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e cera

2018.05.25 ▶ 2018.06.13

갤러리 조선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4 (소격동)

Map

초대일시ㅣ 2018년 05월 25일 금요일 05:00pm

  • 윤상윤

    into the trance3 162x130cm, oil on canvas, 2018

  • 윤상윤

    Jade 259x193cm, oil on canvas, 2018

  • 윤상윤

    맞선 29x41cm, oil on paper, 2017

  • 윤상윤

    Four little words oil on canvas, 2018

  • 윤상윤

    painter2 90x72cm, oil on canvas, 2017

  • 윤상윤

    Sunday 193x130cm, oil on canvas, 2018

  • 윤상윤

    Detour ahead 90x72cm, oil on canvas, 2017

  • 윤상윤

    mean old world 41x21cm, oil on paper, 2016

  • 윤상윤

    Mood Indigo 41x21cm, oil on paper, 2016

  • 윤상윤

    I can only be me 130.3x193.9cm, oil on canvas, 2015

  • 윤상윤

    Protem9 193x112cm, oil on canvas, 2011

  • 윤상윤

    Sub bailey 193x130cm, oil on canvas, 2013

  • 윤상윤

    Tennessee Waltz 2 193x130cm, oil on canvas, 2014

Press Release

갤러리조선은 2018년 5월 25일부터 6월 13일까지 윤상윤 작가의 개인전 를 진행한다. 윤상윤 작가는 오른손으로는 구상적 유화를, 왼손으로는 즉흥적인 드로잉을 그리는 작가이다. 전시명인 는 라틴어로 “without wax”라는 의미이다. 고대 로마시기, 얇고 가벼운 도기를 만들고자 했으나 기술력의 부족으로 불완전한(균열이 있는)자기를 만들었을 때 기만적인 도공들은 이 균열을 감추기 위해 도기에 왁스를 덧발랐다. 이에 반대되는 진실한 도공들은 ‘왁스를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뜻의 ‘Sine cera’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완성도에 대한 진실성을 보증하고자 했다. 현대에 이르러 이 용어는 sincerely의 어원이 되어 ‘꾸며내지 않은’, ‘(눈속임 없이) 진실된’의 의미가 되었다. 이러한 전시 제목처럼, 윤상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숙련되고 진실된 그의 작품 세계를 공유하고자 한다.

“전작과 다른 기법으로 제작된 다수의 신작을 공개”
“전작을 아우르는 원숙한 작품세계를 선보일 예정”
“갤러리-작가간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신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전시”


윤상윤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2016년 이후 신작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신작들은 이전 작품과 다른 기법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회색조로 밑바탕을 완성한 뒤 색채를 한 겹 한 겹 쌓아올리는 방식의 ‘글레이징glazing’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기법은 특히 < into the trance>, < Sunday >등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윤상윤 작가 특유의 바닥에서 일렁이는 물은 여전하지만, 동시에 색채는 차분하면서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윤상윤 작가의 반가운 왼손 드로잉도 만나볼 수 있다. 즉흥적이고 감성적으로 그려낸 왼손 드로잉들 역시 이전보다 차분한 색채를 띠고 있다. 왼손 드로잉은 이전보다 더 무겁고 진중한 감정과 상황들을 다룬다. 두 사람을 억압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듯 한 <맞선>, 외로이 고립된 사람이 등장하는 < mean old world>등이 그러하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조선에서 이뤄지는 윤상윤 작가의 2번째 개인전이다. 이전에 작가는 갤러리조선에서 열리는 단체전에 2회 참여하기도 했다. 갤러리조선은 동시대 감성을 대변하는 중진작가뿐만이 아니라 시각문화를 이끌어갈 신진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군을 균형있게 소개하는 현대미술의 소통처로써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갤러리조선은 2006년에서 2009년까지 갤러리건물 증축을 위한 휴식기간을 제하고, 올해로 10년째 운영중이며, KIAF, 쾰른 아트페어(Art Cologne), 아트바젤 마이애미(Art Basel Miami)등 다양한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가해 국내 작가들을 소개하고 홍보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왔다.

“오른손으로는 유화를, 왼손으로는 드로잉을 하는 작가”
“기존의 프로이트적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


윤상윤 작가의 오른손 그림은 물과 인물, 그 위의 구조물로 이루어진 3중 구조이다. 한 화면 안에 세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그림의 밑에서부터 무의식의 세계를 대변하는 이드(Id),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서 이를 조정하는 에고(Ego) 그리고 우리가 매일 수행하는 의식적 자아로서의 슈퍼에고(Superego)이다. 작가가 밝혔듯이, 밑바닥의 물은 에고, 물에 잠긴 부분은 이드, 물 위의 구성체들은 슈퍼에고를 의미한다. 오른손 그림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모델에 기대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과 합의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윤상윤 작가의 왼손 드로잉은 신체적 수행의 특이점이 드러나는 사례이다. 이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말하는 ‘세계에 연루된 주체로서의 신체’와 연결된다. 비교적 구상적인 오른손 그림에 비해, 왼손 드로잉은 즉흥적이고 추상적이다. 드로잉 속 인물들의 얼굴은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변형되거나 단순화된다. 이는 마치 퐁티의 ‘살 la chair’ 개념에 대한 비유같다. 퐁티는 물질적인 세계와 신체는 동일한 재료(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신체와 세계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드로잉 속에서 개인을 특정할 수 없고, 각 인물들이 단절된 개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드로잉 속 인물들을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시도의 일종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 또한 동일한 질료로 이루어진 이 세계의 일부로서 작품과 살을 맞대게 된다. “보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여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라는 퐁티의 말처럼, 관객과 작품은 보는 동시에 보여질 것이다. 퐁티가 주장한 것처럼 신체적 지각을 통해서 가시성의 배후에 있는 원초적 비가시성 혹은 정신세계를 ‘볼(할) 수 있다(je peux)’면, 우리는 왼손 드로잉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sine는 없다, cera는 왁스를 뜻한다. 그런데 이 cera는 밀랍으로 주조된 초상을 의미하고, 나아가 얼굴에 대한 비유적 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sine cera는 ‘왁스를 사용하지 않은(진심 어린, 진실된)’ 이자 ‘얼굴 없는’이라는 뜻이다. 윤상윤 작가의 왼손 드로잉에는 얼굴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현실로 귀결되기를 보류하며, 시각의 틀을 벗어난 감각으로 인지되기를 원한다. 오른손으로 그린 그림들이 구체적인 얼굴을 드러내며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프로이트적 세계관의 도식이라면, 왼손으로 그려낸 드로잉들은 어떤 체계로 종속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비가시성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윤상윤 작가의 오른손 그림과 왼손 드로잉을 번갈아 본다는 것은 즉 프로이트적 세계관과 퐁티적 세계의 살을 함께 맞대어 보는 일과 같다. 같은 현실과 그 이면을 탐구하면서도, 두 가지 다른 방법론을 동시에 사용하며 각자 다른 세계관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윤상윤 작가는 동시대 미술사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Gallery chosun will host "Sine Cera", Yoon Sang-yoon’s solo exhibition from May 25 to June 13, 2018. Yoon Sang-yoon is an artist who draws conceptual oil paintings with his right hand and spontaneous drawings with his left hand. The word Sine Cera, which means "without wax" in Latin, originated from ancient Roman period. Thin and light pottery considered to be workthy but not every potters were able to make them due to a lack of skill. And these deceitful potters applied wax on the pottery surface to hide the cracks. In the opposite true potters sought to ensure the authenticity of their perfection by using the phrase ' Sine cera ' meaning ' no wax '. In modern times, the term has become the root of word ‘sincerely’. Like this word, the artist wants to share the world of his skilled and sincere work through this exhibition.

Yoon Sang-yoon's right hand painting has triple structure consisting of water, figures and structure on top of it. Three worlds coexist in one screen. In the bottom of the picture, there’s ID which represents the unconscious world and there’s Ego, which coordinates unconsciousness and the consciousness, and Supergo as the conscious self that we exercise every day. As the artist said, the water at the bottom means Ego, the submerged part of the water means Id, and the components above the water represent Supergour. The right hand paintings show the frequent conflicts and consensus points between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in our daily lives, depending on Freud's psychoanalytical model.

Yoon Sang-yoon's left hand drawing is an example of the uniqueness of physical performance. This is linked to Marlice Merleau-Ponty's "body as an involved subject to the world". Compared to right-handed paintings, the left hand drawing is spontaneous and abstract. The faces of the figures in the drawings are transformed or simplified into unidentifiable forms. It's a metaphor for Ponty's concept of "la chair(flesh)". Ponty argued that since the physical world and the body are made of the same material (flesh), the body and the world are not distinct. Since individuals in the drawing can not be specified and each person does not exist as a disconnected entity, it is possible to read characters in a drawing as an attempt to incorporate them into a part of the world, not a disconnected subject. And the audience facing the work will be a part of the world at the same time, because they are made of same material as well. As Ponty said, "Being seen and Seeing is being reversed, it’s hard to say who is seeing and which is being seen, " If we can see through the primitive non-sensitive world behind visibility through the flesh and the physical sense as Ponty claims, this means we can sneek peek of the phyological world from Yoon sang-yoon’s left handed drawings.

Sine means ‘without’, Cera means ‘wax’. This cera, however, refers to a portrait cast in wax and is also used as a figurative noun for the face. So “sine cera” could also means " wax-free " and " faceless. " In Yoon Sang-yoon’s left handed drawings, there’s people with the non-recognizable faces. They do not want to end up in a visually distinguishable reality and want to be perceived as a sensibility from outside of the frame. If the pictures drawn with the right hand reveal a specific face and are a schematic of the Freudian view on the individual, the drawings drawn with the left hand are not dependent or explained by any system but rather exist as a hint that world is made of same material. Looking at Yoon Sang-yoon's right hand painting and the left hand drawing is like looking at the Freudian world and Ponty’s world. Yoon Sang-yoon holds a special position in contemporary art history as using two different methodologies simultaneously while exploring the same reality.



인터뷰
1. 이번 개인전 의 제목의 뜻과 최근의 작업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린다.
1. Please explain the meaning of the title of " Sine Cera " and about recent work.


이번 전시 제목은 Sine cera로 정했는데요. Without wax라는 의미로 옛날 로마시대 사람들이 도자기나 작품을 속여서 팔 때 금간 부분에 왁스를 메꿔서 완벽한, 한 번에 구워낸 한 번에 조각된 완벽한 물성인것처럼 속여서 파는 일이 많았대요. 그래서 sine cera 는 속이지 않았다. 는 뜻이라고, lost symbol 이라는 dan brown의 책을 읽다가 재미있어서 기억해둔 부분인데요, 그걸 전시 제목으로 쓰면 어떨까. 하게 되었습니다.

The title of this exhibition is . In the old Roman period, when potter sold pottery or artwork with flaw, they filled the crack with wax, as if they were completely carved or created in one piece. So Sine Cera means without wax, and also meaning not cheated. I read this interesting information from the book “lost symbol’ by Dan Brown and I thought maybe it could be the title of the exhibition.


2. 오른손 그림 내부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린다.
2. Please explain the structure inside the right hand painting.


제 작업은 3층 구조를 만드는게 제일 중요한데요, 맨 윗층에서부터 초자아, 자아, 무의식 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슈퍼에고, 에고, 이드 이런 단계로 구분해서 생각을 하는데요. 옛날 종교화들이 이런 방식을 많이 택하고요. 동양사상에서는, 나무 땅 속 나무 뿌리에서부터 줄기가 자라나 하늘을 향해 이파리를 펼친다. 라는 비슷한 비유적 구조도 있고요. 그래서 이런 구조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My work is to build in a three-story structure, from the top to down, there’s super-ego, the ego and the Id. This is Freudian structure. Many ancient religious paintings choose this similar structure. In Orient, there’s some kind of figurative structure that goes like this: the stem grows from the roots of trees in the ground and spreads leaves toward the sky. So I started working on this kind of structure like so many people before me had done.

맨 꼭대기의 초자아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철학적 의미보다는, 제 경험이 반영되어 있어요. 고등학교때 교실 책상에 무릎꿇고 앉는 벌을 많이 받잖아요, 그게 신체적으로 매를 맞거나 가학적인 행동이 아니라 단지 그룹에서 떨어트려서 소외감, 고립감을 주면서 벌을 주는 거거든요. 그때 바라봤던 풍경이 이렇게 작업을 하는 원인이 되었던것 같아요.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때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3개월 입원했었는데, 친구들이 축제기간에 가끔 병문안오면 그게 너무 부럽더라구요. 그들은 학교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데 나 혼자 병실에 있나 싶은 그런 감정들을 느꼈어요. 영국 유학갔을때도 완전히 그룹에 속하지는 못하고, 동양인으로서 그들을 관찰했어요. 완전히 그 그룹에 속하는게 아니라, 그 그룹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는 풍경. 이런 것들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The super-ego at the top reflects my experience, rather than Freud's philosophical meaning. There’s particular punishment in school, which you have to go kneel on the dest in the classroom. It’s not because physically beaten or sadistic, but it's simple alienation and isolation from the certain group. I think the scenery I saw at the time was what caused me to do this kind of work. And I was in the hospital for 3 months because I had a car accident when I was 2nd grade in high school, and I really envy my friends when they come to visit me in the hospital during the school festival. They were having a lot of fun at school and I was alone in the hospital. When I went to England to study, I didn't belong to the group entirely, but I observed them as an Asian. I don't belong entirely to that group, but I was able to look them from outside of them. I think this was interesting part. So I started this kind of work.


3. 오른손으로 그린 그림에서는 구체적인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와 같이 실제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3. Paintings drawn with the right hand show specific characters. Why specific people around you show up like this?


실제로 제가 관계를 맺은 대상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영국에 있을때 록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일본인 친구가 있었어요. 걔 자체가 작업이었어요. 음악을 하겠다는 일념 하에 비자 연장도 안하고 불법체류로 5년 있었던 아이였어요. 걔를 보자 마자 ‘아 얘가 내 그림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걔부터 섭외해서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런식으로 나와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그리면, 그 사람과의 경험과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실제 사람, 아는 작가, 학생들, 친구들을 그리기 시작했죠. 아주 모르는 타자를 그리는데에 거부감이 들더라구요. 예를 들면 아프리카 난민이 불쌍하니까 그에 감정 이입은 되지만, 걔를 그린다고 해서 그건 사실 모니터 화면 정도니까. 대화를 나눠본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고. 대상을 시각 정보에 의해 그리는 것과, 대화를 나누고 감정 교류가 되었던 사람을 그리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제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대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I started to paint theactual people around me when I was in England at first. I had a Japanese friend who was playing drums in a rock band. He was a piece of work. He didn’t extend his visa and was staying illegally in England for 5years just because he wanted to do the music. I thought, " Oh, he’s like coming out of my painting. " I think that's why I started painting people around me. I started painting real people, artists, students and friends, thinking that if I paint people who have a real relationship with me, then maybe my experience and feelings would be seen. I was very reluctant to paint the people I don’t know. For example, if you feel sorry for an African refugee, you can feel empathy for him, but if you paint him, you are actually painting a image from monitor screen. The person I've never spoken with, never touched. I think painting visual information is different from painting people who I had conversation with and had emotional interactions. So I actually started to paint people that I experienced and remember.


4. 오른손 그림과 왼손 드로잉의 작업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4. Describe the process of working with the right hand painting and the left hand drawing.


제가 오른손 왼손 그림을 구별하기 시작한건, 제가 원래 왼손잡이로 태어났는데 어렸을때 그렇듯이 부모님게 혼나고, 오른손으로 바꿔서 숙련을 한 결과에요. 당연히 기계적이고 숙련된 손이 되었는데, 왼손은 그에 반해,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좀 더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그림이 나오더라구요. 이런 차이를 그림 그릴 때에도 나눠서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서 오른손으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왼손은 그걸 벗어나서 더 자유롭게, 편하게, 생각나는대로 그때그때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갈 수 있는 분출구가 되는 것 같아요. 오른손으로 그리는 것도 재미있는데 왼손으로 그리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같이 하면 어떨까. 그래서 왼손, 오른손 나눠서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더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하려고 재작년부터 인상파 이전의 글레이징이라는 기법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튜브물감이 발견되기 전에는 안료가 비쌌거든요. 고가였기 때문에 안료를 조금만 쓰려고 흑백으로 밑작업을 하고, 그 위에 얇게 색의 레이어를 스무번 삼십번 쌓는, 2-3년에 걸쳐서 완성되는 그런 기법을 오른손 그림에 써야겠다. 그래서 글레이징 기법으로 그리게 되었죠.

I started to distinguish between the drawing of my left hand and painting of my right hand, which was the result of my parents being scolded at my left-handed born when like I was a kid. Of course, my right hand became a mechanical and skilled hand, while my left hand was a little bit more intuitive and spontaneous. I thought, what if I divide these differences into paintings? My right hand painting is more rational. The left hand drawings seem to be a getaway where I can express more freely, comfortably, and whatever I want to. So I divided my left hand drawing and my right hand painting and used them differently. In the past, there’s pre-impressionist technique called ‘glazing’. Before tube colors were invented, pigments were expensive. Because it was expensive, artists used black and white ink then use the pigment a little bit by little bit, and build the layer of color 20 to 30, and it costed then two to three years to complete the work. So I started to paint with a painting technique from the past.


5. 왼손 드로잉은 꿈 속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데자뷰를 불러 일으키는 듯 하기도 하다. 이런 왼손 그림은 기억을 기반으로 그리는 것인가? 아니면 상상해낸 장면인가?
5. Left-handed drawings can also look like scenes from dreams. It also seems to provoke deja-vu. Is this left hand drawing based on memory? Or is it an imaginary scene?


왼손 드로잉은.. draw라는 말은 뭔가를 ‘끄집어 내다’라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리다’라는 뜻보다는 ‘끄집어 낸다’ 라는 뜻에 맞춰서,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그리죠. 선을 처음 긋거나 뭔가 붓이 지나갔을 때 우연히 발견되는 형태를 연결한달까. 그래서 그때 그때 제가 뭘 그리는지 모르는 때가 많아요. 분노해 있을 때 그 분노의 감정을 그림으로 풀어내자, 할때 많이 사용되고. 즐거운 감정에도 사용되고. 그때 그때 저의 경험이나 감정들이 그대로 배설되는 느낌. 뭘 먹으면 뭔가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눈으로도 먹고, 귀로도 먹고, 촉감으로도 먹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더 즉각적인 반응.

Left-handed drawing ... I think the word draw means "pull out" something. Instead of painting, I unconsciously draw pictures based on the meaning of drawing when I draw with my left hand. It connects patterns that discovered by accident when the first line is drawn or something is passed by in canvas or paper. So, many times I don't know what I'm drawing. When I am angry, I think, ‘let's break the anger into pictures’, as well as when I experience pleasant feelings. It feels like my experience and my emotions are being excreted, just as something comes out of it, we eat with our eyes, our ears, our touch as well. A more immediate response to those things. I think.


6. 이전 작업노트에서 사람들이 모인 그룹이 곧 사회이고 나아가 국가이며, 그 권력에 흡수되기 위해서는 그룹의 정체성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라고 적으신 바 있다. 작가로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계신지.
6. In the previous work note, you wrote that the group where people gathered is a society, a country, and in order to be absorbed in its power, people tend to align themselves with the identity of the group. How are you going through this situation as a artist?


우리가 제일 긴장하는 부분이 대학입시. 대학에 들어가냐 못들어가냐가 결정되는게 입시잖아요. 아니면 회사 인터뷰. 그럴때 사람이 굉장히 긴장하죠. 이 그룹에 들어갈 수 있을것이냐, 못 들어갈 것인가. 동양인은 그룹 정체성에 좌지우지 되거든요. 우리는 어느 집안 출신인지, 가문이 어디냐도 중요하고. 대학이 어디냐. 회사가 어디냐. 내 정체성을 그룹 정체성과 혼동하죠. 그런데 이 정체성을 내가 얻고 싶으니까, 얻기 위한 첫 관문이 항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거든요. 그런 것에서 떨어져 나올때를 그림에서는 위로 떨어져 나오는 투사로 표현됩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그룹에, 동호회에 들어가더라도, 동호회 정체성에 나를 맞춰야 하는 거니까. 그런거에 너무 빠져들지 말자. 현대의 사람들은 개인화 되잖아요. 그런게 아마 인터넷이나 핸드폰 영향도 있겠지만, 점점 스스로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그런 것에 빗대어서 생각하려는 태도가 많이 없어진것 같아요. 아파트는 몇 평. 내 차는 무엇. 자동차의 성능이 마치 나의 성능인 것처럼 으시대던게 없어진 세상이. 내 가치가 중요한거지, 남들이 하니까. 이런 것에서 점점 세대가 바귀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긴장하죠 인터뷰 같은 것 할 때. (그래도)그런걸 알면서 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여기를 들어가야 해 이런거랑은 다르니까. 그리고 작가는 혼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으니까. 일반적인 회사원들과는 아무래도 태도가 다르죠.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는 사람. 그렇게 살고 있는거죠.

The most tense part about our college entrance exams is deciding whether to enter or not. Or a company interview. People get very nervous. Can you join this group or not? Asians are swayed by group identity. Where we come from is important. What university did you graduate? What kind of company you are working? People tend to confuse their identity with group identity they belong. But when I want to get this identity, the first hurdle to get it is the interview and it always creates tension. When you step away from something like that, in the picture, it's like the projection between the different scales. because in our society, we have to adapt ourself to the identity of a club, or group. Let's not get carried away by that. Today's people are personalized. It may have an caused from the Internet or smart phone, but I think there’s a tendency to to think that what important is myself. Such as what kind of car I drive? A world where the value of someone’s car seems to be his value, is changing. I think the generation is getting out of this. Of course, I'm nervous when I do things like interviews. But there’s a difference when you are aware of it. As artist, I spends much more time alone. It's a different attitude than normal employees. An observer at a distance, That's how I live.


7. 최근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7. What are your recent interests?


초등학교때 배드민턴 부였거든요. 배드민턴 치는 것 굉장히 좋아했는데, 요즘 클럽에 가입해서 레슨도 받고, 일주일에 세번씩 나가서 클럽 활동을 하는게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운동하니까 어렸을 때 기억도 나고 하는데. 배드민턴의 세계가 굉장히 깊더라구요. 고수를 깨면 또 고수가 나타나고. 아. 대단하구나. 십년은 더 할 수 있겠다. 동호회 레벨이 초심, D조.. A조까지 있는데. 대회를 통해서 승급을 한대요. 우승, 준우승 하면 한 조씩 올라간대요. 그래서 A조가 되려면 적어도 5년이 걸려요. 할 만한 운동이다.

I played badminton in elementary school. I loved playing badminton, recently I joined a club and took lessons. Going out three times a week and doing club activities is my recent interest. It reminded me of being out there and playing badminton as I was a kid. The world of badminton is very deep. If you break the master, you will see another master again. I thought, ‘Oh, that's great. I could do this ten more years’. The club level starts from beginners, and there is group D, C, to the Group A. They're getting a promotion through the competition. If you win the championship or finish second place, you will go up. " So it takes at least five years to become a group A. It's a good exercise.


8. 그림 속에 고전적인 외향의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동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
8. There are also classical characters in the painting. Sometimes animals appear. What does this mean?


고전적 이미지를 차용하는것은, 그때 당시 미술 수업 광경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에요. 실제 모델을 두고 둘러싸고 그림을 그리는 것. 롤모델이라는 것을 강요받고, 남들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우리나라 미술 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걸 강요받던 시대의 모습이 제가 생각하는 현대인이 강요받는 모습과 같지 않을까. 실제 모델을 두고 사생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라는 생각에서 고전적 인물들이 등장하죠. 동물은 제가 은유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옛날에 백조를 많이 그렸었어요.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그렸다기 보다는.. 영국에서 유학할 때 우연히 들었는데, 모든 영국에 있는 백조는 여왕의 소유기 때문에 아무도 죽일 수 없고, 살 수도 없고. 저는 무슨 동물이길래 여왕의 소유일까 생각했어요. 그걸 은유적으로 드러내려고 시작했던 것이 백조, 사슴, 고래, 학. 상징적 은유로 등장하기 시작했죠.

I borrow classical images because I enjoyed imagining art classes at the time. Drawing around a real model is the same as art in Korea, which is forced to seek for a role model and draw just like others. Wouldn't it be the same as the days when we were forced to do this and that things? It is interesting to see a scene in which people dedicate from a real model. I started using animals as metaphor from the point when I was in England. I drew a lot of swans in the old days. I draw them because not because they are graceful and beautiful, I happened to hear that when I was studying in England, every swan in England is property of the queen, so people can't kill them, and people can't buy them. I wondered what makes the swans to be Queen's possession. And I started to make it a metaphor, a swan, a deer, a whale, a crane.


9. 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물에 관련된 특별한 기억이 있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물이 왜 자주 등장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9. The image of water often appears. Do you have any special memories related to water? If not, please explain why water appears so often.


물이 차 있는 상상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어요. 수영을 한창 배웠는데 그때는 전지구가 물에 잠겨서 수영해서 학교에 다니면 되게 재미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수영도 좋아하고, 물이 있는 풍경을 멈춰서서 한참 바라보고. 저수지나 계곡, 바다. 물이 있는 풍경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취향인데. 물을 그리기 시작한건 아무래도 3층 구조를 드러내고 싶었던 욕망이 컸죠. 대학원 다닐때. 그럼 밑의 층엔 뭐가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물이 가장 적당하더라구요. 물이 갖고 있는 의미가 굉장히 많잖아요. 그걸 다 포함할 수 있겠다. 어쩔 때는 물 속에 잠기기도 해서 투명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물 위에 떠서 대상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모습도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다 은유적으로 물이 대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물에 공포가 있는 사람들은. 그런걸 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걸 다 은유적으로 담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에 물을 그리기 시작했죠.

Since I was a kid, I've been imagining water filling the world. I learned how to swim as a kid. I liked swimming, and I used to stop and look at the view of the water. Reservoir, valley, sea. I think I liked the scenery with water. It's a personal taste. I started painting the water, and I had a strong desire to reveal the structure of the third floor. When I was in graduate school, I asked myself, what is on the lower floor in my painting? I thought about it and the water seems to suited best. Water has so many meanings. I can include it all. Sometimes it can be invisible because people are submerged in water, or people can float on water and reflect themselves like a mirror. And I thought, you know, that's what water could do. Some people are afraid of water. For those who have fear in the water, the impace of the water may vary from person who feels differently and that’s interesting too. That’s why I started to draw water.

사람이 우뇌, 좌뇌를 다르게 쓴다고 하잖아요. 직관적인 걸 쓸때는 우뇌를 쓰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쓸 때는 좌뇌를 쓴다고 하는데.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생각하면. 동양은 고맥락적이래요. 반면 서양은 전맥락적이래요. 그 방식이 그림에서도 유화는 수정과 덧칠을 통해 완성을 향해 간다면, 동양화는 한 번에 그려내야 하는. 이분법적이더라구요. 그림도 그렇게 그리는 것 같아요. 오른손은 과거의 전통 기법의 고맥락적인 방법으로 쌓아올려서 완성을 향해 가고, 왼손 드로잉은 동양화처럼 경험이나 기억 감정에 집중했다가 한 번에 끝내는. 그런게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작업합니다.

You use the right side of the brain and the left side of the brain differently. We use the right side of the brain for intuitive things, and the left side for rational and rational ones. If you think of the East and the West as two sides I heard that the East is highly contextual. The West, on the other hand, says orderly contextual. If the right handed oil painting completes by modification and layering, the left handed drawings comes from concentration about some feelings or experience and done at once. I work thinking such things. As dichotomous way of some kind.



이미지의 기원 또는 우상이 파괴되는 곳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각계각층의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일상의 평범(平凡)이 가득 찬 곳에 있다. 무언가 가득 찼다는 느낌이 드는 곳에서 회합을 갖고 있다. 불안하게도 극단적인 투쟁과 결기가 벌어지는 어떤 사건의 현장일지도 모르는 곳임에도 평온하고 평온한 풍경이다. 이곳은 존재하지만 존재한다고 말 할 수도 없는 공간이다. 한 시인이 최근에 발견한 사실 또는 단어를 발표하거나, 풀리지 않던 우주의 비밀을 연산하는 수학자가 등장하는 곳이다. 꿈속의 이상적인 화실이 등장하고 멋진 예술가와 그의 모델이 있다. 아이들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 모인 것처럼 보인다. 나룻배는 강 위를 거슬러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무언가에 홀려있거나 홀려있음 그 자체로 등장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 그러나 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장면들의 세계다. 이상한 빛이 비치고 푸른 하늘에 물고기들이 떨어져 내리는 날 집밖으로 나선 여행자들의 회합일지도 모른다. 우연과 필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던 곳에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같은 문제로 당황하고 있는 낮선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된. 사람들은 배우고 경험하고 성장한다. 만남과 대화는 개인의 진화(進化)를 상기시킨다. 개인의 성장은 일개 개인의 성장이 아닌 그 개인이 속한 전체 종의 성장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더디더라도. 익숙한 듯 기이한 풍경. 모호하고 복잡한 경우 잠시 머물게 되는 사람의 의식 속의 어느 공간. 그곳에서 다른 존재로 변신한다. 이곳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모여 있는 곳으로 메마른 공기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액체로 가득 찬다. 물속에서 유영하던 아주 작은 존재에서 점차 스스로 호흡하고 자의식을 갖고 자신과 이들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강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유비(analogy)처럼 유동하는 세계는 무수한 차원으로 분해되기도 하고 하나의 몸으로 뭉쳐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불려와 있는 곳은 마치 미드의 한 시즌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시즌이 되면 이 드라마는 같은 듯 다른 흐름으로 유동하는 또 다른 드라마가 될 것이다. 각각의 차원으로 무한히 분해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나가는 것은 장신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것이 부재하게 되는 공간에서 불굴의 헤파이토스가 마술을 부리는 곳이다. 이미지는 마술처럼 한 방울의 액체와 약간의 무기물을 재료로 화려한 광채를 뿜는 운명으로 변화한다. 밤하늘의 성좌처럼 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을 격해서 감지되는 이미지는 본래 신비인 것이다.

윤상윤의 그림은 정보의 바다에서 섬처럼 격리된 이미지들이 한 장소에 모인 마술적인 혼융의 풍경이다. 이미지는 미지의 수상도시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가 생각함으로 해서 그것은 존재하게 되었다. 존재의 부재에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불안의 숙명을 가로지르는 노동이다. 아름다우면서도 불길한 풍경이 화가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기원을 알 수 없고 그 최종 국면도 알 수 없는 무한히 반복되는 변형하고 증식하는 이미지들은 일견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신의 창조와 생명력의 분출에 휘말려 낯선 곳에 모여 공간을 만들어내는 윤상윤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거장 뫼비우스(장 지로Jean Giraud)가 창조한 세계와 거울상처럼 닮았다. 이곳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가 창조한 이미지의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안과 밖, 위와 아래,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가 없는 일상을 비틀어 놓은 세계. 그곳의 풍경은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처럼 세계를 비틀어 구조와 인식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재현한다. 실재와 허구가 동일한 존재의 무게를 가지고 우주의 법칙이 동일하게 작동하는 세계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동시에 부재하기도 한다. 동양과 서양이 혼융되는 곳이기도 하다. 개인의 경험이 개인의 영역에 갇혀있지 않은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 될 수 도 있는 세계의 풍경은 이렇지 않을까.

윤상윤의 경험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절대적인 평범과 한 재료와 한 사건에 깊이 내려가는 장인의 태도 단지 그것이다. 여기에 이미지를 둘러싼 모든 신비가 있다. 그것은 화가의 운명이자 이미지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화가의 이미지는 망각의 강을 건넌 운명인 것이다. 베니스를 닮은 장소는 바로 그 닮음으로 인해 불안을 예감하게 한다. 그곳은 망각의 강 어딘가에 자리한 미지의 장소가 아닐까. 사람들은 운명에 붙들려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으나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작가의 재능, 노력, 열정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설득하고 있으나 서로는 사실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다른 시간과 장소의 존재들이니 교감을 이루기는 난감한 것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세상을 창조하고 밤을 분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또 사람들에게는 물의 운명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으로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변화하고 유동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의 비극성에 사람들은 공감한다. 화가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또한 그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윤상윤의 이미지는 바슐라르의 한 방울의 물과 동일한 메타포이다. 이곳은 물위의 알렉산드리아처럼 세계의 지식과 정보와 존재가 모여 있는 도서관의 도시이자 역설적이게도 신이 부재하는 곳이기에 인간이 신의 역할을 부여받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를 창조하는 노동과 이미지의 기원이 되는 장소 말이다. 모든 가치와 결별하는. 끔찍한 환각과 망각이 모여드는 곳. 세상의 모든 관습과 언어, 관념과 우상이 파괴되는 그리하여 신마저 해체되어 새롭게 출현해야하는 풍경은 이럴 것이다. 이미지의 기원 또는 이미지의 운명은 존재가 쉼 없이 유동하는 곳에 있다.



새로움과 이질성을 위한 전(全)방위적 길트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윤상윤의 ‘right & left’전은 좌우 대칭의 유기체에게 가장 기본적인 질서 감각을 부여하는 오른쪽/왼쪽이라는 공간적 위상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다룬다. 의식/무의식 이라는 심리학적 관계는 예술에 있어 기본적인 관계인 이성/직관과 직결된다. 소통 방식으로서 예술은 기본적으로는 언어, 즉 이성에 속하지만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직관의 힘을 용인하고 요구한다. 직관은 이성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되며, 원초적 질료로부터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언어란 차이의 체계일 뿐,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면 실체는 결코 표현을 획득하지 못한다. 유명 철학자의 언명을 흉내 내자면, 언어 없는 실체는 맹목적이고, 실체 없는 언어는 공허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 온 만큼 언어의 힘은 더 강력해지고 있으며, 세상은 온통 코드로 덮여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미디어와 달리 신체적 감각에 깊이 의존하는 회화는 여전히 실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
전시부제의 한편을 이루는 ‘right’의 사전적 정의는 ‘오른쪽의, 오른 손의’ 외에, ‘옳은, 정당한, 정의로운, 공정한, 선량한, 정확한, 타당한, 정상적인, 제정신인, 좋은, 질서정연한, 표면의, 정면의, 안성맞춤의, 적절한, 진정한....’ 등으로 열거될 수 있다. ‘left’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다. 오른쪽/왼쪽은 위치관계 이외에 다른 점이 없는 짝패이지만, 인간 사회 속에서 차이는 상징적 구별을 파생시킨다. 윤상윤의 작품에서 좌우라는 수평적 차이는 상하라는 수직적 차이로 전이된다. 왼쪽은 무의식, 오른쪽은 의식에 해당된다. 이번 전시에서 떠오르는 대로 손가는 대로, 그리고 수정 없이 한 번에 그려진 드로잉들이 무의식이 분출된 흔적들이라면, 이드/에고/수퍼 에고라는 정신분석의 3단 구조를 떠올리는 구성의 회화는 다소간 의식적이다. 그러나 의식 역시 무의식과의 역학관계 속에 있다. 왼손잡이였다가 ‘바르게’ 교정을 받은 작가에게, 회화 작업과 달리 왼손으로 하는 드로잉은 교육에 의해 후천적으로 습득된 기교를 배제하게 한다.

왼손으로 그리기는 의식에 의해 억압되어 잊혀 진 것들을 호출한다. 여러 크기와 형태의 액자에 하나씩 담겨 있는 드로잉들은 상호 연관관계를 파악하기 힘들고, 제목과 이미지 간의 관계도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그 출처 또한 불분명하지만 작가에게는 무의식의 속기록 같은 현실성과 진실성을 가진다. 이 단편들에는 연극의 한 장면, 또는 우화나 동화, 소설, 일상과 사회적 관례에 대한 언급 등이 담겨있다. 그것들은 영화감상이나 독서, 뉴스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지 모르지만, 원래의 내용과 형식으로 환원될 수 없을 만큼 변형되었다. 그것들은 현실의 한 부분이 작가의 감성을 건드려, 무의식의 심연으로 건져 올려 진 수수께끼 같은 단편들이다. 이 세상에는 모호하지만 절박하고, 분명하지만 진부한 것들이 있다.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전자의 세계가 예술의 진정한 터전이다. 윤상윤의 작품에서 회화는 드로잉에 비해 일상의 장면들과 좀 더 가깝다. 그러나 사진과 상상 등, 서로 다른 차원이 짜깁기 된 장면은 환상과 광기의 무대인 드로잉만큼이나 부조리하다.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회화도 무대이다. 좀 더 의식적으로 짜여 진 무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많은 회화의 기저 면에 깔린 물이다. 그다음 층에는 상위에 배치된 어떤 상징에 관심이 쏠려있는 군중들이다. 정신분석학적 모델과 비유하자면 물은 이드, 군중은 에고, 최상층부는 수퍼 에고를 가리킨다. 이러한 이론적 모델과의 중첩에도 불구하고, 언뜻 일상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은 세부분의 구조가 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구별되는 실존의 세 평면일 뿐이다. 실내인지 외인지가 모호한 공간 속에 종종 등장하는 나무들은 지하-지상-천상 등 세 가지 차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우선 무의식을 상징하는 물은 공포 또는 신비의 기원인 원초적 현실계가 아니라, 산란하는 오후의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풀장의 물처럼 얇게 찰랑거린다. 그것은 물에 투사된 인류학적 상상과 사뭇 거리가 있는, 이를테면 무늬만 물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무엇이 튀어나오는 원초적 무질서의 저수지가 아니라, 상식이 지배하는 지상의 질서를 반쯤은 투명하게 반영한다. 그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다면 금 새 그 정체가 드러날 것 같다.
그다음 층인 에고 부분, 즉 말 그대로 나뉘어질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의 영역은 관심을 공유하는 일군의 집단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영국에 유학 가 있는 동안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접하게 되는데, 그가 아르바이트나 수업을 통해 만났던 일군의 집단들은 각자의 영역이 있었다. 영역은 그 안에 속한 이를 보호해주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는 배타적인 틀로 작동한다. 작가는 이방인에게는 각기 다르게 다가오는 집단 정체성에 원활히 속해야만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사회 속의 개인은 독자적인 의미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인 가변적인 것이다. 현대사회는 개인을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대개 익명의 생산자이거나 소비자로 규정된다. 모여 있는 군중들로 나타나는 에고 부분은 타자를 내투사(introjection)함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과정이 선명하다. 특히 낯선 사회에 가서 집단과 동일시될 수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체성 확보는 긴급한 권력의 문제이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정/부정의 체계를 담지 할 수 있는 주관성, 또는 사회적 유형 등을 재현하는 주관적인 구조화 과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정/부정의 대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대립을 통해 공고한 동일성이 구축된다. 지배적 사회는 우연의 편린들을 보편과 필연으로 강요한다. 그것이 개성에 대한 우상숭배에 가까운 현대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자아나 주체에 대해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이다. 탈인간주의까지 주장하는 현대예술은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주체의 틀을 깨기 위한 몸부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정된 주체를 흐트러트리는 윤상윤의 드로잉은 타자로서의 자신이 복귀하는 무대이다. 마지막으로 수퍼 에고 부분은 미술대학의 학생이었던 그에게 흔히 아름다움의 모델로 설정된다. 그것들은 사슴, 백조, 학, 모델이 될 만한 외모 사람, 작품, 물건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나 진실에는 잔인함이 깃들여 있듯이, 그 기원에는 작가의 트라우마가 있다.

고등학교 때 컨닝을 하다 발각되어 홀로 책상 위에 앉는 벌을 서게 된 그에게 최상위에 놓여있는 모델이란 사회의 상징적 질서가 규정하는 옳고 그름의 범례이다. 개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에 의해 규정될 뿐인 상징적 질서는 폭력적이다. 동시에 나 이전에 존재하며 주체를 구조화하는 이 질서는 신성하게 다가온다. 수퍼 에고는 억압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수퍼 에고의 모델은 구체적 물질성이나 육체성을 휘발시키고 반투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야 하는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지상세계는 이러한 이상적 원형으로부터 파생된 모조들(simulacrum)로 가득하다. 그러나 윤상윤의 작품에서 집단화된 개인, 또는 군중의 관심사인 원형적 모델은 그것들이 깔고 있는 물처럼 얇고 일상과 잘 구별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때로 단 위에서 내려와 있고 기저 층을 이루는 수면 위에 직접 떠 있기도 한다. 대개 한 칸의 단으로만 구별된 공간적 배치는 수직적 위계 구조를 이미 전복한다.

그것은 주변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자연, 인간, 사물일 수 있다. 그것들은 좌/우처럼 공간적 차이만을 가진다. 세 가지 차원은 상호관계 속에서 한데 얽혀있다. 윤상윤의 그림은 그 세 가지 차원이 주체라는 장에서 서로 만나 관계망을 이룬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구별하는 삼계의 차이도 분명히 새겨있다. 흐르기 보다는 고여 있는 것에 가까운 물은 무의식처럼 시간성을 가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서 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은 무시간적이라고 말한다. 그 과정들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시간이 경과에 따라 변화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무의식은 의식이나 초자아와 달리,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빛을 비롯한 주변의 환경에 따라 복잡하게 일렁이는 물결은 종점을 가지지 않은 채 영원히 유동하고 있을 뿐이다. 연속성을 잃은 채 어지럽게 산란하는 물결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놓여 진 분열과 간극을 나타낸다.

그러나 잠재성과 현실성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그의 작품에서 무의식은 심층을 이루고 있지 않으며, 어떤 현실의 깊은 원인이 된다기보다는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현실과 함께 작동한다. 그것은 거울,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방식인 이런저런 차원의 인터페이스처럼 어디에나 편재한다. 얇은 물이 보여주는 어지러운 일렁임은 고정된 경계를 무너뜨린다. 유동하는 거울은 현상을 가상화한다. 수직적 위계를 가지는 구조 또한 약화된다. 그것은 서로를 반영하는 열린 구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상윤의 그림에 약한 구별 내지 구조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술이라는 것이 원초적 질료(무질서)와 역학관계를 가지는 형식(언어)라는 것에 있다. 지배적 제도는 역사적으로 정립되어온 형식을 교본화 함으로서 예술의 이질성을 순화시킨다. 교육과 학습의 대상이 아닌 것을 코드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에는 왠지 예술에 대한 사회의 복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무리 코드화가 촘촘히 진행되어 왔어도, 사회인과 예술인 사이에는 아직도 동일시하기 힘든 간극이 있다. 예술의 자유가 사회 쪽으로 전염되어야 하지 그 반대여서는 곤란하다. 오늘날 작가들이 이름도 논리도 시간성도 없는 무의식에 주목하는 것은 예술을 사회의 규칙에 따라 길들이고 관리하려는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무의식은 사회적 규칙을 따라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활성화된다. 여기에 결코 가두어질 수 없는 예술의 혁명적인 힘이 존재한다. 작품의 새로움 또는 이질성은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에 틔워 놓는 것에 있다. 무의식은 무시간적이고 무정형적이지만 마그마처럼 들끊는 강력한 에너지원이며, 이 강력한 실재는 ‘상상과 상징의 기반을 이루는 물질적 기질(질료)’(라깡)이다. 이 물질적 기질의 흔적들이 드로잉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 원초적 질료로부터 의미와 주체가 생성된다. 그의 그림은 무의식처럼 고여 있는 물을 담고 있는 원초적 그릇이다.

그것은 무의식과 의식의 미동을 지진계처럼 포착한다. 의식은 겉으로의 질서와 달리 분열과 간극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무의식은 언제라도 그 틈으로 분출될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그 역시 잘 조절되지 않으면 무용한 발산이나 누수로 곧 고갈되고 말 것이다. 윤상윤의 작품에서 수퍼 에고의 영역에 자리한 상징적 질서는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의 영역이다. 이 질서가 없다면 고차원적인 소통양식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은 커녕 기본적인 지각과 의미전달, 그리고 주체의 자기 유지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질서에만 따른다면, 새로움과 이질성은 불가능하다. 무의식은 정립되어 있는 존재의 틀과 고정된 의미를 변형 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상식을 준수하면서 억압적 질서를 재생산할 따름인 일반인과도 다르게, 그리고 언어자체를 잃어버려 광기와 무정부 상태에 빠진 광인과도 다르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고삐를 함께 쥐고 있다. 단지 서있거나 걷는 것을 넘어서, 날아올라야 하는 예술은 좌우의 날갯짓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시제목Sine cera

전시기간2018.05.25(금) - 2018.06.13(수)

참여작가 윤상윤

초대일시2018년 05월 25일 금요일 05:00pm

관람시간10:30am - 06:30pm

휴관일월요일 휴관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조선 gallery chosun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4 (소격동) )

연락처02-723-7133

Artists in This Show

윤상윤(Yoon Sang-Yoon)

1977년 출생

갤러리 조선(gallery chosun) Shows on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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