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을 대표 하는 화가로 P.피카소 등과 함께 조르주 루오를 꼽을 수 있다. 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내어, 10세 때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4세 때부터 공예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업자의 견습공으로 일하였다. 유년시절의 경험은 후에 루오의 오묘한 색채발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0년 국립미술학교에 입학, 엘리도로네(1828∼1891)와 G.모로에게 사사하였다. 그곳에서 마티스, A.마르케 등과 알게 되었고, 서로 자유로이 자기의 재능을 계발해나갔다. 1893년 최초의 대작<연자매 돌리는 삼손> 1894년 <어린 그리스도와 박사들>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성서 ·신화를 주제로 한 독자적인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였으나, 정신 ·경제 ·건강면에서 고난의 시기가 계속되어 가톨릭에 기울었다. 1903년경부터 모로가 국가에 기증한 아틀리에에 만들어진 귀스타브모로미술관의 초대 관장이 되었다. 모로풍인 종래의 그의 작풍은 이때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격렬하고 동적인 분방한 선과 심청색(深靑色)을 주조로 한 수채화나 과시화(고무 수채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다. 주제도 창부 ·어릿광대 등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점점 짙어졌다.
1908년경부터 재판관이나 재판의 정경을 그려, 악덕 ·위선에 대한 혐오를 격렬한 색면(色面)과 굵은 선으로 표현했다. 1910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다시 종교적인 테마로 돌아선 것은 1913년경부터인데, 이에 관한 판화제작에 몰두하여 명작 <미제레레 Miserere>(1917∼1927)의 연작(連作)을 그렸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이 확립되고,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1929년 S.디아길레프의 발레 <방탕한 아들>의 장치와 의상을 담당하였고, 1948년 아시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종사하였다. 이 밖에 꽃의 정물도 잘 그렸으나, 어느 작품에서나 독자적인 신비성은 순수의 적 ·황 ·녹을 주로 하는 중후한 마티에르와 자유롭고 힘찬 선의 울림 속에서 일종의 엄숙감을 자아내게 한다. 그림이 점점 순수한 회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20세기에 있어서 루오는 끝까지 인간애의 정신을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