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
신진식
최근 뉴스
아동 성폭력 범죄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성적 충동을 줄이는 이른바 '화학적 거세' 제도가 2011년 7월부터 시행된다. 그러나 약물 치료가 본인 동의 없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인권 침해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애초 2008년 '상습적 아동 성폭력범의 예방 및 치료에 관한 법률'이 발의됐을 때는 본인의 동의를 전제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지난해 6월 본인 동의 부분이 빠진 채 국회를 통과했다. 약물치료는 조두순, 김길태 사건 같은 끔찍한 범죄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전자발찌 제도 및 신상공개 제도와 함께 성폭력 범죄를 근절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검찰 청구로 법원이 결정하는 방식은 인권 보호 측면에서 올바르지 않으며 법원의 재판 결과와 함께 치료 여부 결정이 이뤄져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음모론 CONSPIRACY THEORY
성(性), 흡연, 비만
금기(禁忌)는 황금을 낳는다. 법의 테두리를 넘는 성(性), 흡연과 비만은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이 시대의 공적이다.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비만관련 산업 - 외모에 초점이 맞춰진 - 의 규모는 날로 팽창되어 가고 금연은 폭발적인 담배 값 인상과 광고 비용지출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 담배제조사에게는 오히려 호제로 이어진다. 불법적인 성의 과도한 규제는 창의적인(?) 성(性)산업의 개발과 함께 새로운 수요를 개척한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범죄는 금기산업을 촉진하는 역발상 광고라고나 할까?
금기산업의 대표적인 예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금주법(禁酒法, the prohibition law)이 시행되었던 미국의 무법시대이다.
금주법 시행기간 동안은 후일 재즈 에이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무법의 10년이라고 불리게 되는 시대가 탄생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술을 밀수·밀송·밀매하는 갱이 날뛰고 소수를 위한 새로운 재화축척수단의 창출 즉 금기산업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는 법이 실시된 1920년 시작되어 철폐된 1933년에 끝났지만, 실제로는 1929년 공황이 몰고 온 이른바 ‘월가(Wall 街)의 대폭락’과 극심한 불황의 1930년대를 맞이하는 연출로 한 막이 내려졌다.
예술이 금기(禁忌)를 딛고 일어서듯 어쩌면 세상은 금기산업(禁忌産業)을 원동력으로 운행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주령 때 술장사로 일확천금하고 금연 캠페인에 오히려 떼돈 버는 담배회사, 왜곡된 일방통행적 미의 강요로 일구는 산업과 사회통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해 나의 개인전 ‘(수상한) 이웃’의 주제이기도 했던 성폭력의 문제처럼 한쪽에선 성산업과 범죄를 조장하고 - TV 채널에서 미성년자 치마 속을 전 국민에게 방송하는 식으로 - 다른 한 쪽에선 소급해서까지 단죄하는 금기산업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다.
어쩌면 심각한 음모론에 내 자신이 함몰되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외피, 감성, 본능, 내장기관, 생식기에 이르기까지 친절하게 관리되는 이 복지사회 속에서 불문율 개선 산업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 궁금함을 멈출 수 없다.
이러한 연유로 '남용되는 금기(禁忌)산업'으로 이름 붙인 이번 전시는 9명의 소녀가 만드는 침묵의 시위가 될 것이다.
빨간색과 녹색, 정육점의 색상대비 위에 비도덕적이고 통속적으로 그린 300호 크기의 소녀 누드가 걸린 전시장이 줄 다소 위압적인 분위기는 단지 그림 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가 소녀의 누드 상 뒤에 숨죽이고 있을 온갖 금기산업을 위한 사회적 장치들을 관객들과 함께 하나씩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
[평론] 신진식- 성적금기 그리고 금기산업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신진식은 대형 캔버스(454.6×181.8cm)를 두 개의 색 면으로 구분했다. 단호하게 붉은 색과 녹색으로 칠해진 색 면 추상이다. 우선적으로 시선에 잡히는 것은 펼쳐진 색채공간이다. 색채 자체가 풍기는 상징성이 그 뒤를 잇는다. 색채로 물든 납작하고 평평한 화면에는 디지털 에스키스가 은닉되어 있다. 그 이미지는 드러남과 동시에 색채 속에 파묻혀 있다. 좀 더 주의 깊게, 근접해서 보아야 보다 확연해지는 이미지다. 마치 누드가 색채 속에서 떠오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포르노이미지에서 따온 이 여자누드는 영상이나 사진이미지를 차용해 이를 캔버스화면 안으로 호출해 낸 것이다. 마치 고야의 그림 ‘마야부인’을 연상시키는, 서양미술사에서 흔하게 접하는 누드의 전형적인 포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이 벌거벗은 여자의 시선은 관자의 시선에 꽂혀있다. 이 수동성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에게 마냥 허용되어 있다. 그것은 남성의 시선일 것이다. 이 누드는 눈빛과 음부만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채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유혹과 일탈을 권유 하는, 숨기기 어려운 욕망을 흡입해 내는 그런 눈과 몸이다. 눈과 음부는 텅 빈 구멍이다. 관음증적으로 바라보는 이의 시선은 그 구멍에 무한정 빠진다. 이 무방비의 몸은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포르노이미지의 전형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는 삶의 도처에 산개하고 횡행한다. 우리는 이런 도색적 이미지에 포위되어 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더러는 은밀하게 소비하는 성적 이미지다.
다분히 비도덕적이고 통속적으로 그린 이 소녀누드는 거대한 크기로 다가와 보는 이에게 압도감을 준다. 마치 톰 웨슬만의 거대한 누드를 연상시킨다. 그 크기는 우리 욕망의 비등점이기도 하고 욕망의 대상에 속수무책인 무기력과 자괴감의 넓이이자 그 같은 포르노 산업의 거대한 규모를 상정한다. 동시에 그것을 규제하고 금기시하는 권력의 무게를 부피화 한다.
작가는 말하기를 이 작품은 9명의 소녀누드가 벌이는 침묵의 시위라고 한다. 그는 불법적인 성의 과도한 규제는 역설적으로 창의적인(?) 성 산업의 개발과 함께 새로운 수요를 개척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말한다. 그것을 작가는 이른바 ‘금기산업’(Taboo Industry)이라고 칭하고 있다. “금기는 황금을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금기와 욕망의 기묘한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것의 자본화, 상품화전략을 보게 된다. 한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강제하는 금기의 대상은 바로 죽음과 성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과 성을 관리 받는다. 국가와 사회, 가정에서 그 훈육과 금기는 이루어진다. 사회의 일탈에 대한 금기로 가장 먼저 의식화되는 것은 죽음이다. 따라서 일상은 결국 죽음을 극복하고 밀어내는 다양한 행위의 연출로 채워진다. 나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의식을 통해 일상으로 전환하면 그것이 종교가 된다. 죽음은 결코 경험될 수 없기에 오직 의식으로서만 접근될 수 있는 무엇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금기의 위반은 최대의 사회적 일탈이 된다. 자살이야말로 자신의 몸에 강제되는 권력과 금기를 일거에 지워버리는 일이다. 성 또한 죽음과 함께 금기의 대상이 된다. 한 사회에서 행하는 금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단연 성이다. 성이란 은밀한 인격적 관계로 에워싸여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사적이지만 동시에 욕망과 쾌락이 달라붙어 있다는 점에서 미적이며 또한 정치의 영역에 속하고 있다. 오랫동안 죽음과 성은 한 사회를 유지하거나 관리하는데 있어 반드시 관리되어야 하는 금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어쩌면 문화란 이 두 개의 금기대상을 관리해 온 궤적일 것이다.
죽음과 섹스에 대한 금기가 일상 속으로 기어들어올 때는 반드시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 규범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 금기에 대한 교육을 도덕이라고 하며 금기의 위반을 제재하는 것이 법이다. 그 금기의 의식이 또한 제도이다. 그것이 금기가 되는 것은 일상에서의 통제 불가능한 일탈이 타자에게 주는 공포심 때문이다. 섹스에 대한 통제 역시 통제 불가능한 인간의 일탈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그 공포가 제도화되는 것이 권력이다. 타자에 개입할 수 있는 최대한의 권력을 사회화했을 때 거기에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성에 대한 무수한 금기가 발생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상의 안정을 꿈꾸는 사회권력이 더 강고한 도덕과 더 많은 사소한 제도를 양산할 때 일상에서의 일탈은 더욱 폭력적이며 전면적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금기는 위반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위반할 필요가 없는 금기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따라서 금기는 항상 위반이라는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자본, 산업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역설적으로 금기가 강화될수록 그것을 위반하는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이것이 새로운 산업으로 진전된다. 신진식은 이를 ‘금기산업’이라고 부른다.
신진식은 그 부분에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작업을 통해 우리사회의 금기와 그것이 낳은 또 다른 모순을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간결하게 드러낸다. 이 그림은 아이러니한 금기산업의 의미, 규모, 정체를 사진이미지와 드로잉, 색채추상, 그리고 숭고함을 자아내는 거대한 화면(순수미술)이란 틀 안으로 수렴해서 충돌시킨다. 생각해보면 현대미술은 일상의 일탈을 문화라는 제도 안으로 순화해서 길들임으로써 금기로 규정한 것을 세련되게 막는 문화적 행위 자체일 텐데, 또한 그것이 다름 아닌 근대를 추동시킨 계몽 프로젝트일 텐데 그래서 외설을 예술로 승화하고 이미지와 정신의 이분법적 구도를 위태롭게 지탱하고자 해왔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성공했는가?
한 사회는 권력을 내세우고 도덕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금기를 관리한다. 이 권력이라는 폭력은 항상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타자’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경우에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죽음’과 ‘성’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강고한 억압과 제도의 지탱이 일탈의 허술한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섹스에 대한 금기의 위반으로서의 강간 혹은 포르노가 보편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동시에 금기산업이 기승을 부린다. 이 시점에서 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금기와 위반, 성과 죽음에 대한 규제와 일탈, 그리고 이에 기생하는 자본의 착취와 산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가 요구되는 것이다. 신진식의 이 명료한 이미지는 그런 사유의 촉발을 거대하고 단호하고 도발적인 그림 안에서 발화한다. □
[평론] 신진식의 “남용되는 금기산업”
홍진휘(미술평론가)
신진식의 그림엔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은 두 가지로 나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는 그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이란 주제를 직접 제시하고 작업한 것이다.
첫 번째 경우를 보자. 1985년 누드 디지털 프린트, 1993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다음해 선보인 종이상자 유화, 1996년 디지털 프린트 “나는 안다. 내가 누군지”, 1999년 뉴욕 개인전에서 보여준 “사후연구” 유화, 그리고 2007년 이후의 “이웃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가 무엇이건, 표현이 거칠건 정화되었건, 결국 어떤 아름다움으로의 종결을 추구한다. 회화라는 평면적 세계에 접근하는 그의 기본적 태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면에서 신진식은 고전주의자다.
두 번째의 대표적인 예는 여자의 육체다. 신진식은 여자의 육체를 어떤 눈으로 보고 느끼는가 하는 화두를 끌어안고 꾸준히 질문을 던져왔고, 이번 전시 “남용되는 금기산업”은 이 아름다움의 문제성을 사회적 관점에서 보려는 그의 최근 작업의 일환이다.
벗은 여자의 육체는 아름답다. 벗은 것 그 자체를 누가 나쁘다 하는가? (우린 더 이상 유교사회가 아니다). 그 여자 본연의 모습이기에. 문제는 누굴 위해 벗었는가? 에 있다. 신진식의 9점 “누드”는 과연 누굴 응시하고 있는가? 이들은 아티스트 신진식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여자들도 아니고,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같이 아티스트가 이상화한 여자도 아니다. 그저 길거리를 걷다 부딪칠 수 있는 이름 모를 남정네를 겨냥한 고객유치 홍보물일 뿐이지. 매혹적인 이 여자들의 눈빛은 어떤 한 남자를 향하여 자기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고유한 감정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다.세상의 모든 남자들이여, 난 그대가 누군지 몰라도 사랑할 수 있네!란 Universal Love다.
이렇게 형식화된 이미지를 두고 “포르노”라고 한다면 (“누드”와 대조시켜), 신진식은 이 장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술적으로 미화시킨다. 그린과 레드로 캔버스 백그라운드를 칠하고 앤디 워홀을 연상케 하여 지금 우리가 친숙해하는 팝아트의 아우라를 빌려 정당화시킨다. 우린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이 그림을 보는 우리를 공범으로 만든다.
사실 워홀이 처음 캠벨 수프 캔을 작품화했을 당시의 반응은 그가 상업소비문화에 승복했다는 격렬한 비판이 다수였다. 워홀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걸 그렸을 뿐이라며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아티스트 신진식은 모럴리스트인가? 그의 작품을 단지 금기산업을 겨냥한 사회비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잃는 게 많을 것이다. 그가 올해 초에 보여준 디지털 프린트 작품 “소녀시대”도 좋은 예다. 아티스트의 사회비판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으로서의 탁월한 착상이 번득인다. 워홀이 자기시대를 풍미한 마릴린 먼로를 대상으로 삼았으면, 왜 나는 우리시대를 풍미하는 소녀시대를 대상으로 삼지 못하랴. 아니, 당연히 삼아야한다. 오렌지색 백그라운드에 서있는 유나를 보고 50년 후의 관람자가 느낄 감동을 지금 우리가 결정지어줄 수 없듯이 그 아름다움의 가치는 그 자체로써 충분하다. 무엇이 신진식을 움직이건, 우리에겐 그가 그걸 통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아티스트가 하는 말은 절대 믿지 말라, 그의 아트만을 믿어라”하며 역설한 소설가 D.H. 로렌스를 떠올린다. □
[평론] 수수께끼 작품의 미학
오태영(극작가)
나이 들며 대화를 나눌 친구가 서서히 줄어간다.
예술하는 동네서 만난 동료도, 30년 이상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다보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거리만큼 멀어져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킬킬거리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데, 그들은 그런 나를 경계한다.
다행히 요즘은 미술하는 후배와 가끔 만나 킬킬거리는데,
마침 그 후배의 전시회가 있어 다녀왔다.
신진식은 <남용되는 금기(禁忌)산업> 이란 제목의 전시회로 무얼 말하려고 했을까?
전시장에 들어서자 일단 긴장된다. 이 긴장감은 내가 평소 봐왔든 다른 전시장의 작품들과 달리 눈에 익숙하지 않다는데 있다. 한때 많은 작가들이 <낯선 정서>를 위해 경쟁적으로 노력해 왔지만, 신진식 작품은 <낯설다>기보다 당혹스럽다. 굳이 말한다면 ‘강렬하게 낯설다’는 표현보다는 ‘무겁게 낯설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화폭의 크기부터 만만치 않다. 가로 4미터 54센티, 세로 1미터 81센티로 3백호가 넘는 대형 켄버스에 벌거벗고 누운 여자 그림 9점.
화폭은 정확히 오른쪽 왼쪽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고, 색깔은 초록색과 빨강 단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그것도 초록과 빨간색이 서로 섞이며 조화롭게 넘나들지 않는다. 초록색은 초록의 영역을 지킬 뿐이며 빨간색은 빨강의 영역을 고수할 뿐이다. 그렇게 벌거벗은 여자들은 빨간색 속에 빨간색으로 누워있고, 초록 안에 오직 초록색으로 누워있다.
이 단순하면서도 답답하고 단호한 법칙이 화폭 안에서 스스로 엄청난 변화를 시도하는데, 벌거벗은 여자의 상체와 하체가 각기 다른 색깔의 영역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즉 상반신이 빨간색이면 하반신은 초록색이고, 하반신이 빨간색 영역이면 상반신이 초록색 영역에 놓여지는 것이다. 심하게 말해 <방치되었다 혹은 분리되었다> 로 읽어야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에 한 발 더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여보슈, 상반신과 하반신의 아이덴티티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뭐 불편한 것 있소?”
오직 초록과 빨강 두 가지 색에 빠른 붓놀림의 검은색이 스치며 간단한 형태를 잡는다. 인화하기 직전의 네가티브 필름 같다고나 할까?
아기자기한 미학은 없다. 설명적 붓질도 없다. 작품 속의 여자들은 하나 같이 눈을 뜨고 있는데 아무런 표정이 없다. 고혹적인 미소도 없고 갈망 혹은 증오도 없다. 풍경화에서 즐겨 그리는 산도 없고 강도 없고, 그 흔한 꽃 한 송이 없다. 그렇게 따지면 신진식이 출품한 이번 작품에는 없는 것 투성이다.
상식적으로 전시된 작품들은 각기 제목이 붙어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용되는 금기산업> 이란 큰 타이틀 하나뿐 9개의 작품은 각기 제목이 붙어있지 않다. 제목 붙이기가 궁색하면 하다못해 <무제>라고 붙일 수도 있으련만 제목마저 없다.
각기 제목이 없다는 사실에 느닷없는 의문이 스친다. 그럼 뭔가?
그럼 이 전시실에 전시된 작품은 9개의 각기 다른 작품이 아니라, 3백호 넘는 9개의 작품을 하나로 묶어 놓은 거대한 하나의 작품이란 말인가?
나는 9개의 다른 작품으로 읽기 보다는 3000호 가까운 거대한 1편의 작품으로 읽어야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에 또 한발 가까이 가지 않나 판단된다.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Mass). 즉 대량 생산의 덩어리, 대량 홍보 메쓰 미디어의 덩어리, 대량 소비에 의한 남용(濫用)의 덩어리 그리고 축복의 대량 복제. 그 거대한 덩어리의 질서 안에는 익명성과 몰개성만 넘실댈 뿐이다. 작품의 모델이 이효리든 써니든 구하라든 무슨 상관있으며, 이효리의 눈동자에 써니의 성기가 붙어있다고 무슨 상관있겠는가?
빨강, 초록, 검정은 모두 어둡고 무거운 색이다.
거대한 화폭으로 전시실의 천정은 낮게만 느껴진다.
벌거벗고 누운 여자들의 표정 없는 눈이 표정 없이 관객을 바라볼 뿐이다.
현대산업시대 한 복판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다, 지하묘지 한 구석에서 마주친 벽화를 대하는 착각이 든다. 한편의 거대한 묵시록 같았다.
전시제목신진식展 ‘남용되는 금기(禁忌)산업 Taboo Industry’
전시기간2011.08.05(금) - 2011.08.11(목)
참여작가
신진식
초대일시2011-08-05 17pm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일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효령로72길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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