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한 진실, 21세기 비망록 (김석 조각의 상황과 조형론)
김종길 | 미술평론가
조각가 김석은 20세기를 건너와 21세기 인류에게로 항해를 지속한 ‘욕망’의 표피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취한 방식은 작품들이 어떤 상황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상황은 때로 유사 용어인 ‘정황’으로 바뀌기도 한다. 즉 그의 작품들은 독립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개입의 모반을 꿈꾸는 유혹자이다. 하여 낱 개 작품들은 그 자체로 상황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자신만의 비평을 요구한다.
필자는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이 작품들의 상황을 기술하고 거기서 해제의 통역을 뽑아 올릴까 한다. 이번 김석 작품에서 상황의 기술 없이 작품을 해제한다는 것은 미학의 뼈만 추스려 이장하려는 무모한 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위해 극적 구성을 차용하기로 한다.
존경에 경의를 표하다
상황 :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태도를 갖는다. 인체의 옆면 아웃라인을 단순화 해 쇠판으로 절단하고 골반부위와 어깨부분에 이음매를 두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모터가 작동해 허리를 숙인다.
통역 :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작품과는 형식적 유사성일 뿐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앞서 보여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역설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작품 제목에서 이미 드러내고 있듯이 ‘존경에 경의’를 표한다는 모순어법은 누가 누구를 존경하는 가에 대한 이중질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경의를 표하는 주체가 조각으로 등장한다는데 있다. 인류는 역사의 영웅을 신격화하는 수많은 모뉴멘트를 제작해 왔다. 죽음이후 실체가 없는 존경의 주체는 조각이 대신해 온 것이다. 조각가 김석은 오히려 조각이 인간을 향해 경의를 표하게 함으로써 물신화 된 세상의 욕망을 조롱한다.
가벼운 생각에 잠재된 어떤 형이상학의 소리
상황 : 아크릴 상자(육면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아래에 하나는 위에. 아래 상자만 초록색이다. 상자의 사방 면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안에 스피커가 있다. 포개진 두 개의 상자 위에 LP판 턴테이블이 있다. 다시, 원형의 LP판 위에 투명한 재질로 만든 인물 두상이 있다. 전원이 들어오면, 판은 돌아가고 스피커에선 야릇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긴 시간 동안 스피커는 웃음소리와 (팝)음악을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웃음소리 사이에서 비틀즈 노래는 감성의 주파수를 넘나들며 매우 원초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통역 : 여기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시간성과 관계가 있다. 오래된 턴테이블과 LP판은 20세기를 지탱했던 소리의 구조물이다. 소리가 구조물에 의해 재생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교한 구조물일수록 원음에 가까워진다는 스피커의 합리주의적 구조체는 여전히 그 진리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판의 속성을 진화시켜 온 인류는 이제 낡은 플라스틱의 음파를 버린 지 오래다. 스피커는 스피커를 향한다. 그래서 소리는 소리를 향한다. 소리위에 떠서 빙빙 돌아가는 텅 빈 투명 인물은 20세기의 음파 속을 떠돈다. 정확히 그 시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소리의 동그라미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인간 같은 동물, 동물 같은 인간Ⅰ-나의 가족
상황 : 네 명의 인간과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폴리에스테르로 제작된 이 작품들의 표면은 매끈하고 하얗다. 또한 손을 마주잡은 채 서서 웃고 있다. 물론 개는 웃지 않는다. 어린 아이에서 어른까지 연령은 다르나 똑 같은 키를 하고 있다. 다섯 동물들은 등을 맞댄 채 밖을 향해 서있다. 이 작품의 연작인 <인간 같은 동물, 동물 같은 인간Ⅱ-내 친구>는 다섯 동물에서 아이와 개만을 등장시킨 것이다. 아이와 개는 마주보며 손을 맞잡고 있다.
통역 : 이 시대는 과거와 달리 대가족의 의미가 거의 없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통계 수치는 가족해체의 시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노골적으로 묻는다. “누가 동물이며 인간인가?” 그런데, 이 질문을 앞서가는 생각은 인간인 동물이 동물인 개와 혈연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황당함이다. 조각가 김석은 21세기 가족의 편리성에 의해 ‘동물’의 주체성이 오래된 미래 속으로 습합해 갈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부재한 진실들Ⅰ-감싼 것과 감싸여 진 것
상황 : 그리스 조각 <원반던지기>의 형상을 차용한 이 작품은 양복 정장을 차려입은 현 시대 중년 남성이다. 그는 두툼한 다이어리를 원반처럼 들고 던지기 직전의 동세를 취하고 있다. 인체 사이즈보다 크게 제작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물신이 된 듯하다. 즉, 기념조형물처럼 전시장에 들어섰단 얘기다. 황금빛이 도는 청동 재질로 인해 작품은 무척 생경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이 작품을 투명비닐로 포장했다.
통역 : 작품은 포장에 의해 의미를 상실한다. 비닐은 안과 밖을 투과시켜 조각상의 실체를 가둬버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청동 조각상은 단지 비닐 안의 거대한 물신일 뿐이다. 이것은 진리 혹은 진실에 대한 탐문일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냐고 묻는 공안(公案)의 목탁소리처럼 이 화두는 너무나 명쾌하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거짓으로 가장되어 있거나 혹은 환영에 찬 사물에서 진리를 찾지 않던가. ‘감싸다’의 동사형은 완료형일 때 훨씬 강력한 은폐물이 된다.
<부재한 진실들Ⅱ-이것은 sign입니다>
<부재한 진실들Ⅲ-이것은 옷입니다>
<부재한 진실들Ⅳ-이것은 스테인리스 스틸입니다>
<부재한 진실들Ⅴ-이것은 숭배, 숭고, 사물입니다>
상황&통역 : ‘부재한 진실들’의 연작(Ⅱ~Ⅴ)은 시각적 사실에 대한 ‘지시형’ 비틀기다. “이것은 sign입니다”이라고 말하지만, 이 작품은 교회 십자가를 원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시뮬라크르다. 자기 동일성 없는 이 복제의 구조물은 그러나 다시 보면 온갖 간판들의 집합체다. 교회의 십자가라는 것도 사실 하나의 간판일 뿐이며, 표식이지 않은가. 관념의 한 부분을 유희하듯 흔드는 작가의 전략은 ‘부재한 진실들’에서 읽히는 주요 코드라 할 수 있다.
각양각색의 옷 조각을 모아 다시 옷을 만들어 놓은 “이것은 옷입니다”는 욕망의 극점에 서 있는 옷(껍질)의 속성을 희화화한다. 깨달음의 근접지에서 해탈 웃음을 짓는 무소유의 해탈승들이 단벌옷 넝마를 입었다는 사실은 이 옷의 희화성을 더 확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 옷에선 어느 순간 남근이 불쑥 튀어 오른다.
“이것은 스테인리스 스틸입니다”는 여성의 가슴이 주렁주렁 매달린 스테인리스 조각 작품이다. 욕망의 기호는 시각적 사실의 이미지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다>와 같이 ‘부재한 진실’의 리얼리티는 작품의 사물성에 있다. 이 경우 작가는 조각의 재료에 집착한다. 그런데 마지막 작품인 “이것은 숭배, 숭고, 사물입니다”는 구두에 관한 진실은 몇 가지 상징어로 쪼갠다. 숭배와 숭고, 사물이라 명명한 이 구도의 정체는 김석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화두다.
모든 것은 리얼리티에서 시작해 리얼리티로 환원한다. 구두의 리얼리티는 공산품이라는 오브제에 있지 않고, 그것을 신었던 한 인간의 삶에 있다. 발바닥의 형상에 의해 뒤 굽이 닳아졌다거나 걷기의 수만큼 껍질에 주름이 잡혔다는 것이 리얼리티다. 그 시간성의 지층만큼 구두는 숭고한 사물로 탈바꿈한다. 하여 사물이면서 숭고한, 그리고 숭배의 원천이 되는 조형물(조각)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상황극의 결말과 암전은 고요하다. 길게 패이드 아웃되는 조명아래서 구두 소리가 여운처럼 지속된다. 다시 모든 것이 고요해 졌을 때, 현실이 새벽처럼 찾아든다. 지금 여기, 네온이 빛나는 21세기 서울지형의 어느 번화가, 그 옆 골목길.
전시제목김석 조각전
전시기간2007.11.28(수) - 2007.12.04(화)
참여작가
김석
관람시간10:00am - 06:00pm
휴관일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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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학고재 Gallery Hakgojae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 갤러리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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