경외심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매사에 감사하며 그것으로 충분한 일종의 종교적인 면을 그가 화면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 작품은 거창한 시대의 담론이나 역사의 증언을 하기도 하지만,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가볍게 건네는 그 말 속에는 우주의 진리가, 자연의 신비가, 우리의 역사가 들어있는 것이다.
보통의 작가들이 미술판을 염두에 놓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주는 긍정적인 면인 없진 않으니깐, 하지만 역으로 그것이 가져다 두는 그늘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리라, 가령 이러한 것이다. 미술이 과연 직업적인 면으로써 작가의 생업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일생을 이어가게 하는 절대적인 가치는 될 수가 없다. 여기서는 한 번의 스포트라이트가 필요하다. 마치 인기절정의 가수를 꿈꾸는 피에로와 다르지 않다. 반면 그것들과 상관없이 삶 속에서 한 개인이 관통하고 있는 그만의 진리를 살아가며 일상의 전반적인 스펙트럼에서 보이는 한 작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작가 조광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미술작품이 가질 수 있는 미술적인 의미가 아니다. 한사람이, 한주체가 인생을 살아가며 스스로 소박하게 주위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미술판에서 보이기에 한편으로는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같은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작품 활동에 따따부따 말을 하기 보다는 조용히 그의 행보에 격려의 말 한마디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전시제목조광기 - 편재(遍在)된 삶을 위하여
전시기간2010.05.13(목) - 2010.05.20(목)
참여작가
조광기
초대일시2010-05-13 18pm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일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남양주아트센타 Namyangju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420-5 남양주아트센타)
연락처031-590-4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