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연의 작업
지옥의 묵시록과 세계의 장엄한 종말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최선의 세계를 의미하는 유토피아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다.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과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그 세계는 완전한 자기동일성의 논리로 구조화돼 있어서 일체의 비동일적인 것, 차이 나는 것, 이질적인 것, 타자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어쩌면 그 세계는 질서라는 이름의 제도에 의해 완벽하게 짜여진 고도로 인공적인 세계, 전제주의와 전체주의, 경찰국가와 전자정부의 또 다른 형국일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비동일성의 논리에 의해 지지되는 디스토피아는 일체의 다른 것들, 차이 나는 것들, 이질적인 것들, 일탈적인 것들, 급진적인 것들, 상식과 합리와 논리에 붙잡히지 않는 것들, 샤먼과 토템, 마술과 요술, 점성술과 연금술, 사디즘과 마조히즘, 엑스터시와 오르가즘, 무분별한 욕망과 분출, 과도한 무질서와 혼동, 금기와 터부, 잉여와 여분, 결여와 결핍, 그리고 광기와 같은 타자들의 제국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자기동일성의 논리와 비동일성의 논리. 정체성의 논리(유토피아 제국에 입성하려면 정체성이란 패스포트가 있어야 한다)와 차이의 논리. 정상적인 것들의 제국과 비정상적인 것들의 제국. 선남선녀들의 제국과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나라.
그리고 헤테로토피아. 김수연은 근작에서 헤테로토피아를 주제화한다. 원래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미셀 푸코가 정식화한 개념이다. 주지하다시피 푸코의 저작에는 주요한 공간 혹은 장소 개념 두 곳이 등장하는데, 판옵티콘과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나는 너를 볼 수가 없는데 너는 나를 볼 수가 있는,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의 감시체계가 판옵티콘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부재하는 장소며 탈장소의 개념이다. 분명 실제 하는 장소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며 망각된 장소다. 이를테면 군대, 감옥, 기숙사, 정신병원, 공동묘지, 그리고 공창지대처럼 사회의 한 형태이면서도 소외된 사회며 커뮤니티다. 보다 광의적으론, 사실 이 의미가 무엇보다도 결정적인데,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장소며, 보다 적극적으론 이질성이 생성되는 장소다. 단순히 실제 하는 장소 개념으로서보다는 의식적인 개념이며 실천적인 개념이다. 정상성의 사회로부터 비정상성의 낙인이 찍혀 사회 변두리로 추방된 변방-사회며 잠정적인 사회 개념이다.
그 곳에는 일종의 억압이 일어나는데, 이를테면 정신병원은 정신병자와 함께 잠정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는 소위 반사회적 주체를 격리수용하는 시설이며, 공동묘지는 삶의 관점에서 볼 때 지극한 금기에 속하고, 또한 공창제도는 합법적으로 욕망을, 성을 관리하는 제도의 수행성을 증명해준다. 푸코는 이 일련의 반사회적 사회에 내재된 억압의 계기들, 금기와 터부의 계기들에 주목하고, 궁극적으론 그 계기들에 내장된,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원동력에 주목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푸코 식으로 재해석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를테면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주인(동시에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분배하는 주인)과 정체성을 인정받으려는 노예와의 게임 곧 인정게임에서, 특히 그 게임에 작용되어지는 노예의 자의식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계기를 본 것이다.
육체와 영혼이 거래되는 장소. 중세 이야기 중에는 유독 자신의 그림자를, 영혼을 악마와 거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아마도 신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억압적 이데올로기(이를테면 세속적인 삶에 한눈을 팔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이데올로기) 탓이 클 것이다. 종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는 그렇다 치고, 적어도 외관상 신도 죽고 이념도 죽어 진정한 인본주의 사회를 실현한(?) 현대인에게도 이런 일은 일어날까. 유감스럽게도 그 일은 현대에 와서 오히려 더 억압적으로, 은밀하고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푸코는 개별주체에 대한 제도의 감시가 이전처럼 육체를 감금하던 것에서 개인의 의식을 파고드는 것으로 진화한 것으로 본다).
인간을 복원하기 위해 신을 죽였지만, 정작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절대적인 신, 무지막지한 신, 인정사정없는 신이 그렇게 죽은 신의 빈 자리에 대신 등극했는데, 자본주의 물신이 그것이다. 그 신은 인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뻔뻔하기조차 하다(자신의 속물근성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 신은 세계를 크게 유산자 계급과 무산자 계급으로 나누고, 무산자 계급에게 여지없는 비정상성의 낙인을 찍어 사회의 변방으로 내몬다. 부자 되세요(부자가 아님, 사람도 아니지요). 자기관리를 위해선 스펙이 필수지요(졸라, 평생 인턴만 뺑뺑이 치다가 그 모양 그 꼴로 죽으세요). 몸값을 올리세요(몸값?). 똥배가 부의 상징인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먹고 살기 힘들 때 일이지요(아직도 먹고사는 일에 종사하세요?) 등등.
이렇게 사회로부터 추방된 타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공동체를 찾아냈는데, 그곳이 바로 헤테로토피아다. 지구 밖이 아닌 지구 안쪽에, 도심 밖이 아닌 도심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 변방인 그곳(비정상성의 간섭에 의하지 않고, 정상성 자체의 모순과 한계에 의해 스스로 내파 하는 곳)은 버려진 곳, 폐허가 된 곳, 도심의 쇠락을 침묵으로써 증언해주고 있는 곳이다. 이를테면 재개발 건축현장의 빈 방(변두리로 쫓겨난 원주민들)이나, 버려진 공장지대(도산된 중소기업), 교각 밑 어스름한 곳과, 수변시설물 같은.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저마다의 발가벗은 몸을 전시한다. 이렇게 발가벗은 몸을 전시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한번도 발가벗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영혼과 처음으로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동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며(자신과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피폐해진 영혼을 냄새 맡는 커밍아웃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현듯 그곳에 들이닥칠 물신을 위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몸이 갖는 상품적 가치를 확인하고 전시하기 위한 것이다(피 얼마? 신장 얼마? 눈알 한개 얼마? 몸 포기각서 얼마? 그리고 주민등록증 얼마?).
그곳은 장소도 의심스럽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의심스럽다. 그곳도, 그 일도 친근하면서 낯선데 알만한 장소 탓에 친근하고, 비정상적인 상황 탓에 낯설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 소격효과를 시도한다. 누가 그들을 지목하고(알튀세는 제도가 개인을 호명할 때 정체성이 생성된다고 한다), 그들에게 비정상성의 낙인을 찍고, 그들을 타자로써 추방하는가? 작가는 자본주의 물신이 팽배해진 시대에, 천민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이 노골적인 시대에 있을 법한(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들,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소외와 모순의 계기들을 추슬러 한편의 장대한 드라마로 재구성하고 극화해 보여준다. 그 드라마의 색조는 전작(붉은 오염)에 흐르던 지옥의 묵시록만큼이나 암울하고 비극적이고 비장하고 장엄하다. 세계의 장엄한 종말? 노예는 정체성을 쟁취하고,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허위를 넘어설 수가 있을까? 작가의 전작도 그렇지만, 근작 역시 어설픈 답보다는 암울한(차라리 음울한)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전시제목김수연 - Hetorotopia
전시기간2010.04.29(목) - 2010.05.07(금)
참여작가
김수연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일요일
장르사진
관람료무료
장소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효령로72길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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