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의 재료: 타자, 파티클, 시간’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페인팅에서 출발한 비디오 작가들이 풍경과 사람의 얼굴을 다루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없이 남의 얼굴을 그리고 사물을 그리고 풍경을 그리던 습관은 손에 쥔 매체가 카메라가 되어도 그대로 렌즈를 밖으로 돌린다. 타자를 기록하고 묘사하는 것은 예술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작가 자신이 되는 순간 작가는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타자화하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이 과정은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해주는 예술적 실천이기도 했다. 타자에 대한 기록이 세계에 대한 묘사라면 자아에 대한 기록은 단순한 기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어떠한 인간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고백이 된다.
백주미는 <320개의 자화상>을 위해 지난 2년간 스스로가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카메라의 렌즈를 자신에게로 돌려 수많은 셀피를 찍었다. 이 수 백장의 자화상 사진들은 백주미가 자신의 다양한 감정과 역할의 변화를 의미한다. 백주미의 이러한 밑 작업은 미국의 개념미술가 로니 혼(Roni Horn)의 ‘당신이 날씨다(You are the Weather)’와 같은 초상 사진 작업을 생각나게 한다. 두 작가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신의 사진을 거의 같은 구도로 찍어서 작업하는 방식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혼이 차이들을 지닌 사진들을 연속으로 보여줌으로 시시각각으로 미묘하게 변하는 존재를 과연 동일한 존재로 여길 수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면, 백주미의 작업은 비디오 편집을 통해서 수없이 분해되고 재구성되는 자아에 대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수 백 장의 초상화 디지털 사진들은 한 줄의 픽셀별로 쪼개지고 알고리즘에 의해 재조합되어 순간적으로 새로운 자화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하나의 자화상을 제시하는 대신 이 모든 과정의 파편화되고 재조합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구성해내고자 한다.
<320개의 자화상>에서 자화상의 디지털 파편들을 쪼개는 방식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담보한다. 자유주의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말 그대로 인디비주얼한 존재로서, 독립적이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었다. 생물로서의 인간은 심장과 뇌를 쪼갤 수 없는 존재이고, 데카르트적 정체성은 인간의 고유한 의식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포스트휴먼이라고도 불리는 현재의 인간은 ‘쪼개지는 존재’ 즉 디비주얼한 존재로 인식된다. 유기체로서의 사람의 몸은 장기이식의 예를 들지 않더라고 얼마든지 분리하거나 기계로 대체될 수 있다. 캐서린 헤일즈가 주장하듯이 포스트휴먼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으로 이뤄져 있으며 정보와 물질로 구성되어 경계가 계속해서 재구성되는 존재다. 백주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은 수많은 입자로 쪼개지는 존재이자 그것들의 랜덤한 조합조차 어떤 알고리즘을 통해서 일어나며 어느 한 순간에 또 다른 인간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분해한다면 다른 순간의 입자들과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다. 백주미의 입자들이 보여주는 결합은 우리의 존재가 여러 다른 디비주얼들로 이뤄진 멀티 디비주얼임을 보여준다.
<연결 PtoP>는 디비주얼한 개체가 하나의 개체로 묶여서 인디비주얼로 여겨지고, 이 다수의 인디비주얼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이미지의 입자들로 잘게 분해되어 있다가 다시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목의 P2P(peer to peer)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 동료들 혹은 또래 친구들끼리의 연결을 의미하며, 원래 모든 컴퓨터가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기능을 하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컴퓨터 용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단순한 네트워크 관계를 의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생산하는 공유의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결 PtoP>는 동등한 여러 관객들이 같은 위치에서 머무는 시간을 보낼 때 계속해서 이미지와 관계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이 작품은 또한 입자에서 입자로의 연결(particle to particle)로도 볼 수 있다. 카를로 로벨리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루프양자중력’을 설명한다.
‘루프양자중력’이라는 이론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해 발견한 것과 세상이 호환될 수 있도록 하는 구조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중략) 이 이론의 핵심은 공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무한하게 나눠지지도 않지만 알갱이로, 즉 ‘공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프(고리)는 이 아주 미세한 원자들이 모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비슷한 것들과 ‘고리로 연결’되어 공간의 흐름을 이어주는 관계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로벨리는 이러한 공간 입자들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간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물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 양자들 간에 발생하는 사건이 세상과 시간의 원천이다. 백주미의 <자화상 그리는 법>에서도 사건이 일어난다. 화면 너머에 타자가 존재해야 하고 그 타자와 나의 움직임이 일치하는 사건이 일어나야만, 그 교차 부분에서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세상을 채우는 사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이 공간 안에서 만들어 내는 사건들이 결국 세상을 채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사건이 일어나는 핵심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를 의식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관객들이 수행하도록 한다.
<자화상 그리는 법>이 사건과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라면
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 시공간의 장을 인식하도록 해준다. 는 작가가 경험한 다양한 시공간의 사건들을 마치 빠르게 움직이는 열차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처럼 보여준다. 그 풍경은 경험하는 주체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 강렬한 것과 희미한 것, 지속되는 것과 찰나적인 것 등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이다. 다양한 빛의 레이어들로 표현되는 시간의 풍경들은 백주미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한 가지 강렬한 경험과 관련된 사건을 생각할 때, 예를 들면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사건 같은 경우에, 우리는 이것이 한 공간에서 약 두 시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도 공간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처음으로 영화를 본 사건과 그에 대한 나의 시간은 무엇일까. 로벨리에 따르면 사건은 공간 양자와 물질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며, 시간은 오로지 이러한 과정이 발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환영이나 희미한 모습에 불과하다. 에서는 이 희미한 시간의 모습들이 작가가 느끼는 상대적인 시간의 속도에 따라 움직이며 관객들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통찰을 경험하도록 한다.
전시의 타이틀인 <자화상의 재료: 타자, 파티클, 시간>은 공간 자체라고도 볼 수 있는 파티클과 타자와의 관계인 사건 그리고 이를 비추는 희미한 환영과도 같은 시간을 다룬다. 이 자화상의 재료들은 곧 우주의 재료이기도 하다.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며 우리역시 우주 속에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계속 스스로를 성찰하고 지식을 키우며 성장하는 존재다.
*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김현주 역, 쌤앤파커스, 2014 전시제목자화상의 재료:타자, 파티클, 시간전
전시기간2018.03.21(수) - 2018.03.27(화)
참여작가
백주미
관람시간11:00am - 06:00pm / 월요일_12:00pm - 06: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팔판동 115-52 )
연락처02-737-4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