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은 3월 17일부터 5월 13일까지 1970년대 초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미술사조로 자리 잡은 ‘단색화(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그간 국내의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간헐적으로 열린 소규모 전시와는 그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사적인 전시라 하겠다. 일체의 구상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단색 추상화만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는 그 내용에 있어서 서구의 미니멀 아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로버트 라이먼, 애드 라인하르트 등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가 르네상스 이후 500년에 걸친 선형적(linear)인 전개 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도달한 ‘텅 빈 회화’를 보여주었다면, 한국의 단색화는 평면에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고유의 정신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60-80대에 이르는 전기 단색파 작가들은 자연을 다치지 않는 한국의 독특한 자연관을 바탕으로 자연과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정창섭의 닥(楮)을 소재로 한 풍부한 물성의 세계, 박서보의 수행(修行)으로서의 정련된 작품. 하종현의 배압법(背壓法)을 이용한 중성색 작품들, 40여 년간 신문지에 볼펜과 연필을 이용하여 새카맣게 칠하는 최병소의 검은 그림들, 고향에 두고 온 친구와 지인들을 생각하며 점을 찍어나간 김환기의 청색 점화(點畵) 시리즈, 서예에 기반을 둔 이우환의 <선에서> 연작, 평생을 수행하듯이 흰색 그림만을 그린 이동엽의 <사이> 연작들, 꼿꼿한 선비 정신이 스며있는 윤형근의 <엠버 블루> 등등 중용의 정신을 추구한 한국의 자연관이 이들의 작품 속에 잘 녹아있다.
1930년대 태생인 전기 단색화 작가들과 50-60년대 생인 후기 단색화 작가들 사이에는 뚜렷한 미감적 단절이 존재한다. 후기 단색파 작품에는 작가의 의식이나 취향, 감수성, 재료가 다른 데서 오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고산금이 사용하는 인조진주와 검정색 스테인레스판, 노상균의 반짝이(sequin), 문범의 우레탄 자동차 도료, 천광엽의 합성수지, 남춘모의 플렉시 글라스와 폴리에스터, 장승택의 레진(송진) 등등은 산업재라는 점에서 유성물감과 아크릴, 닥지, 석채, 철분 등 천연재료를 사용한 전기 단색화와 뚜렷이 구분된다. 이들의 깔끔하고 산뜻한 작품의 마무리는 전기 단색파 작가들의 미감과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면서, 성장 배경인 산업사회의 징후를 반영하고 있어 주목된다.
반복은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로버트 모리스나 도널드 저드와 같은 미국의 미니멀 작가들이 그리드(격자)에 기반을 둔 논리적 작업을 한 것과 달리 이들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정신적이며 초월적인 상태를 지향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세계이다. 또한 이들은 중도(neutrality)의 세계에 대한 관심뿐만이 아니라 자연에의 합일, 무한한 정신성의 창출, 물성에 대한 관심 등을 작품 속에 심화시켰다.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행하는 수공의 방법은 서구의 미니멀 작가들이 플렉시 글라스 등 다양한 산업 재료를 사용하거나, 작가는 아이디어의 제시에 그치고 정작 작품제작은 공장에 맡겼던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1) 행위의 반복:권영우, 이우환, 김기린,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정창섭, 하종현, 윤명로, 김장섭, 이인현, 이동엽, 허 황, 최병소, 이강소, 김춘수, 김태호, 박기원, 김택상, 문 범, 이배, 안정숙(이상 22명 무순)
2) 패턴의 반복:곽인식, 김환기, 최명영, 서승원, 천광엽, 고산금, 남춘모, 노상균, 장승택(이상 9명 무순) 단색화 작가들에게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촉각성’이다. 권영우의 화선지를 이용한 구멍 뚫기와 겹침의 기법, 손의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정창섭의 두꺼운 닥의 질감, 스프레이를 이용해 두꺼운 물감층을 형성하는 김기린의 검정색 그림들, 한국의 전통 기와지붕을 연상시키는 박서보의 두꺼운 수직적 골이랑, 캔버스의 뒷면에서 걸쭉하게 갠 유성 물감을 마대 사이로 밀어 넣은 하종현의 <접합> 연작들, 뜯어낸 물감 층의 사이에 새로운 물감을 집어넣어 두꺼운 살을 만드는 정상화의 작품들,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을 반복적으로 그어 마치 허물 벗은 뱀의 껍질처럼 물질 자체를 전성(展性)시키는 최병소의 작업, 되게 갠 검정색 안료를 사물의 표면 위에 덕지덕지 바르는 김장섭의 오브제 작업, 물감을 두껍게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다음 대패로 밀어 단면을 드러내는 김태호 등의 작업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의 단색화가 지닌 이러한 특징은 평면적이고 깔끔한 시각적 특징을 보이는 서구의 미니멀 회화가 지닌 시각중심적인 입장과는 크게 차별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몸’ 중심적이며 ‘촉감’ 중심적인 세계이다.
서구의 근대를 지배해 온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는 자아중심적이며 시각중심적인 사고의 소산이다. 주체와 객체, 마음과 몸을 대립적이며 이원론적으로 파악한 그것은 ‘나’라고 하는 주관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재단하며 지배한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시각중심주의는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몸의 물질성’을 빼앗는다.
반면에 촉감은 전통적으로 시각에 비해 천한 감각으로 간주돼 왔다. ‘코기토’의 입장에서 볼 때 촉각은 시각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늘 시각에 가려져 있었다. 그것이 부상하고 재평가되기에 이른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와서이다. 촉감은 여성적이며 대지적인 감각이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고수레’라는 것을 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외경심을 갖고 대지를 대하는 우주적 사고의 소산이다. 이러한 우주적 세계관은 서구의 손길이 닿기 이전의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도 있었다. 유럽의 침략자가 땅을 팔라는 제안을 했을 때, 한 인디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땅(大地)은 내게 어머니와 같다. 그대는 나더러 어머니를 팔라고 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의 단색화에 촉각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우연의 소치만은 아닐 것이다. 촉각은 신체적 접촉을 매개하는 감각이라는 점에서 ‘소유와 정복’을 촉발하는 시각과는 반대되는 감각이다. 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을 장악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이 항해술과 원근법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달해서 맨 처음 착수한 것은 보이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작명 행위는 그의 관심이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아니라 풍경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nominophiliac)’ 유럽인들의 취미는 소유와 동일한 의미이며 타자를 시각화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발견하는 것’이다.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하나의 풍경, 즉 자기의 표현술을 찾아간 도정은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70년대에 종언을 고한 것과는 달리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볼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운동인가, 아니면 하나의 개인적 양식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모더니즘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고 뒤를 이어 찾아온 포스트모더니즘마저 물 건너간 지금 흘러간 과거를 반추하는 철지난 노래에 불과한가?
[한국의 단색화]란 타이틀을 내건 이번 전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40년에 걸쳐 이룩한 ‘마음의 풍경’이다. 그것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박서보의 <묘법> 연작은 작가의 쉼 없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화면 전체를 균질적으로 보이게 한 작품이다. 이 무위자연의 행위는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작가가 작품과 합일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한다. <묘법> 연작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변모하였다. 1970년대 묘법은 채색된 캔버스 위에 연필로 드로잉을 함으로써 표면으로의 환원을 보여준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작업을 하는데, 물감으로 흠뻑 젖은 한지를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누르고, 상대적으로 밀려나간 한지의 연한 결들이 뭉쳐 선으로 돌출한다. 이처럼 창작과정에 정신성을 부여하고 꾸준한 자기연마를 예술로 승화시킨 박서보는 한국 단색화 고유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김춘수에게 청색은 특별하다. 흰 바탕 위에 눈이 시리도록 푸른 청색을 칠하는 그의 작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푸른색은 하늘, 구름, 바다 등을 떠올리게 하면서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여지를 제공한다. 바다 혹은 푸른색 저 너머의 세계를 암시하는 <울트라-마린> 시리즈나 무언의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녹아있는 <수상한 혀> 연작에는 이데아를 향한 작가의 태도가 투영되어 있다. 수직으로 긋거나 점을 찍거나 혹은 짧게 끊는터치와 같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점차 높아지는 밀도의 형광빛 푸른 세계는 생명의 원시적 에너지를 닮아 보고자 하는 이상향의 세계로 수렴되는 듯하다.
"인간은, 미술은 그 이름을 걸고 예전부터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이야기의 질서, 의미의 기승전결, 재현의 다양한 결과 등을 흠모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는, 사물들은 미술이 집요하게 던지는 판단과 분류의 촘촘한 그물 사이로 항상 매혹적으로 빠져나간다. 이러한 절망과 그때마다 나타나는 유혹들이 나와 현대미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나의 미술은 오래 전부터 전혀 관계없는 다수의 공간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거나 죽어서 떠도는 영혼들의 날갯짓, 혹은 그 그림자들, 그것의 주름진 교차의 음계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예찬, 절절한 그리움 같은 망설임의 징후들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바닷물이 끊임없이 밀려와 만들어내는 물거품의 유리알만큼이나 눈부신 무질서들 속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그리고 또 그것은 어떤 질서와 같이 출발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소용이 없다. 나는 그곳에 도달하지를 못한다." -
문범작가의 글 중에서
안정숙은 인간관계의 갈등,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나는 대립과 충돌의 긴장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는다. 수많은 인간관계의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는 갈등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데, 작가는 이것을 극복하여 공통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어떤 합일점을 찾고자 한다. 직선적인 사고방식의 문화가 있다면, 곡선적인 사고방식의 문화도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두 요소의 조화로운 만남과 자연스러운 관계로 평화롭게 화합시키는 것이 작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곡선은 정적인 캔버스 위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여 보이기도 하나 동시에 유기적인 관계로 서로를 지탱해주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유기적인 결합은 안으로는 마음의 평정을, 밖으로는 견고한 평화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우환의 작업세계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과 차별화되는 우리 고유의 동양정신을 구현하는 것으로, 동양 최초의 자생적인 현대미술 운동인 모노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모노하 시기와 국제적 실험미술의 과정을 거쳐 1970년대 중반 무렵 한국의 단색화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조응> 연작은 점과 선을 동양적인 기와 생명력의 근본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구현된 작업이다. 질서와 균형이 담겨 있는 점의 집합 상태나 선의 나열을 통해 시공간 속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동시에 화면에 움직임과 운율을 더한다. 궁극적으로 이우환이 추구하는 것은 조형적 결과물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선을 긋는 제작 과정에 내재된 본질적 의미의 발견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세계와 사물, 인간 간의 관계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상화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단색의 평면 회화인 <무제> 연작을 작업해오고 있다. 화면 전체는 바둑판 모양의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네모꼴로 구성되어 있는데, 네모꼴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가 아크릴 물감으로 다시 메워 가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래서 작품의 주요 제작 방식은 뜯어내기와 메우기이다. 이 같은 반복 행위에 의해 작가는 동양적 정신성으로의 접근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즉 그의 작품은 결과물로서의 작품 이전에 제작과정 그 자체가 곧 작품이다. 물질로서가 아닌 정서로서 물감의 스며듦을 보여주고, 명상의 세계로 이끌고자 함이다.
김태호의 작품은 선과 면의 반복패턴으로 덮인 단색의 표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첫 눈에 보이는 하나의 색면 밑에는 중첩을 거듭한 여러 겹의 색층이 존재한다. 작가는 무수한 안료의 겹으로 이루어진 층을 만들고 난 후, 이것을 날카로운 칼로 다시 도려내는 과정을 반복하여 작품을 완성한다. 반복적으로 흐르는 무수한 선과 면, 그리고 그 사이로 깎여진 다색의 편린들은 화면의 긴장감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생성과 소멸의 이중적 구조를 드러낸다. 지층변화와도 같은 색층의 틈새는 마치 스스로를 비우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현존성을 확보하려는 듯하다.
김기린의 색은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한 요소로 사용된다.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본질로 돌아간 화면의 색채는 그 순도 자체로 감각적인 요소를 만들고, 반복적으로 두텁게 축적된 깊이는 명상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화면 안에 형상이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사각형에서 그 어떤 공허함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부재를 통해 늘 보이지 않았던 우리 주변에 현존하는 그 무엇을 더욱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
윤형근의 작품은 네모난 색면 속에 대담함과 단정함이 함축된 숭고미를 보여준다. 일회로 완결되지 않고 몇 차례 겹쳐지는 선들의 어울림에 의해 완성된 화면은 서로 스미고 배어나오면서 깊이와 평온을 더한다. 그는 생지의 캔버스 위에 직접 물감을 바르는데, 이는 천연 마포의 색을 그대로 살리고, 그 질감에 예민하게 침투하는 물감의 농담을 이용한 번짐 효과를 위함이다. 이렇게 그려진 청색과 다색(황갈색)의 사각형으로 구성된 캔버스는 색면과 여백, 유한과 무한, 충만함과 허함이 동화된 자연의 음양 이치를 담아낸다.
이동엽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백색의 단색화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흰색은 자연이 환원된 색이며, 그로 인한 화면은 의식의 여백이자 사고를 담는 그릇이다. 1980년대부터 그는 <사이> 연작을 제작했다. 동양화를 그릴 때 쓰는 넓은 평붓을 사용하여 흰색 바탕 위에 또 다시 흰색 선을 정교하게 닦아 나가듯이 붓질을 반복한다. 이와 같은 행위와 행위의 무수한 중첩에서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겹침과 스며듦이 곧 작품이 된다. 이렇게 작가는 정신성의 구현을 위해 물질감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붓의 필세와 물감의 양을 줄이면서 구도하듯이 무수한 붓질을 반복한다.
하종현은 올이 굵고 성긴 마포의 물질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마포의 뒷면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이 물감을 천의 앞면으로 밀어 넣는 독창적인 방식인 배압법(背押法)을 구현한다. 이렇게 해서 올 사이로 나온 물감을 다시 도구나 손을 사용하여 재구성한다. 기존의 회화적 관습을 버리고 제작한 <접합> 연작에서 눈 여겨 볼 부분이 바로 캔버스 표면에 알알이 맺힌 물감 알갱이들이라 할 수 있다. 물감을 밀어내는 힘의 차이로 만들어진 우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얼룩 그리고 작가의 개입이 남긴 캔버스 표면의 흔적들은 그 자체로 독특한 미감을 전해준다.
전시제목한국의 단색화展
전시기간2012.03.17(토) - 2012.05.13(일)
참여작가
곽인식, 권영우, 김기린, 김장섭, 김환기, 박서보, 서승원, 윤명로, 윤형근, 이동엽,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최명영, 하종현, 허황, 고산금, 김춘수, 김택상, 노상균, 남춘모, 문범, 박기원, 이강소, 이인현, 장승택, 안정숙, 김태호
초대일시2012-03-16 17pm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월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장소국립현대미술관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경기 과천시 광명로 313 과천관)
연락처02-2188-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