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한지의 만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태기수, 소설가
당신은 아주 특별한 만찬 초대장을 받았을 겁니다.
‘6월,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전병현이 준비한 특별 만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호스트는 전병현, 그리고 저는… 당신에게 이 요상한 만찬의 내력을 맛있게 들려줄 이야기꾼입니다. 그래요, 이 전시회는 말이죠, 깊고 웅숭깊은 만찬의 내력을 품고 있답니다. 그림으로 즐기는 만찬, 스토리가 있는 만찬에 오신 당신을 환영합니다.
애피타이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곤혹스러워하는 당신의 표정이 보이네요. 당연한 반응입니다. 무슨 이런 그림이 있나 싶기도 하겠지요. 두텁게 발린 한지를 찢어발긴 그림들이 전시장 가득 펼쳐져 있으니 말입니다. 천진한 아이의 장난질이나 예술적인 농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림은 그리는 것’이라는 상식적 개념을 뒤엎어버린, ‘그림 아닌 그림’들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렇다고 “상식적 개념을 전복한 혁신적 발상”이라거나 “실험적 기법으로 새로운 표현영역을 개척했다”는 투의 식상한 레토릭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림의 맛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건 오로지 당신의 몫이니까요.
자, 당신을 위해 준비한 애피타이저가 있습니다. 아마도 전시장 입구쯤에 전통한지의 질감을 직접 느껴보 시라고 안내하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을 거예요. 애피타이저를 즐기듯, 조각조각 찢긴 채 너풀거리는 한지의 질감을 음미해볼까요. […] 다른 종이를 만질 때와는 다른, 풍성한 섬유질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걸 찢을 때는 당신의 영혼에 미세한 전율이 스몄을 겁니다. 사실 그건 위험한, 파괴의 쾌감이랍니다. 파괴의 쾌감은 창조의 쾌감 못지않게 강렬하지 않던가요. 분명 전병현도 작업과정에서 그 쾌감을 내심 즐겼을 거라고 봅니다. 이번 전시회는 ‘찢어발김’의 도발적 발상으로 차려낸 상상의 만찬이기 때문이죠. 도발은 파괴의 충동과 맞물려 있고, 창조적 도발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참신한 예술의 경지를 열어젖히는 최대출력 엔진과도 같습니다. 요컨대,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들에는 전병현의 도발적 충동과 야심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죠. 한지의 질감과 함께 도발적 에너지까지 몸소 체험했다면 당신은 이제 만찬의 주무대로 입장할 준비를 마친 셈입니다. […]
메인 코스
안으로 한두 걸음 들어가 전시장 전체를 둘러봅시다. 대형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지요? 뭔가 압도적인 기분도 들 겁니다. 괜찮습니다. 한 점 한 점 감상하다 보면 곧 만찬 같은 그림들의 분위기에 편안하게 젖어들게 될 테니까요.
당신은 그림을 감상할 때 어떤 점에 중점을 두시나요? 전병현의 전시에서는 색(色)을 주의 깊게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로지 색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림에서 확인되는 전병현의 색, 어떤 느낌인가요? 예, 맞아요. 당신의 느낌처럼, 그다지 ‘컬러풀’하진 않죠. 아무래도 유화의 원색적인 그림들에 비해 감도가 덜합니다. 전병현이 말하는 색은 유화처럼 밖으로 표출되는 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색은 한지의 섬유질에 스며든 색입니다. 그림 속 오브제에 동화된 색이지요. “입히는 색이 아니라 벗기는 색”이라고 말하는 평자들도 있더군요. 꽤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말하자면 전병현의 색은 수묵화의 전통에서 길어 올린 색입니다. 붓으로 획을 가하면 한지에 먹물이 스미지요. 한지는 먹물을 머금고 먹빛 숨결 속에서 은근한 색감을 내비칩니다. 한지에 스민 채 살아 숨 쉬는 색이지요. 스며든 색, 숨어 있는 색입니다. 그러니까 전병현은 숨어있는 색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온 셈입니다.
이번 작업도 그런 작업의도가 새로운 기법으로 표출된 결과물입니다. 숨어 있는 색을 꺼내 보여주는 작업, 얼마나 힘든 과정이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전병현은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찢어발김’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예,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색감, 전병현이 가시화한 숨어 있는 색의 정체입니다. 그 색을 표현하기 위해 전병현은 창조와 파괴의 과정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찢어발김’은 창조와 파괴가 하나로 어우러진 정점입니다. 찢는 행위 끝에 비로소 완성된 그림이니까요.
그 과정을 한 번 그려볼까요.
먼저 한지를 펼쳐 그림을 그립니다. 꽃과 나무 또는 흐릿한 인물의 형상이 한지에 스며듭니다. 그림의 전체적인 형상이 완성되면, 마르기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다 마른 것 같군요. 찢는 순서가 온 걸까요? 그런데 웬걸! 그가 도배용 붓을 집어 드는군요. 그러더니 완성된 그림에 풀칠을 해버립니다. 제가 왜 그의 작업을 ‘창조와 파괴의 과정’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죠? 그가 풀칠한 그림 위에 다른 한지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를 배접이라고 하는데요, “종이의 등에 옷을 입힌다”는 재미있는 표현도 있더군요. 그가 배접한 한지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파괴 뒤에 이어지는 창조라고나 할까요. 다시 꽃과 나무 흐릿한 인물의 형상이 한지에 스며듭니다. 먼젓번 그림에 얽혀들며 더 깊이 스며듭니다. 더 깊이 숨어듭니다. 두 번째 완성된 그림, 마르기를 기다려야겠죠. 음… 아까보다 그 시간이 좀 더 길어지는군요. 그가 그림의 상태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드디어 찢을까요? 아, 아닙니다. 그가 집어든 것은 또 도배용 붓입니다. 가차 없이 풀칠을 해버리는군요. 그 위에 새로운 종이를 배접합니다. 다시 그립니다. 그림이 더 깊이깊이 스며들며 숨어듭니다. 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군요. 도대체 몇 번이나….
당신이 보고 있는 그림들은 평균 6번의 배접을 거쳤다고 보시면 됩니다. 6겹의 옷을 입고, 6겹으로 스며든 그림이지요.
잠깐,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의 눈길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손끝에 힘을 주고, 드디어 찢는군요. 또 찢습니다. 그의 입가에 묘한 쾌감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찢고, 또 찢고…. 찢긴 종이가 너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울긋불긋, 숨어있던 색이 찢긴 종잇조각에 묻어나옵니다. 그 색을 보세요. 어딘가 친숙하고 편안한 자연미가 느껴지지 않나요? 자연의 소재에 깊이 스며든 색입니다. 전병현은 자연의 소재로, 자연미와 어울린 우리의 감성을 표현해온 작가이기도 합니다. […]
디저트
이번 전시를 통해 전병현은 전통한지의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 천년한지의 새로운 천년을 열어가고자 하는 그의 야심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세계에 공감한 당신, 당신, 당신들의 관심과 기대, 후원이 뒤따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요. 당신을 이 특별한 만찬에 초대한 이유입니다.
또 다른 당신, 당신, 당신들을 위한 초대장도,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세요. 예술도 일상의 만찬처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일상적 장면이 아닐까요?
“우리는 전통적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미술을 애호할 때 미술이 번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러 장르를 오가며 작가로 활동해오다 올해 유명을 달리한 존 버거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술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과 함께 호흡하며 번영과 발전의 길을 모색해가야 합니다. 구성원들이 예술을 향유할 여유가 없다면, 참으로 난망할 노릇이겠지요. 우리는 장시간 노동 속에서 끊임없이 ‘노오오력’ 하는 삶에 짓눌려 지내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선 ‘만찬’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치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네요.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삭풍의 세월을 지나 훈풍의 새바람을 맞이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예술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지난 어둠의 근원을 파괴하고, 그 어둠에 묻혀있던 희망의 자취를 창조하는 과정이 이어져야 하겠지요. 예술이 세상을 바꾸긴 힘들 겁니다. 하지만 세상을 덜 나쁘게 만들 순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예, 그러니까 예술이지요. 그리하여 만찬입니다. […]
Invitation to a Traditional Korean Paper Banquet
— Tae Ki-Soo, Novelist
You have received a very special dinner invitation.
“In June, you are invited to a special dinner at Gana Art Gallery, to be prepared by Chon Byung-Hyun.”
Chon Byung-Hyun is the host, and I… am the story teller, who will present you with a tasty history of this curious dinner. Yes, this exhibition does have a deep and subtle history as a banquet dinner. Welcome to the dinner to be enjoyed through pictures, a dinner with a story.
Appetizer
I can see your perplexed expression, the moment you walk into the gallery. It is a natural response. You are wondering, what kind of paintings are these? The room is full of pictures on which thick layers of Korean paper have been pasted and then torn to pieces. This may seem like the prank of an innocent child, or like an artistic joke. I suppose these are “paintings that are not paintings,” overturning the common notion that “paintings are painted.” But I do not want to bewilder you with the lame rhetoric that they are “innovative concepts that subvert common notions,” “they opened a new territory of expression through experimental technique,” or such. It is solely up to you, what you feel and think after you taste these pictures.
Now, here is an appetizer prepared for you. There should be a picture hanging near the gallery entrance, guiding you to directly feel the texture of traditional Korean paper. As if to enjoy an appetizer, let us savor the texture of the torn pieces of flapping hanji (Korean paper). […] Do you get the abundant feeling of texture, unlike when you touch other types of paper? When you tore it, you must have felt a tiny shiver going through your soul. In fact, that is the dangerous pleasure of destruction. The pleasure of destruction is as powerful as the pleasure of creation, is it not? I am certain that Chon also secretly enjoyed that pleasure during his work process. That is because this exhibition is an imaginative dinner prepared with the provocative idea of “shredding.” Provocation is interlocked with the destructive impulse, and creative provocation is like an engine producing maximum power as it presents a new perspective and takes art to a new level. In short, the works exhibited in the gallery connote the provocative impulses and ambitions of the artist.
Having personally experienced this provocative energy, along with the texture of hanji, you are now ready to enter the main stage of the banquet. But before that, we need to find out a little more about our traditional hanji paper.
Main Course
Let us step into the gallery and look around at the overall exhibition. You see a lot of large works? You may feel somewhat overwhelmed. It’s okay. Looking at them one by one, you will soon become comfortably immersed in the dinner-like atmosphere of the pictures.
When you appreciate a painting, what is your point of focus? I recommend that you look carefully at the colors in Chon Byung-Hyun’s exhibition. He once said he wants to “remain only as color.” What is the feeling given by Chon’s colors, as discerned in the works? Yes, that’s right. Just as you have felt, they are not so “colorful.” They are not as vivid as oil paintings done in primary hues. That is because the colors referred to by the artist are not colors expressed outwardly as in oil paintings. The colors are those that have permeated into the fibers of the hanji. They are colors that have been assimilated with the objet in the pictures. Some critiques have called them “colors that are taken off, not worn,” which seems an apt expression.
That is to say, Chon’s colors are colors drawn from the traditions of Korean ink painting. Ink soaks into the hanji when a stroke is made with the brush. The hanji holds the ink and gives off a subtle tone amidst its inky dark breath. It is a color that lives and breathes as it permeates the paper. It is a permeated color, a hidden color. So the artist has continuously made works that visualize hidden colors.
His recent works are also the results of such intentions expressed through new techniques. Trying to reveal hidden colors: how difficult it must be! Perhaps even impossible. Nevertheless, Chon says it is possible. He shows that possibility through “shredding.” Yes, the hues you are looking at—they are the hidden colors visualized by the artist. To express those colors, Chon is said to have repeated the process of creation and destruction. The “tearing up” is the zenith where creation and destruction come together in harmony. After all, they are pictures that are completed at the end of the acts of tearing.
Let us image that process.
First he spreads out a piece of hanji to paint on. Forms of flowers, trees and faint human figures soak into the paper. When the overall image is complete he waits for it to dry. Finally it seems to be dry. Is it time to tear? But lo and behold! He picks up a papering brush. And he covers the completed painting with glue. Now do you understand why I called his work a “process of creation and destruction?” He is pasting other pieces of hanji onto the glue-covered painting. This is called paper backing, or more light-heartedly, “clothing the back of the paper.” He now paints again on the backed hanji. It is creation following destruction, so to speak. Again, the faint images of flowers, trees and people are soaked into the paper. They soak in even deeper, as they are entangled with the previous paintings. We need to wait for this second painting to dry. Hmm… it is taking longer than it did a while ago. He nods as he examines the state of the painting. Now, do we tear? Oh, no. What he has picked up is that papering brush again. He ruthlessly covers the work with glue. He pastes new paper on it. He paints again. The painting seeps in deeper and deeper, and hides. The same process is repeated continuously. How many times…?
Consider that the paintings you are looking at have gone through an average of six backings. They wear six layers of clothing, and are permeated with six layers of paint.
Wait, finally the time has come. There is something unusual in his glance. Gathering strength at the tips of his fingers, at last he tears. And he tears again. A shadow of peculiar pleasure lingers around the corners of his mouth. He tears and tears again… The shredded paper flaps and sometimes falls to the ground.
The colorful hidden hues come out in the torn fragments of paper. Look at the colors. Isn’t there something familiar, comfortable and natural about them? They are colors that have deeply penetrated into the subject matter of nature. Chon is an artist who has expressed our sensibilities in harmony with the beauty of nature through natural subject matter. […]
Dessert
Through this exhibition, Chon Byung-Hyun presents a new expression style of traditional hanji. We can also glimpse his ambition to open a new millennium of hanji, as he advances into the center of the world. This is not something impossible, thanks to the interest, expectation and support of you, you and you, who have empathized with his world of work. That is why you were invited to this special dinner. Invitations for other you, you and you are of course also prepared.
Come. We must be able to enjoy art like a casual dinner. Isn’t this an everyday scene that is absolutely necessary for a “world where people live?”
“We know that traditionally art prospers when the constituents of a society love art.“ These words were spoken by John Berger, who passed away this year after working as a writer in diverse genres. That’s right. Art must search for ways to prosper and develop while breathing together with the members of society. If they do not have the latitude to enjoy art, we will truly be at a loss.
Amidst long working hours, we are weighed down by our lives of endless “eeeffoort.”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word “banquet” may seem a luxury. But that would not be right. At this time when we have passed through the years of the cold north wind, and have met a new warm wind, we are ever more in need of artistic imagination. There needs to be a process of destroying the past sources of darkness and creating the traces of hope, which have been buried under that darkness. It will be difficult for art to change the world. But I do believe it can make the world less bad. Yes, that’s why it is art. Hence it is a banquet. […]
전시제목전병현 개인전
전시기간2017.06.23(금) - 2017.07.16(일)
참여작가
전병현
초대일시2017년 06월 23일 금요일 05:00pm
관람시간월~일요일 10:00am - 07: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가나아트센타) )
연락처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