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주의(Vitalism)의 끝자락인가 아니면, 물성(physis)에 대한 새로운 조형적 해석인가?
60년대 쯤 한국조각에서의 화두는 '생명주의(Vitalism)'였다. 이것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원리적인 운동성, 그러니까 생명의 꿈틀거림을 무기물로 이루어진 조각재료 위에 표현하려는 시도로써 이해할 수 있다. 생명이 없는 무기체에 유기적 형상을 입히는 것이 마치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근본주의는 재현을 부정하는 추상조각이 나아갈 한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었고, 나름대로 조각의 자율성과 같은 개념을 뒷받침하는 창작원리로서 작용하였다. 생명주의의 역사는 브란쿠시(Brancusi)나 아르프(Arp) 그리고 헨리 무어로부터 헵워스, 채드윅 그리고 버틀러로 계승되는 현대미술의 큰 축으로 서술되고 있었으며, 한국의 조각도 이러한 서구의 신 조형성에 천착했었다. 생명주의는 자연의 근원적인 형상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또한 보다 궁극적으로 공간과 양감의 극적인 긴장과 조율을 이루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단순한 형태미라는 표면적 차원에 머물면서, 한국에서는 모더니즘 조각의 동력이 되었던 이 생명주의는 그 생명력을 박제화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생명의 흔적만을 가진 유품이 되어 장식품처럼 전락했다는 뜻이다. 작가 장용선은 이 생명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의도를 품은 듯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용선이 이룩한 형상성은 생명의 자궁(Matrix)을 형상화하려는 시도의 결과들이다. 아직 초년인 이 작가의 꿈은 벌써 원대한 이상적 차원을 넘나드는 것이다. 무모해 보일 수 있는 작가의 의도 한 켠에는 언급했던 전통적인 생명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비전통적인 해법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 우선 그가 재료로 삼은 것은 여러 종류의 금속 파이프이다. 이것을 잘라낸 토막들을 용접을 통해 붙여가면서 커다란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대략적인 작업과정이다. 작가는 "처음 파이프 재료상에 적재되어있는 파이프의 단면들을 보았을 때 이는 마치 하나의 세포 구조처럼 보였다. 파이프의 배열은 생명의 근원이 꿈틀거리듯 생기 있게 다가"왔다고 토로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형태들은 대개 가장 기초적인 유기체 형태를 띤다. 물론 형태가 이런 유형으로만 형성되는 데에는 재료 자체가 안고 있는 난제, 즉 다양한 형상성을 구사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이것으로 작가의 형상적 사유가 제한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렇지만 재료의 선택과 그로인한 형상적 결과는 나름대로 적절해 보이고, 또한 작가가 의도했던 목적과도 일치한다. 이런 합의는 아직 초년인 작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작가 초년생들은 사유와 형상 그리고 재료를 일치시키는 데에 기술적으로나 경험상으로 숙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를 강요하는 것도 무리다. 또한 재료에 선험적으로 조성된 형상이나 질감이나 양감 그리고 색감 등 미학적 원리들을 극복하는 것도 대두될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작가가 긴 여정을 통해 관철시켜야 할 부분이므로 보류해도 될 것 같다.
이제 작가가 지금까지 행한 조형적인 결과들을 분석해 보자. 전체적인 형태는 세포의 핵이나 자궁과 같은 원형질을 연상시킬 정도로 단순하다. 하지만 이 형태들은 스스로 분열 복제할 것 같은 확산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완성된 이미지들은 고착 혹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수축 이완하고 또한 확산 분리될 수 있는 가변적인 상황에 있음을 명시한다. 끊임없는 유동성(혹은 가변성)이 장용선이 만들어내는 생명주의적 조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재질이나 공간의 유기적 형상을 단순히 제공하고, 관객의 연상에 의존했던 이전의 생명주의 조각과는 변별되는 부분이다.
장용선의 형태는 매스가 아니라 공간을 내, 외부로 분리시키는 껍데기에 해당한다. 이 외피는 비가시적인 차원에 머물러야 할 미시적 형태를 확대한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해면체의 유기적 구조를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장용선의 조각은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상의 피부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피부의 표면은 수없는 파이프 토막으로 연결되어 빚어진 피막으로서 마치 내, 외부를 관통하여 숨을 쉬는 듯 한 인상을 준다. 작품은 공기와 빛을 투과시키며, 이로서 공간은 내 외부로 분절되지만 단절되지는 않는다. 이로서 유기체적인 성격은 암시가 아니라 재현으로서 호소력을 더한다.
또한 공간에 투사된 생명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 원인은 작품이 전시 장소를 단순히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더불어 숨을 쉬고 그 생명감을 확산시키는 표현력을 내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림자의 투사를 통해 공간을 적극적으로 작품의 포기할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끌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결과적으로 장용선의 조각은 공간과 빛을 적극적으로 작품의 요소로서 활용하면서 지금까지 매스로 이루어진 형상물이 아닌 겹으로 공간을 가르고 그 공간을 유통시키는 가장 유기체적인 모습을 지닌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약간의 과장을 곁들이면, 생명주의의 완결된 상태로서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스타처럼 등장하여 국제적인 이목을 끄는 작가들, 이를테면 yBa로 지칭되는 데미안 허스트나 마크 퀸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삶보다는 죽음을 암시하거나 그것에 대한 염세주의적이며, 시니컬한 언사를 띤 작품이나 퍼포먼스를 생산해내고 있다. 모더니즘의 생명주의가 그것보다 더 오래된 염세주의적 태도(Vanitas 혹은 Memento Mori)로 대체되고 있는 형국이다. 근래에 자주 보이는 에로티시즘의 성향도 이러한 불가항력적 운명에 유희적 차원으로 대항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보여주는 것이 대세이다. 그런데 장용선은 오히려 침묵에 가까운 생명주의적 형상성으로 큰 조류를 거슬려 오르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작가에게 무모함이 있다고 먼저 지적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노트를 통해 그리고 그의 작업과정의 면밀함을 통해 체험한 바로 그의 성실성은 바로 이러한 생명주의를 받치는 큰 의지력이 될 것임을 알았고, 또한 그것이 쉽게 저항력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저항력은 거시적인 이상주의가 아니라, 작가 개인의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체험으로 획득한 물적 생명성으로부터 나온다. 즉, 실재 경험에서 얻은 굳건한 사유와 형상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작업은 살아있어 보이는 세포형체의 군집으로 숨덩이를 조형화 해보는 데서 시작했으나, 우주적 이미지로 보인다. 끝도 시작도 없는 우주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는 과학자들과 달리 나의 개인적인 일상과 관련하여 소소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김정락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전시제목암흑물질의 파편
전시기간2010.03.10(수) - 2010.03.16(화)
참여작가
장용선
초대일시2010-03-10 17pm
관람시간10:00am~19:00pm
휴관일없음
장르조각
관람료무료
장소인사아트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 )
연락처02-734-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