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아트홀에서는 마음의 여유와 위안을 ‘문장’과 ‘그림’으로 나누고자 홍인숙 작가의 ‘글자풍경’ 전시를 마련하였다.
민화인지 만화인지,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독특한 화법(畵法)으로 가장 한국적 팝아트를 구사하고 있는 홍인숙 작가가 7년만에 여는 아홉 번째 개인전이다.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7년을 보냈다는 작가는 그간 쓰고, 정리하고 다스렸던 삶의 궤적을 이번 『글자풍경』전에 펼쳤다.
박제 된 글씨가 아닌 ‘살고 있는’ 글씨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시”, “셔, “썅”, “싸랑”, “밥”, “집” 등의 글자그림은 평범한 ‘한 글자’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크게는 2-3m, 작게는 1m남짓되는 널찍한 화판에 작은 꽃다발을 나란히 줄지어 만든 글자는 소박하여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왜 이 글자들은 선택했을까. 평소 글쓰기에 능한 작가는 일상의 사소한 생각과 메모, 낙서들을 그 때 그 때 남겨 두었다가 그녀만의 기발한 문장으로 만든다. 그 문장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간결한 단문_시어詩語가 되고 결국엔 이미지가 된다. 마치 수천, 수만의 의미를 담았을 일상 언어의 수고로움에 감사의 꽃다발을 건네는 것처럼 글자들은 작가가 만든 면류관을 쓴다.
사랑 지나니 싸랑, 싸랑 지나니 썅
거룩한 썅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썅을 봤나
한 사람이 중요하듯이 이 한 글자면 충분했다.
박제 된 글씨가 아닌 살고 있는 글씨
십년 후에도 우린 사랑을 말하려나
사랑, 일상이었으면 좋겠다.
- 홍인숙
이 작은 꽃다발들은, 밑그림을 그린 후. 그것을 먹지 위에 다시 눌러 검은 윤곽선으로 그린다. 이어 색깔 별로 판을 자르고, 롤러로 색을 칠하고, 그 색 판의 수만큼 프레스기를 돌려 판화라고는 하지만 에디션도 없는 그림을 완성한다. 고되고 어려운 작업이다. 요즘처럼 휘뚜루마뚜루 이미지가 생산되는 시대에 홍인숙의 작법은 미련하다 못해 신선하다. 제작과정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십중팔구 이렇게 묻는다. “왜 컴퓨터로 안 뽑으세요?”
가장 ‘홍인숙’다운 노동으로 태어난 작품
그가 ‘가장 나다운 것’을 찾다가 고안한 이 방식은 드로잉처럼 빠르지도, 컴퓨터 작업처럼 매끈하지도 않다. 느낌이 좋아 사용하기 시작한 한지 위에 먹지를 대고 눌러 그릴 때 손의 압력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검정색의 느낌은 손그림과는 다른 ‘힘 뺀 그림’이 된다.
속에서 끓는 감정과 꼬리 무는 사유를 다스리고 다스리고 다스리다 나온 홍인숙의 ‘단문(短文)’이 구도자의 자세로 그려진 작법과 만나니 속스러운 것이 없다. “썅”이라는 글자가 이렇게 아름답고 거룩하게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속스러운 것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소위 ‘뽕끼’를 가진 홍인숙의 그림이 무엇보다 고운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왈꽉
눈물을
웃음이
얼른나와
돌려보낸다.
웃음이
눈물을
가르쳐준다.
- 홍인숙
가족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홍인숙의 신기한 그림
이번 전시는 홍인숙의 작은 회고전 같다. 가족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자의 가차문자를 갖고 노는 말장난의 달인의 면모를 보였던 <後眞후진사랑>, <큰 잘못>, <무지개동산> 등 초기작품부터 글과 몸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얼굴만 그려 넣었던 <점점 동그래지는 얼굴>시리즈와 <명랑한 고통>시리즈, 그리고 2009년 이후로 서서히 그림과 글이 분리되어 <누이오래비생각 㝹二悟來飛生覺>시리즈와 <글자풍경>시리즈로 나뉘게 되는데, 각 시리즈의 대표작품들이 선보인다. 홍인숙의 문장과 그림을 기다려온 팬들에게는 그녀의 그림을 감상하게 될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최근 들어 그림과 글이 화면에서 점차 분리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삶에 군더더기가 빠지고 목적이 점점 단호하고 간결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에 늘 따라붙었던 시의 길이도 짧아진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각인되는 작품들
얼핏보면 추억의 만화가 떠오르고, 비례에 맞지 않는 커다란 눈에 꽃, 리본으로 장식한 소녀 등 작가의 독특한 회화 스타일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도록 머리에 각인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아버지의 낡은 책에서 발견된 어린 시절 자신의 낙서그림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로 시작된 가족그림은 작가에게는 슬픔과 결핍에 대한 지속적인 재확인이자 치유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일관된 시점과 태도의 기록
그 감정들은 작가를 끊임없이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해 마주하도록 만들었다. 일상을 읽고 사람을 사랑하고 주변을 애정하는 마음은 자기성찰과 반성으로 이어진다. 이어 작가가 선택하는 단어, 소재, 기법이 점점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하였다. 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작가는 그림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일관된 시점과 태도를 잊지 않으려 차곡차곡 기록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 지나간 ‘싸랑’을, ‘시’에서 언어의 ‘위로’를, 대천의 욕지거리인 ‘썅’에서 ‘거룩함’을 새긴 것처럼 말이다.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오기는 힘든 선문답 같은 그림
시인 김민정이 이번 전시 서문에서 언급한 데로,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오기는 힘든’ 선문답 같은 그림들과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번 전시를 통해 마음의 휴식과 성찰이 있기를 바란다. ‘민화’를 가장 그럴듯한 팝아트라고 생각한다는 홍인숙의 작품은 이렇게 동시대의 삶, 마음, 언어를 담는다. 누구의 흉내도 아니고, 어눌하기 어눌한 이 그림을 우리가 ‘가장 한국적인, 어찌보면 가장 아름다운 팝아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시인 오은, 박준, 김민정과 함께 홍인숙의 그림을 읽는 시간
여름이면 갤러리들은 아캉스 (Art Vacance)를 주제로 전시를 연다. ‘예술로 보내는 바캉스’라는 의미로 단순한 바다그림이나 여름풍경이라면 그닥 재미는 없을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홍인숙의 ‘생각’, ‘그림’, ‘시어詩語’, 그리고 진정 사람에 대한 ‘애정’, ‘사람사랑’이야말로 예술로 하는 휴식이 아닐까. 전시 중 매주 목요일 밤(19:30, 에비뉴엘아트홀)에 많은 대중에서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는 오은, 박준, 김민정 시인과 함께 홍인숙의 그림을 읽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문학 안에서 그림과 가장 유사한 시詩를 통해, 풍경이 모여 글자가 되고 글자가 그 풍경을 아우르는 진기한 경험을 함께하기 바란다.
누군가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는 없더라도 아주 작게나마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삶은 사건 사고가 아니며 마음 때가 있어야 함을 알게 된다. - 홍인숙’ 전시제목홍인숙 개인전_글자풍경 LETTER LANDSCAPE
전시기간2018.07.05(목) - 2018.07.29(일)
참여작가
홍인숙
관람시간월~목요일 10:30am - 08:00pm
금~일 10:30am - 08:30pm
● 백화점 영업시간과 동일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 아트홀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300 (신천동, 롯데월드타워앤드롯데월드몰) 잠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관 6층)
연락처02-3213-2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