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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났다. 고야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 집안에서 보냈다. 1749년 무렵 고야의 가족은 사라고사에 집을 마련하였고 몇 년 후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후일 고야는 마드리드로 옮겨 당대의 유명한 궁정화가인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야는 스승과의 불화로 인해 졸업을 인정받지 못했다. 고야는 1763년과 1766년에 왕립 미술 학회에 입회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1771년 고야는 이탈리아로 여행하였고 파르마의 회화전에서 2등으로 수상하였다. 그해 말 고야는 사라고사로 돌아가 필라 성모 대성당 소속의 화가가 되었다. 그곳에서 고야는 프란시스코 베이유 이 수비아스와 함께 작업하였다. 고야의 뛰어난 색감은 얼마지나지 않아 유명해졌다.
1773년 7월 25일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하였다. 고야는 왕립 미술 학회의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엘 에스큐리알[주해 1]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스트리 제작에 참여하여 5년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였다.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1783년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측근이었던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고야는 많은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이 해에 고야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년1786년 카를로스 3세의 초상화를 그린 이래 고야는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789년에는 정식으로 궁정화가가 되었고 궁정화가로서 고야는 왕과 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가운데 1800년 작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유명하다.
1792년 콜레라에 걸린 고야는 고열로 인해 청각을 잃게 된다. 5년 뒤 회복에 이르기까지 고야는 깊은 상실감을 맛보았다. 이 기간 동안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에 이끌렸고 관련 철학책들을 탐독하였다. 1799년 고야는 에칭의 일종인 애쿼틴트 기법으로 제작한 판화집 《카프리초스》(스페인어: Caprichos, 변덕)를 발표하였다. 마카브르의 일종인 이 판화집은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어두운 분위기의 판화들로 채워진 이 판화집에 그는 “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같은 부재를 붙였다. 한편 1798년 고야는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기념하는 마드리드의 플로리다 성 안토니오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5월 3일의 처형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고야는 반도 전쟁에 관한 여러 기록화를 남겼다. 특히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의 사건을 그린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지지자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1810년에서 1820년까지 제작한 《전쟁의 재난》(스페인어: Los Desastres de la Guerra)은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과 비인도적 만행을 기록한 판화집이다. 1812년 고야의 아내 호세파가 사망하였다.
1814년 프랑스군이 물러가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하였으나 고야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고야는 가정부 도냐 레오카디나와 그녀의 사생아 로사리오 웨이스와 함께 살았다. 고야는 로사리오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녀는 고야의 딸이었으리라 짐작되고 있다. 만년의 고야는 《유스타와 루피나》와 같은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고야는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자 만사나레스 근처에 집을 한 채 구해 "퀸타 델 소르도"(스페인어: Quinta del Sordo, 귀머거리의 집)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여기서 검은 그림들을 제작하였다. 1828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