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성의 느림: 정재규의 작품세계
동양과 서양 사이
프랑스에서 체류하고 있는 한국 작가들 가운데서 정재규는 그가 보여주는 창의성뿐만 아니라 엄격한 작업 방식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작가에 속한다. 그는 삶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두 개의 세계를 잇는 진정한 다리로서,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예술 개념을 융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재규는 사진작가이다. 아니 ‘조형사진’ 작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중적인 접근방식을 취하는 바 우선 자율적인 기호체계로서의 회화 언어를 생각하고 이어서 비대상적인 기호체계를 통해서 현실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조형적 사고를 배태한 유럽의 큰 흐름 - 특히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큐비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등 - 을 아주 깊이 있게 연구했다. 그는 잠시 회화작업을 시도하다가 사진의 힘에 사로잡혔다. 사진작업 초기에는 그가 지시적이고 자료적인 차원에서 사진을 사용했다면1991년부터는 ‘조형사진’ 작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이때 정재규에게 있어서의 사진이란 실재에 대한 프랙탈적인 시각을 작품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가시적인 것의 근본적 해체라고 할 수 있는 ‘자르기 기법’(découpage)을 통해서 그는 순수한 조형적인 접근 방식에 따라 실재를 재구성하는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몬드리안처럼, 정재규의 접근 방식은 반개인주의적이며, 반주관적이고, 익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을 통해 세계의 진정한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익명성 속에서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재규의 작품에서 동양은 비주관적 차원과 심오한 지혜의 추구에서, 서양은 기호들의 자율적인 힘에 대한 사고와 순수한 조형적인 시각을 열어주는 기호들의 가능성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 나타난다.
연구 시기
서울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정재규는 1977년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다시 대학생이라는 쉽지 않은 신분, 즉 알고자 한다면 배워야 하는 신분이 되었다.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는 우선 프랑스어를 배우고 대학에서 큐비즘과 사진에 관한 논문 연구를 하다가 이후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과 절대주의에 관한 논문 연구를 한다. 물론 데 스틸과 몬드리안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다다, 초현실주의, 미래주의, 바우하우스가 나타나고 전설적이면서 획기적인 인물인 마르셀 뒤샹이 꽃을 피우던 20세기 초기의 서양 미술사를 알고자 했다. 게다가 그는 철학과 미학에서의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을 연구했다. 그리하여 그가 현재 재불 한인 작가 중에서 20세기 서양 미술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전문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재규는 예술가이지 학자가 아니다. 이는 그의 모든 연구가 혁신적인 창조작업을 하기 위한 것이지 지식의 재생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장소를 생각하다
프랑스에 도착했을 당시 정재규는 회화작업을 잠시 시도했으나, 개념 미술 및 대지 미술과 연결된 사진 작업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장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그의 작업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는 정재규가 네 가지의 의문을 결합하는 시기로서 그의 작업 이력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첫 번째 의문은 실제 공간에 직접 개입하는 것으로서의 예술, 다시 말해서 대지 미술과 관련된 작품 활동에 관련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런 작업을 통한 작품의 위상 자체를 문제시 삼는 데 있다. 세 번째는 지시적, 또는 현실 포착이라는 사진 개념에 근거한 설치 작업들과 그 설치들을 찍은 사진에 대한 것이다. 네 번째는 설치 또는 작가적 개입에 의해서 장소(lieu)가 위치(site)로 변형되는 순간으로서의 작품에 관련된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행위들을 통해서 예술의 힘이 표현되고 작품의 존재론적 차원이 드러나게 된다 할지라도, 이 때의 흑백 사진들은 실제 상황에 대한 문서나 기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메타모포시스
대지 미술을 시도하는 연구작가에서 순수 ‘조형사진’ 작가로의 변신은 세 시기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 번째 시기는 이우환 작가가 정재규의 장소에 관한 사진 설치 작품을 선택했을 때이다(1976). 두 번째 시기는 그의 옛 대학 은사로 후에 미술관장이 된 전성우교수와 함께 남프랑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에 갔을 때이다. 생트 빅투아르 산은 폴 세잔에겐 땅과 우주를 통해서 울려나오는 창조적 힘을 뜻했다. 정재규는 세잔이 보지 않았고 그리지 않았던 생트 빅투아르 산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세 번째 시기는 그가 논문을 포기하고 아르스날 소나무 협회의 아뜰리에로 입주했을 때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변화는 2년도 채 안 걸린1989년과 1991년 사이에 일어났다.
14년 간의 고된 노력 끝에 그는 지성적 작가로서 완전한 입지를 갖추게 된다. 그가 찍은 이미지들은 컬러 사진이었지만 현실을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에 머무를 수 없었을뿐더러, 머무르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몬드리안을 연구한 그의 사고는 사진을 통해서 참신하고 기발한 또 다른 길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창작하도록 했다. 그는 사진작가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시각예술가이다.
창작의 형태
정재규의 예술적 독창성은 ‘이면(裏面, l’envers)’이라는 핵심적 개념과 사진 이미지를 5~10mm의 폭으로 가늘고 길게 ‘자르는 행위(découpage)’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생트 빅투아르 산의 이면을 촬영한 것은 우리의 습관과 식별력을 활용한 상대적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또 다른 길을 모색하려는, 즉 ‘또 다른 시선’도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사진들이 아무런 효과도, 특별한 미학적 추구도 없이 50x75cm의 크기로 인화되었다는 그 자체는 분명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재규는 가시적인 것의 진부한 모습과 사진 이미지의 지시적 즉물성을 동시에 과감하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체계적인 기법으로 사진 이미지들을 일정한 폭으로 길게 자름으로써 그는 사진이 강요하는 현실 인식에 대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피하는 동시에 가시적인 것을 순수한 조형적인 영역으로 투사시킨다. 정재규는 사진 이미지 자르기가 ‘이면’ 즉, 이미지들의 ‘이면’, 현실의 ‘이면’, 세계의 ‘이면’, 지각의 ‘이면’을 향해서 열린 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구축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순수 조형적인 방법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해야 한다. 일련의 필수적인 행위를 통해 주요한 작업이 전개되고 작품제작이 가능해졌다.
조합과 프랙탈
첫 번째 단계는 간단히 말하자면 띠처럼 길게 자른 사진을 거꾸로 하거나 뒤집어서 동일한 위치에 되돌려 놓는 것으로서 그 조형적 효과가 아주 파격적이다. 이때 우리는 가시적인 것을 확인하려고 하다가 대조의 효과, 형태 대립이 주는 효과, 어긋나기의 효과에 사로잡히게 된다. 즉 반복과 어긋나기로 표현되는 조형적 메커니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진 이미지의 위상이 바뀐다는 점이다. 재현으로서의 사진 이미지는 해체되고 사진 이미지는 실재의 조형적 총체로서 재구성된다. 실재는 기호들의 유희가 빚어내는 내적 움직임이다. 그러나 이는 통상, 현실에 대한 인식의 유희 때문에 사진 이미지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조형 창작물을 제시하면서 정재규는 사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이 평범한 대상을 예술 작품이 되게 한다. 그는 계속해서 표면의 내부에까지 새로운 차원들을 창작하고자 했다. 즉 사진 이미지들이 3차원의 성격을 띠도록 했다. 그렇다고 조각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 목표가 ‘프랙탈’(fractal)이라는 것을 우리가 느끼도록 하는 데 있음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자른 요소들을 재구성하고, 거기에 끝없이 변화를 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시적인 것에 담겨 있으나 오로지 해체-재구성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는 조형적인 힘이 드러나도록 시각을 혼란시키는 조합물을 창작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몬드리안과 뒤샹 – 작품에서 작가를 배제하는 순수 조형 언어 - 을 계승한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의 보편주의를 느끼도록 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조형 기호들의 보편주의 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단절, 재회, 어긋나기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폐쇄되는 아르스날의 작업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할 채비를 하고 있을 무렵 세상이 뒤흔들렸다. 쌍둥이 빌딩이 뉴욕의 중심지에서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들을 넘어서 정재규에게는 조형주의의 주요 상징물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형태로나 그것이 두 개라는 점 때문에 쌍둥이 빌딩은 세상의 하늘에서 완전한 순수 조형 기호를 구성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기와 새천년 정면에 빌딩의 파괴가 새긴 것은 이 ‘기호’이다. 그것은 비극 이상이며, 단절이 생긴 것이고, 인간들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정재규는 그것을 유달리 날카롭게 느꼈고 그의 작업은 이 새로운 상황을 참작할 따름이었다. 이로써 그는 새로운 조형 방법을 창작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며 지혜의 길로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미학과 윤리
지진과도 같은 뉴욕의 타워 붕괴 사건은 정치, 미학, 윤리라는 세 가지 주요한 분야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의 한 순간에 생긴 균열로 인해서 정재규는 반 세기 전부터 분단된 자신의 나라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 환경을 규정짓고 있었던 두 개의 조형 기호의 파괴는 자유와 예술의 가치에 관한 문제에 새삼 뜨거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예술가의 의무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응하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리게끔 하는 것이 아닌가?
정재규에게 이것은 서예의 자유로운 제스처 작업에 귀의하고 새로운 마티에르와 바탕으로서의 포장지와 길게 자른 사진을 올짜기하는 새로운 기법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먹물을 묻힌 붓과 손의 풍부하고 자유로운 제스처가 잘리기 전의 사진들 위에 표현된다. 정확히 말해서 9.11사태 이전에 뉴욕에서 찍은 사진 전체에 작품의 주요한 요소로서 운필이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존 작업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 여러 배합에, 포장지를 사용함으로써 용이해진 올짜기가 그 위상을 갖추게 되는 것도 이 때부터이다. 올짜기와 서예는 이때 동양의 진정한 재생으로서 등장한다. 또한 이들의 등장은 정재규가 20세기 서양 미술에 대해 추구해 왔던 성찰의 주요 요소들을 보강하고 강조하기도 한다. 자유로운 회화적 제스처는 사진을 자를 때의 큰 자유와 연결된다. 올짜기는 작품에 새로운 미학과 윤리적 차원을 동시에 부여한다. 올짜기의 미학은 표면층들의 혼합 미학이고, 조형기호들의 일반적인 등치관계를 알 수 있는 여정을 보여준다. 올짜기의 윤리는 모델의 수용성과 함께 그 보편성도 환기시킨다. 플라톤의 <공화국>에도 이미 올짜기는 권력을 분석하는 은유로서 사용되었다.
이미지의 표현력
정재규의 작품은 따라서 작가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조형요소로서 차용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으로 현실성을 띠고 있다. 더구나 사진 이미지에 대한 사고가 지난 세기 동안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그의 작품이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진 이미지는 확실히 가장 새롭고 심오한 ‘믿음의 대상’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실용적이고 미학적으로, 그리고 재현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마술같은 공간으로서 사진 이미지의 보편성은 이제 자명하다. 그렇지만 이같은 상황의 결과를 고려하는 작가들은 별로 없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사진 이미지 속에 내재해 있을 예술적 힘의 존재를 계속해서 믿고,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믿게 한다. 정재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사진 이미지를 지시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 이미지는 단지 현실을 밋밋하게 복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을 인간이 아닌 기계에 의한 생산물로 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차원’을 지니게 된다. 이 차원이 새롭다는 것은 그 속에 미학, 윤리, 정치가 함께 교묘하게 짜여져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재현과는 무관한 조형 기호일 수도 있고, 기표(記票)와는 무관한 기의(記意)일 수도 있으며, 기획물이 아닌 데이터로서의 보편성일 수도 있다.
만일 우리들이 이미지들의 지시성을 믿고 또 가시계가 드러내는 주어진 틀로서 세계를 받아들인다면 이미지의 표현력은 ‘마술적’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호의 독립성을 인식하고 가시적인 것은 이 기호들이 역사의 한 순간에 특별히 올짜기된 한 양식이라는 점을 인식할 경우엔 이미지의 표현력은 ‘조형적’이다. 정재규는 혁명 시기들의 예술조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시적인 것과, 그것을 파괴한 것, 그 이면과 총체적인 지각을 우리들로 하여금 동시에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실재의 확실성을 믿는다는 것이, 정보 이미지들의 조작된 확실성을 믿는다는 것이, 카메라의 성능과 연결된 속도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 모두 불가능하게 된다.
느림에 대한 찬사
끝없는 인내는 조형작가 정재규의 일상적인 작업에서도 핵심이 된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다.
사진 촬영에 드는 시간과 비교하여, 사진을 자르고 잘라진 이미지들을 올짜기하여 시각의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재규의 작품이 우리들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은 이 무한히 느린 시간으로서, 마치 맹점처럼, 잊혀졌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시간의 힘’이다. 그는 균형에 대한 갈망과 지혜의 필요성을 결합시킨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작가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형 언어뿐만 아니라 보편성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가시적인 것에 대한 확신과 가시적인 것의 ‘이면’에 대한 지각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요소는 모두 조형적이다. 또한 조형가의 몫이기도하다. 새로운 언어에 입각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비역사적인 근원적 차원에 도달하게끔 하는 작품들은 모두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정재규의 작품은 바로 서양적 재현의 신성한 핵심인 ‘모방’을 단호히 극복하고자 하며 태고의 지혜에, 적어도 그 지혜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성의 느림
2005년부터 정재규의 작업은 이미지와의 관계에서 변화를 갖는다. 그는 더 이상 사진 이미지들을 사용하지않고 대신 화집 속의 복제 이미지들을 직접 자른다. 그것들은 초상, 회화 및 작가 자신들의 복제 이미지들로서, 작가는 이를 포장지에 붙이거나 늘 해오는 방식대로 잘라서 올짜기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레디 메이드(ready made)’의 이론적 접근과 예술의 보편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호들의 자유, 기호들의 보편성, 기호들의 조형성이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임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누구나 사진작가인 이 시대에 정재규는 누구나 ‘조형작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는 이제 이미지의 ‘이면’에 있다. 이미지 속에서만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이미지의 포화 상태가 치명적이기는커녕, 새로운 자유의 근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정재규는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현의 힘에 대한 확신을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이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서 우상 파괴주의적인 제스처로 이미지를 자르고 해체하며, 동시에 가장 엄숙한 제스 추어로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복합적이며 눈부신 장면을 재구성하여, 이미지의 위장 마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가시성은 현실의 복제성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간파할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이 이미지들이 숨기고 있는 것이고 누구나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재규의 멋진 작품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 장-루이 푸아트뱅(미술평론가/소설가)
장-루이 푸아트뱅 (Jean-Louis POITEVIN)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으며 특히 현대미술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기사를 썼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슈투트가르트와 인스부르크의 인스티튜트 프랑세에서 문화 담당관을 역임했다. 1996년과 2004년, 2005년에는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프랑스 현대 미술과 문학에 관해 강연을 했다.
Chong Jae-Kyoo’s Works: A Slow Passage through the Visible
Jean-Louis Poitevin (Art Critic / Novelist)
Chong Jae-Kyoo is at once a photographer and a visual artist, which is to say that his work is entirely bound up in a double reflection: focusing above all on pictorial language as a system of autonomous signs as well as on the possibility of expressing the essence of reality through a system of non-objective signs. To this end, he devoted in-depth study to the major European trends that brought forth form-based, art-specific knowledge: Malevich’s Suprematism, Cubism, and Mondrian’s Neoplasticism. After a short stint at painting, he was gripped by the power of photography. Though he initially made use of photography for its indexical and documentary dimension, beginning in 1991 he positioned himself as a lens-based artist. Thus photography offered Chong Jae-Kyoo a means to give form to a fractal vision of the real. Playing with découpage – a sort of radical deconstruction of the visible – he opened himself up to the possibility of recomposing the real, in keeping with the strictures of a purely artistic approach.
At the very core of Chong Jae-Kyoo’s artistic inventiveness one finds a single dominant idea: that of the reverse side, and an essential gesture of cutting up the image into five to ten millimeter thin slices or strips. To take photographs of the other side of the Montagne Sainte-Victoire is a comparative gesture that plays with our habits and our capacity to recognize. But it is also to point out that another view is possible – a view seeking a different path to the visible.
To develop these photographs, which, in and of themselves, produce no effect, and reveal no particular aesthetic research, in the format of fifty by seventy-five centimeters, would be of no interest whatsoever. Chong Jae-Kyoo is aware that it is necessary to radically transform not only the banality of the visible but also the indexical evidence of the photographic image. By systematically cutting the image up into regular-sized strips, he thwarts at once the psychic mechanism of the recognition of the real that photography imposes on us and projects the visible on to a purely visual arts field.
Chong Jae-Kyoo has understood that cutting up the image opens a door to the other side of the image, the other side of reality, the other side of the world, the other side of perception. But to achieve this it is necessary to reconstruct – that is, to recompose – the image with the means that are drawn purely from visual art. A series of essential gestures enabled the deployment of this major invention and its transformation into artwork.
Compared with the time needed to take the photograph itself, the time required to perform this transmutation of the gaze through the cutting up and weaving of the deconstructed elements of the image is infinite. And it is to this slowed-down time, to this power that resides at the center of life like its blind spot – forgotten and yet so alive – that Chong Jae-Kyoo’s work refers. He conjugates – as few artists today are able – the desire for balance and the need for wisdom. Thus a new form is attained – not only of art-visual language but also linked to the question of universality.
Since 2005, the work of Chong Jae-Kyoo has taken a decisive step with respect to the image. The artist no longer uses photographs, but rather cuts out reproductions in art books, portraits, paintings, even photographs of artists themselves, which he then glues onto kraft paper, cuts out, and weaves according to the usual procedure. Thereby he intends to go beyond a merely theoretical approach to the ready-made and the universality of art in order to understand that freedom, universality, and the plasticity of signs are our daily bread. Now that anybody and everybody is a photographer, Chong Jae-Kyoo means to show that everyone can be a visual artist. We are thus on the far side of the image because our lives are only in images. This saturation, far from being a mortal blow, could reveal itself as the singular source of a new freedom. For this it is necessary to dismantle the belief in representation as being all-powerful. And the best way to achieve this freedom is to break down the supposed magic of the image by resorting at once to the most iconoclastic of gestures – cutting the image up, its destruction – and the most respectful, that of recomposing it in a new, complex, and radiant visible. For this is what people divine when their eyes go beyond the mere reproduction of reality, yet it is also what the images conceal. It is also what everyone aspires toward; it is of this that the brilliant work of Chong Jae-Kyoo speaks and reveals to us. 전시제목조형 사진-일어서는 빛
전시기간2018.02.02(금) - 2018.03.04(일)
참여작가
정재규
초대일시2018년 02월 02일 금요일 05:00pm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없음
장르사진, 설치
관람료성인 3,000원 / 소인 2,000원
* 단체 20명 이상 20% 할인
* 7세 이하, 64세 이상, 장애 3급이상 무료입장
* 빌레스토랑 식사시 무료입장
장소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가나아트센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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