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주 나는 공간의 구조에 관심이 많다.이 설치 작업들은 그러한 나의 관심에 바탕을 두고 공간성, 현장성을 갖고 작업을 진행을 한 것이다.과거에 갤러리라는 공간은 작품을 감상하는데 사유의 대상이 아니었다.하지만 나는 갤러리의 공간을 이루고 있는 구조, 벽 등의 요소들을 대상으로 작업을 풀어나갔다.비연속성이라는 좌절감을 겪는 인간은 고독하고 불완전함을 느끼는 존재로 필사적으로 연속성을 갈망한다. 그러한 점에서 기둥과 철사는 각각 공간과 함께 구성되어 공간의 연속적 고리 연결을 통한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를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인간은 재난이라는 공포 속에서 무기력한 존재이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재난의 공포는 현대인의 불안 심리와 맞닿아 있다. 나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불안을 작업으로 표현하였다.
●김민정 “현대인의 생존” 이란 타이틀로 시대와 산업이 발달되고 현대인 또한 집단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변해간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느끼는 것은 냉혹함과 잔인성, 자연파괴 등... 즉 양육강식의 야만주의로 인해 현대인들이 비도덕적으로 변해간다. 시대가 좋은 만큼 그만한 문제점이 달려온다. 산업화문제, 다원화로 인한 문제, 개방화로 인한 문제, 정보화로 인한 문제 등... 갈등과 문제점도 심각해지고 그로인해 현대인들이 도덕적으로 황폐해진다. 자신의 주장이 강하고 성격이 과격하며 양보할 줄도 모르고 너그럽지도 못 하는걸 느끼게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자기가 피해를 입는 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예전집단 이기주의 시절의 부모임의 사상과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집에서는 개인적인 성향이 아닌 이기적인 성향이 드러난다. 또한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관심과 폭행, 다른 인종 다른 나라라고 해서 함부로 차별, 폭행하는 일과 하찮은 일이 직업인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일 등 이런 문제들을 보며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현대인 각각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인간이라는 양심을 버리고 자기 자신만의 안위와 명예욕 그리고 권력. 인간으로써 생각할 수 없는 잔혹성과 비도덕성으로 변해 가는 걸 느끼게 된다. 인형탈은 현대인의 가식을 뜻한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욕구 만족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의식주 욕구 외에도 권력, 명예 소유에 대한 만족한다. 그래서 각 개인마다 삶의 목표가 정해지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린다. 개인이 노력하여 그 목표를 이루어내면 욕구만으로 행복해한다. 그리고 다시 목표를 추구하고 노력한다. 그러나 목표도달에 실패하면 좌절감과 분노로 괴로워하며 나중엔 화를 낸다. 목표대로 되지 않은 것을 화를 냄으로써 목표대로 돌릴려고 시도해도 목표는 빗나 갈뿐.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가식. 가식이야 말로 자신을 보호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가식은 옛날의 물리적인 위험에 대한 자기보호 수단으로서의 가식이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산다.
●김성권 나는 나의 어릴 적 신체의 콤플렉스로 부터 시작하여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는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잠깐의 사회적 이슈나 사건으로 작업 하는 것 보다 나에게 더 절실한 이야기 이고 진정성 자체가 나 자신이기 때문에 더 많은 진실 된 이야기와 거짓 없는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연장되어 지금의 모습이나 현시대를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신체적 성장이 평균의 아이들보다 느렸다. 외소하고 약했고 울음도 많았다. 나는 비록 신체적이긴 하지만 많은 장애와 긴장감을 느꼈다. 성장이 덜된 나에겐 남성은 공포의 대상, 남성성은 동경의 대상 이였고 여성은 동경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 이였다. 성장이 빠른 주위의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그 친구들의 장난과 호기심은 나에겐 폭력이 되었다. 주위의 동급생 여자 아이들은 훔쳐 볼 수밖에 없는 대상 이였다. 나는 남성도 아닌 여성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평균보단 느린 때에 성장이 시작되었다. 주위에 친구들도 생기고 여자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당연한 것들이 되었지만 나의 생각과 행동의 파편에는 어릴 적의 조작들이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조각들을 발견하고 모을 때 마다 욕망과 욕심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모아서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나의 작업은 주로 페인팅과 설치(오브제)를 이용해 작업을 하고 있다. 초기부터 집중해온 것은 선반이라는 편의 가구의 특성 이였다. 선반은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를 하고 편의에 따라 물건을 올려놓는 가구인데 그 높은 선반에는 아이들이 손대지 않게 하기 위해 물건을 올려두는 사례가 많았다. 그런 것들은 사탕이나 약제 접착제를 비롯해 많은 물건들을 올려두곤 한다. 저는 이러한 사물에 대한 특징에 많은 생각이 들었고 집중하게 되었다. 선반을 시작해 사탕<선반 위에 사탕>에 대한 작업과 수납장<남성성과 여성의 충돌>에 대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제는 <소인국 사람들> 이라는 설정의 이야기 이지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소인국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시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외에 페인팅 이외 매체의 작업으로는 <비행기 정비>와 <상승 설계도면>,<유리계단>,<별>등이 있다.
●김영훈 나의 작업은 시간과 경험,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단한가지 바람으로 시작된 관찰이 나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의 바람은 인생을 살면서 나 자신이 나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과 과연 우리 세상에는 본인스스로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관찰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들은 어딘가에 속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있다, 어느 단체에 속함으로써 그속에서 자신은 없어져 버리며, 자신이 아닌 틀에 맞쳐줘 살아가는 본인의 모습을 볼수가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속 틀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삶을 나는 작업을 통해서 말하고 싶다.
●김주영 우리는 한 끼 식사나 모임 등 을 위해 횟집을 찾게 된다. 우리 인간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횟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조관에 있는 물고기들은 구매자를 위해 조리 되어진다. 구매자에게 가장 신선하고 맛있는 , 그저 한끼의 식사를 위해 가장 잔인하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이 수조관의 물고기들 인 것이다.우리 인간들의 식 생활을 위해서 무자비 하게 죽어가는 물고기들의 고통을 표현 하고 싶었다,그저 맛있게 한끼 식사로 물고기나 다른 식재료가 되어가는 동물들이 죽어 가는 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었다.우리가 웃으면서 즐겁게 밥을 먹이 위해 비참하게 죽어가는 물고기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반복의 미학 트레이너 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느낀 점 인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꾸준하지 못하다. 처음 센터에 올 때에는 뭔가 기대를 갖고 멋진 몸을 상상하며 운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시작을 끝으로 센터에 얼굴을 비치는 일이 없다. 3개월 권의 이용료를 내 놓지만 정작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은기 1주일 이 안되니...운동기구를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집에서 열심히 하려고 운동기구를 사지만 나중에는 빨래 말리는 일에 쓰이고 있다. 일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몸을 좋게 만들어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방법은 다른 게 아니라 정말 꾸준히 계속해서 동작을 반복해 나가는 사람만이 몸을 만들 수 있는 것 이다. 운동 방법이 조금은 틀려도 상관없다. 원래 모든 움직임은 운동이기에 방법이 조금 틀렸다 한들 몸이 안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몸을 만들려는 사람은 몸짱 비법 같은 것 에 신경 쓰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운동에 대해 좀더 충실하게 반복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화경 나는 조용한 공간을 좋아한다. 텅 빈 공간은 나에게 차분함과 위압감을 동시에 안겨주어 묘한 느낌에 매료되도록 만든다. 나의 그곳은 대체적으로 버림받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간들 역시 처음부터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곳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공간의 역사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의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되었고, 정치적 목적이나 국가적 행사를 위해 만들어졌던 많은 경기장들은 이제 모두 폐물이 되어 적자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과거의 영광은 어디로 사라지고 쓸쓸함만 남게 되었나. 그래서 나는 이러한 공간들에 대해서 심리적인 평안함과 왠지 모를 긴장감을 동시에 주고 싶었다. 그것이 현재의 고요한 공간에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앨빈 토플러는 3대 권력으로 물리적, 경제적, 지식적 힘을 꼽으며 이와 같은 순서로 권력이 이동해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이 중요한 이유는 ‘부의 창출’과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원초적 권력의 힘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에서 생각이 출발하였다. 그러다 문득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3대 권력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권력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제4의 물결. 그것은 바로 ‘외모’이다. 서양 속담에 A beautiful face is a silent commendation.(아름다운 얼굴은 무언의 추천장이다.)라는 말이 있다. 특히 여자들에게 필수요소로 강요되는 ‘용모단정’의 의무는 그렇지 못한 자들에겐 족쇄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권력을 가진 남자’의 여자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권력의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이제 우리의 시선에는 본질을 보완할 대체품이 필수로 자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남보람 무언가를 소유 하거나 무언가로부터 소유를 당하고 싶은 욕구, 모두가 그렇듯... 언젠가부터 영원한 것과 내 것이 없다는 생각에 소유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넓고 다양하지만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어떤 무엇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기댈수 있는곳은 없는것만 같다. 자연과 동물 그들을 소유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 항상 따뜻하고 안락하고 싶다.나는 모든 생명체들이 나와같이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외로움을 덜고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꼈으면 한다.동물은 우리와 닮았고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따뜻함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이 되었고, 나와 가장 닮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행복감을 찾는 것이,그것이 한번뿐인 인생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나를 찾아갈수 있는 길이 아닐까.
●마하나 내 궁극적인 작업관은 ‘파라다이스+인간 존재’ 이다.우리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을 향해서 살고 죽는다. 정작 그 곳을 찾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왜 이런 주제를 가지게 되었냐면, 출발은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존재성에 관해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애완동물을 키워도 일찍 죽어버리고, 왕따 취급을 받았을 땐 같은 또래의 사람인데 왜 다르게 생활하게 되는 거지? 학년이 바뀔 때마다 정말 우연인지 필연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1년마다 여러 이유로 1,2명씩 이 세상에 같이 살지 않게 된 것이 쌓이다 보니 죽음에 관해 익숙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다음엔 누가?’ 라는 나쁜 생각.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떠나고 있을 텐데 나는 유독 내 주위에서 떠난다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고, 꿈 속을 도피처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새 말로 ‘현실은 시궁창’ 이여서 말이다. 나 스스로도 잠에 취한 눈으로 게슴츠레하게 현실을 바라보았을 때를 생각해본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쉽게 체험해 볼 수 있다. 그 곳과 이 곳에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있고 없고의 차이. 사람들은 ‘삶/죽음’ 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무겁고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일상 속에 바로 곁에 다가와 있다. 회화작품은 내 눈 앞에 펼쳐진 환상을 옮겨 놓은 것이며, 설치 작업에서 <집>은 일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의 향수와 그래서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고 그 곳에서 꿈꿔왔던 것들 까지 불러일으켜주고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이 현재 살고 있는 집에 관해 의미를 다시 묻고 싶다. 그리고 <가족>은 그 집의 구성원으로서 요즘 내 삶을 돌아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주제이다. 하나의 공동체인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빨래건조대에 걸린 옷가지들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내가 일상에서 찾은 내가 생각한 파라다이스는 멀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나는 자부한다.
●박한별 꽃은 아름답기만 하는가?나의 시선으로 보는 꽃이라는 존재는 아름답지 않다.나에게 다가오는 꽃이라는 존재는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우며 혼돈스럽기까지하다.알수없는 여러 가지 화려한 꽃들이 존재하는 이땅은 나에게 혼돈 그 자체이다.나는 꽃이라는 존재를 섬세하게 관심의 시선으로 관찰 하였다.지극한 관심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해준다.화려하고 아름다움이라고 감싸진 외면이 열리고 비로써 내부가 드러나게 된다.나는 여러 꽃에서 보고 느낀 것을 내 나름대로 회화로 표현해보았다.기존의 아름다운 형태를 다양하게 변형시키기도 하며 이질적인 것들과 결합시키기도 했다.꽃의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그 외면이 숨기고 있는 형상을 떠올렸으면 한다.눈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나의 가슴속에 잇는 눈이 본것을 표현 한것이다.이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나는 자신의 모습을 ,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성윤희 삶도 사람도 사랑도 언젠가는 썰물로 빠져나가겠지만, 그러나 빈 손으로 남는 것이 아니듯 세밀하고 촘촘 하게 짜인 인생의 결 속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순간과 영원한 삶 안에서 언젠가 한번쯤 가 보았을 법한 그런 기억을 불러본다.
●이도경 실제로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의 재현이다.누구나 인상깊었거나 마음에 드는 꿈을 꾸면일어난 후에도 계속 잔상이 남아 생각 나고다시 꿈을 이어나가고 싶어하거나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랄것이다.왜 대부분의 여성들은 수많은 고통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하이힐을 고집하는가.점점 늘어나는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하이힐만을 원하는 여성의 심리를 표현했다.
●이미현 "제가 집에 오는 길에 누굴 만났는지 아세요?"귀 기울여주세요.눈을 바라봐주세요.손 잡아주세요.최첨단 신무기가 나왔습니다. 이제 그 어떠한 힘도 당신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사용법은 그림을 참고하세요.
●이원희 나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곧 ‘기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억이 서린 모든 것들은 결국 ‘나’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놀던 장난감, 처음으로 캔버스에 그린 그림, 절친한 친구들과 여자친구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기억되고 추억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릴 적 추억이 서린 물건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마음이 허전하고 어딘가 안타까울 것이다. 그것이 더 큰 존재였다면 육체적 아픔만큼이나 큰 아픔을 느낀다. 나의 작품들은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 4명의 나 자신이다.
●임유리 내안에 수많은 감정들이 얽히고 그것이 고조되었을 때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그리고 비로소 무의식의 꿈을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모든 것은 세월의 흔적과 함께 퇴색되고 바랜다. 기억들까지도
●장병오 하루의흐름은간단하다. 해가뜨고 달이지고 달이뜨며 해가지는, 나또한 이러한 자연의섭리를당연히 여기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 현상을 난 낮달이라 명명한다.간과해온 낮달에대해 깊이고뇌하고, 사유해본적이 있는가? 낮달이 수천번 아니 수만번지나가면 다시는낮달을 볼 수 없다. 난 이작품을빌어. 시간의흐름을통한 삶과죽음, 무심코 지내버리는 ‘찰나’ 라는 객관적지표를 관객이 이전과는 다름이란 것을 깨달았으면한다. 이 글을 읽고있는 순간에도 해는지고달은뜬다.내가 가장 좋아하는단어인 Sprezzatura의 뜻에서 이 드로잉은 시작되었다.이 드로잉이 담고자하는 철학은, 노력하거나 신경을 쓴사실을 드러내지않는 일종의 가장된 무심함의표현이다. 이러한 메시지의대한 의미를,실제적/현실적으로 다루며, 형태와의 조화로움을 드로잉 작업을 통해 표출해 보고자한다 .
이탈리아의‘피티워모’(Pittiuomo-세계남성복의축제기간)의 인사들을 모티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테일러링된, 멋쟁이신사들을Sprezzatura라는 나의철학을 녹여내 보았다.음식인줄알고다가오셨나요?먼저눈으로맛을보세요.만들어논음식이아닙니다.주문을받아차려놓은제작품이에요,그래요기성품이아닙니다.관객의눈을배불리하기위한일종의fake,이게제의도입니다.음식으로는느낄수없는시각의배부름을선사해드리겠습니다.이깨달음은파스타의면을데치고소스를만드는것보다더짧은시간이지요.부패를모르기에맛과향이없습니다.관람전든든한식사전이시라면귀가길에맛있는식사하시며저의작업을떠올려주세요.촛대는 양초를위한 도구이다.
그 도구엔 각각의목적이있다.도구는 목적을 잃는순간 본연의 존재감을상실한다? 라는물음에대해, 아닌데? 라고이 작업을통해 난 말하고싶다. 침대는 가구가아닌과학이라지만, 내 전시공간에선 촛대도 가구가아닌 과학이다. 깊은 고정관념에대한 지루한시각을 타파하고싶다. 작가인날대신해 나의 전시공간에 와주신 관객여러분들을 향한 일종의 감사인사의개념으로봐도 무방하다.한번켜진 형광등은 당신이 지나가면 곧 꺼진다.다음 관객이 지루한시각을 가진채 입장하는 순간, 다시돌아와켜 질것이다.
●전지현 어렸을적 나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반무의식 상태로 뛰어 다닌 다거나 현실과 꿈을 분간 하지 못하고 공포에 떨어 어머니께서 잠자리가 편해지라고 불경에 나오는 ‘광명진언’문구를 침대 머리맡에 붙여 주셨던 특이한 경험이 있다.어렷을적에 꾸었던 꿈들과 그로인한 기이한 체험들은 나의 작품 전반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꿈, 초현실, 기이현상과 같은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하게 되었다.내가 꿈속에서 본 이미지들은 대부분이 일상적 풍경이다. 그러나 무언가 현실과는 다르다고 느껴지는 이질감이 드는 일상 속 풍경들이다. 내가 서있는 곳이 현실인가 아님 현실 저 넘어에 다른 곳인가 에 대한 생각들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나는 수향 연작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와 같은 체험을 제공 하고 싶다. 수향을 통해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냥 작품을 멍하니 쳐다만 봐도 좋다. 멍하니 무언가를 쳐다본다는 건 잠시 무의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고, 그 자체만으로 무의식의 경험이자 초현실의 경험이고 또 꿈의 세계를 경험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수향睡鄕은 ‘꿈나라‘라는 뜻으로 연작인 각각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꿈속에서의 독립된 장면들로 하나의 파노라마와 같이 구성 된다. <수향睡鄕 NO.0-2>, <수향睡鄕 NO.0-7>작품은 꿈속에서 본, 풍경, 감각들을 구성 한 작품 중 하나(한 장면) 이다. 나의 어렷을적 경험에서 ‘광명진언’문구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광몀진언’문구는 나에게는 부적과 같다. 오색실 팔찌는 불교에 대한 믿음과 어머니에 대한 신뢰로 만들어진 ‘광명진언’ 불교 문구와 같은 나만의 부적이다. 이것을 지니고 다니면 행운이 따른다는 종교적 의미가 있으나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면 의미가 달라지고 장신구적인 소모품이 될 것이다. 부적이란 의미부여와 자기최면으로 만들어 지는 거라 생각하여 키치적인 <오색고무줄 팔찌>를 사람들에게 만들어 주는 퍼포먼스를 하게 되었다.오색실 팔찌가 되기 전에 실은 아무 형태가 되지 않은 ‘무無’의 상태일 것이다. <오색실설치>의 실을 헤치며 가운데를 통과함으로써 나는 어렷을적 어머님이 머리맡에 붙여주신 ‘광명진언’불교문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종교적 믿음이자 어머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다.
●정수정 어릴 적, 혼자였던 아이는 친구들이 필요했다그리고 그 결핍은 오직 공상 속에서만 해소되었다.혼자 할 수 있는,공상-습관-마약-본드-파티볼을 긁을 때마다 배가 파고들듯이 아팠다.유영하는 여자는,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라고 생각했다.장지가 긁혀지면서 보슬, 일어나는 보드라운 입체, 촉감도 이와 맞물린다.그리고 그 이상이 아닌, 단순히 만지고 닿는 이야기로서 끝이 난다.‘그리고 싶어요’
●정예슬 어린 시절에만 해도 놀이터는 동네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학교가 끝나고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모두들 놀이터에 모였고 저녁 즈음에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찾아 데려가곤 했다.유년시절이후에도 학원이 끝나고 학생들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수다를 떨기도 첫사랑의 풋풋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놀이터는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매일 지나치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뜩 마주한 놀이터는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그 이후에 나는 의식적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가장 많이 본 것은 텅 빈 풍경이었다.텅 빈 놀이터는 어쩐지 외로웠다. 이전에 기억들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지만 그 기억들만 어디 선가 되풀이될 뿐 막상 그곳은 아무도 없는 부재의 장소 이었다. 존재하는 장소라기에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문뜩 우리가 삶의 조각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내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풀어내려 고군분투한다.그리고 무언가가 되어서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지고 싶어 한다.학교를 졸업하면 회사에 취직하면 가족을 만들려고 한다. 이러한 집단적인 현상이 한국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고 이 코스를 밟지 않으면 잘못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 된다.어릴 적부터 나는 그런 룰이 싫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두루 어울리려다. 외톨이가 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집단에 속했을 때도 어쩐지 혼자가 더 편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점점 이 게임 속 에서 적응해서 결국 룰대로 살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에 대학 경각심이다.우리는 이런 퍼즐 맞추기에서 벗어나야한다.이미 자아가 형성되었다고 믿고 있는 어른들도 결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결국 퍼즐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결국 깨달아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퍼즐 속에서 나와서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어떤 것에 의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정유진 나의 유년시절에 하나둘씩 내 주변으로부터 떠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떠나게 된 것은 대부분 자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고 그 일에는 그 당시의 사건사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부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국민이 된 사람도 있었다.이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의 환상처럼 나의 기억에서 뒤엉켜 이제는 제대로 된 진실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도 허구도 아닌 이야기로, 내게는 전설처럼 존재하게 되었다.그들은 그렇게 외부에 의해 파편화 되거나 사라져 어른이 된 나의 감성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space out은 ‘마약을 한 것처럼 멍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치 디지털 화면의 현란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컬러풀한 화면과 그 속에 뒤엉켜 있는 오브제들은 어딘지 이상하다. 이렇게 구조화 된 공간 속에서 우리의 개성과 감성은 조금씩 분해된다. 냉정하게 떨어지는 구조물 속에서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중간에 있으려 한다.자각의 공간이 공간 속이 현재인지 아니면 의식 속에 있는 이상향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순간 감성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 허용되는 공간이다. 흐르고, 사라지는 자연의 요소들을 찾으며 일치시키고 그 속에 나를 대입해 본다. 이따금씩 의식 속에 침투하는 어떤 방해물들도 현실과 무의식을 분리시키지 못한다.
●조우리 나는 '누구'고, '어떤'사람인가? 나 본인 스스로의 심리를 알고 싶어하는 반면에, '색'에 대해서 마음이 쓰였다.도시에 살면서 회색빛으로 무채색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다. 어려서부터 학교나 주의에서 튀고 싶지 않아하는 소심한 성격 탓에 '내가어떤걸'하고 싶은지를, 스스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수 없게 되었다.그러면서 사람마다의 스타일과 컨셉을 색깔로 표현하자면, 왠지 색이 있지만 색이 없는 '회색' 같다.아무 생각 없이 좋은대로 행동하고, 의무화하면서 사회를 마치고 마치는 끝에, 목표 다음 끝에는 다음으로 나아갈 곳이 없다.점점 '무'처럼 무의미하게 할일없이 지나가고 기억에 납기지도 않는 시간들리 지나간다. 보이지도 않고 흔적도 보이지 않는, 할 일없이 허비한 '시간'은 계속 쌓이고 쌓여가는 것 같아서,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것 같았다.철판 위에 그리는 과정의 회화 작업은 만들어진 제본 틀안에서 색을 채워가는 '어린동심'처럼 색을 채워넣고 꾸미는 과정이다.처음 제작한 문양도안을 주문작성하고, 그 다음에 제본된 틀안에는 아무 그림없는 무색 모형도화지 안에 색을 그리고 채워간다. 처음 어린마음으로 형형색색의 물감 또는 미술도구로 정해져있는 원본색 대로 그리지 않고, 다른 색을 바꿔가며 꾸민다.
어린시절 처음 시작한 '색칠놀이'처럼.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내 작업은 주문제작해서 만들어진 철판 제본판위에서는 한정적으로 정해진 공간 안에 있다. 얼추 정해져 있다, 나름대로 있는 옷들 중에서 다르게 바뀌입는 옷처럼 꾸미는 스타일로 색을 만들고, 제본 된 철판 안에 '무색 공간' 속을 채워 주어간다.왜 '이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의무'도 없이, '색깔'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다.도심 안에 있는 일상에 살면서 회색빛으로 무채색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도시안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이미지나, 전통문양 등의 모형틀판들. 그 위에서 나만의 색을 채워간다. 사람들 눈에 띠지 않는 그들의 평범함, 그 본래 정해져있는 색도 아닌 '색'을 바뀌어 칠고 싶다.시간의 축적어려서부터 학교나 주의에서 튀고 싶지 않아하는 소심한 성격 탓인지 아무 생각 없이 좋은대로 행동하고, 의무화하면서 사회를 마치고 마치는 끝에, 목표 다음 끝에는 다음으로 나아갈 곳이 없다. 점점 '무'처럼 무의미하게 할일없이 지나가고 기억에 납기지도 않는 시간들리 지나간다. 보이지도 않고 흔적도 보이지 않는, 할 일없이 허비한 '시간'은 계속 쌓이고 쌓여가는 것 같아서,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것 같았다.시간 죽이기태어나서 내가 살아온 날들의 '시간'들은..내가 이 영상처럼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모습은 행동하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였다 사회적인 의무적으로 살아왔다. 사회화 의식적으로 살아온 나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강요도 요구도 아닌 석택을 한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의 기억에도 남기지 않는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때의 '시간'들은 이러는 동안은 내가 의식하지 안고 나의 '시간'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렸는데도? 모르게 쌓여왔다. 그런대로 잘살아왔다. 하지만 왠지 모르는 그'시간'들이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재준 현대사회는 물질만능주의와 무한경쟁의 사회이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밟고 넘어서지 못한다면 경쟁에서 패하고 패배자로 살아간다. 경쟁에서 살아 남기위한 스펙 쌓기와 그렇지 못한 이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으로 두 분류로 나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모두가 뻔히 알고 있지만 왜 바뀌지 않는가. 사회는 왜 바뀔 수 없는가에 대한 의문과 사회를 비판하고자한다. 나에게 닥친 코앞의 현실을 체감하면서 우리세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현실을 보면서 작은 몸짓이지만 그들에게 경각심과 변화의 작은 발판으로 작용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업을 진행하였다.현대사회의 여성과 명품선호사상 남성의 여성성상품화를 비판하고자한다. 광고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여성의 성 상품화와 욕망과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여성은 명품을 얻기 위해 남성성을 이용하고 남성은 성적욕망을 얻기 위해 여성을 상품화시킨다. 서로를 비난하지만 결국 모순으로 사회는 돌아간다.
●채상우 현대사회는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즉 현 자본주의 시대는 물질만능주의 시대라 본다. 돈이 권력이고, 명예고, 내 위치인 것이다. 물질이 지배하는 현 사회는 서로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결핍되어 현대의 건축물처럼 경직되고 단결된 개인적인 공간에 묻혀 버렸다고 생각한다.나는 현대 자본주의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담아 인간성이 상실된 물질만능주의의 시대의 삭막한 사회를 이야기하고자 한다.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현 사회의 이면에는 더러운 모습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모습을 계급이라는 위치로 화려하게 포장해버린 것에 대한 비판을 말하고자 한다."나는 무엇을 쫒고 있었는가.""나는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최윤정 나는 나의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어릴 적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겁이 많았던 것일까? 특히 엄마가 오시는 저녁이 되면 어두워지는 방,거실을 보며 무서워하고 또, 두려워했다. 그때부터 혼자 있는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내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외롭고 두려운 아이들을 다시한번 생각 해 보았으면 좋겠다.
●최숙진 청춘 자기 손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손을 유심히 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다분히 신경 쓸 것이다.‘저 사람 손도 그렇게 예쁘진 않네.’‘내 손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비슷한 맥락에서 나를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청춘’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이다. 손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처럼 나는 나의 ‘청춘’에 콤플렉스가 있나보다. 아름답지 못한 나의 청춘에 ‘청춘’은 매우 거슬리는 대상인 것이다.내 눈에 밟히는 청춘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어색해질 나이인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현재 나의 나이인 20대까지이다. 이들은 누군가에겐 젊음 그 자체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겠지만, 청춘을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은 사실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왠지 모를 불안과 좌절, 슬픔, 고통, 분노 등의 감정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 땐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같은 패거리 안의 친구를 돌려가며 왕따 시키기도 하고, 어떤 가수를 부모님보다 더 좋아하고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어른스러운 예쁜 옷이나 액세서리들을 샀다가 몇 달 새에 유행이 지나면 바로 사용하지 않기도 했다.중학교 땐 공부를 하기보단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것을 가로막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없는 세상으로 가서 살고 싶었다.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히 대학진학이나 직업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누구인지’, ‘세상을 살 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등의 심오한 고민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침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오는 것이었고, 내 삶의 문제들은 언젠가 누군가가 다 풀어줄 매듭 같았다.이성 친구에 대한 생각도 그리 깊지 않았다. 그저 재미로 남자친구를 사귀어보기도 하고, 위험한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밤새워 동네 구석진 곳이나, 아직 공사 중인 건물 등에 들어가 술을 마셔보기도 했다.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계속 어릴 적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막연히 현재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고,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내 미래를 잊게 해줄 재밌는 사건들이 일어났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다. 여전히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에 답은 뒤로 미루고 그저 어리다는 것을 벼슬 삼아 하루하루를 적당히 살아간다. 마치 나는 뿌연 안개 속에서 아메바처럼 꿈틀대고 있는 것 같다.길가에서 서성이는 나와 비슷한 청춘들을 보면, 또는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어떤 장소를 바라볼 때면 가슴속으로 예전 나의 모습들과 지금의 복잡한 생각들이 마구 뒤섞여 물밀듯 밀려들어 온다. 그럴 때면 소금물에 절여지는 갯벌처럼 내 가슴은 미어진다. 왠지 모를 이 아픈 감정은 나로 하여금 그들을 한 번 더 쳐다보게 하고 생각하게하고 그리게 한다. 이 아픈 마음이 청춘인 걸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필 이런 모습이어야만 하는 걸까.
●허승원 99년 12월 31일 12시가 되기 몇 분전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함께 5,4,3,2,1을 외치며 새로운 세기의 새해, 밀레니엄을 맞이했었다. 그 당시 나는 2000년 0시 1분 불이 꺼진 건물에 하나씩 불을 밝혀지기 전까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다는 기대감의 이면에 Y2K(year two kilo problem), Year 2000 bug로 불린 이 공포감이 사려있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이것으로 불거질 정치 경제적인 사건들에 대한 불안감이라기 보다는 도시의 불빛이 더 이상 밝게 빛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 즉, 우리가 만든 질서에 혼돈이 생길 것은 아닌가에 대한 불안이 공존했다.프로그래머와 컴퓨터 제작자들이 돈을 조금 아끼기 위해 개발 당시 컴퓨터는 비용과 기술상의 문제로 서기 연호를 2자리수로 처리하도록 설계되었다. 연도를 2자리수만 써도 컴퓨터가 연도를 인식하는 데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4자리수로 표기할 경우, 데이터 분량이 늘어나 속도가 느려지는 단점마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자리수로만 표기할 경우 컴퓨터가 2000년과 1900년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어 전력과 상수도의 공급중단, 병원의 의료기기 오작동 등 기초적인 생활환경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고, 이로 인해 '1999'에서 '2000'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중대한 장애가 발생할 것이며 대혼란이 야기된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조성되었다. 은행, 금융시장, 정치, 경제 등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패닉상태로 빠져 큰 문제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키워낸 공포를 밀레니엄 버그라고 말한다.내가 기억하는 밀레니엄 버그는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 속 형 형 색색 빛나는 불빛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질서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그 불안감과 동시에 다시 시작된 질서의 시작을 알린 건물의 불빛. 막연히 불안했던 새로운 세기에 대한 불안감을 까맣게 잊고 떨친 채 이제 12년이 흘렀다. 21세기 하고도 어느덧 12년. 우리는 현재 새로운 세기를 맞기 전보다 더 계획적이고 질서 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다른 어떤 의미에선 세기말의 그 흉흉하던 시절보다도 더 어지럽고 복잡한 시기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전산 오류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상식과 원칙의 오류가 염려되는 순간이 도래하고 있는 현실. 어떻게 보면 밀레니엄버그 그리고 상식을 자신할 수 없는 수 많은 어지러운 상황들 역시 모든 불안감의 이면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질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돈이라는 질서와 함께 인간이 만든 그 의미 없는 숫자 하나에 혼돈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인 증권가. 나는 이 공간이 밀레니엄 버그에서 보여진 혼돈과 질서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무수하게 그리고 촘촘하게 빛나는 형형색색의 질서 속에서 공존하는 혼돈의 상황들. 그것도 폐장되어 그 것을 만든 사람들이 부재한 흑백의, 색이 없는 모노톤의 폐장된 증권가로 말이다.착한 여자 S씨 되는 법 세상에 불변하는 정의가 있다. ‘착함’. “착하니까. 착해서. 착해야 된다.” 이처럼 우리는 사회에 적응하게 되기 전부터 착하고 바르게 살아 한다고 강요 아닌 강요를 받는다. 때문에 착하면 뭐든지 해결 될 수 있다 믿었던 지난날. 하지만 사화는 정상적인 사람이나 인물을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고, 착하면 바보가 되어버리기 일 쑤었다. “착하다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라는 말로 이 상황들의 탓 역시도 착한 사람에게 돌리던 수 많을 상황들을 지켜보며 그 기준이 무엇인지 의아했다. ‘착함’ 도대체 그 착함의 기준이 무엇일까? 누군가가 정해놓은 확실한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끝없이 애매하고 딱 떨어지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1순위로 바라는 조건인 ‘착함’. 그리고 착함을 정의하고 싶었던 나. 여기 착하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한 사람으로 착함의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착함으로 살고 착함으로 죽는 ‘착한 S’씨.
전시제목가천대학교 회화과 서양화전공 28회 졸업전시회
전시기간2012.11.14(수) - 2012.11.20(화)
참여작가
강병주, 김민정, 김성권, 김영훈, 김화경, 남보람, 마하나, 박한별, 성윤희, 이도경, 이미현, 이원희, 임유리, 장병오, 전지현, 정수정, 정예슬, 정유진, 조우리, 조재준, 채상우, 최윤정, 최숙진, 허승원, 김주영
관람시간10:00am - 07:00pm
휴관일없음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덕원 갤러리 Dukw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 )
연락처02-723-77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