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지혜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Ⅰ. 얇은 순지에 드로잉을 한 뒤 향불로 무수한 구멍을 내 화면을 형성하는 것이 이길우의 독자적인 회화적 기법이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은 두 장 혹은 세 장이 겹쳐져 한 점의 완전한 작품이 된다. 이길우는 아직 삼 배접 이상은 성공해 본 적이 없다고 나와의 대담에서 말했다. 너무 많이 겹쳐지게 되면 종이의 특성상 원하는 이미지나 색채의 효과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길우의 작업은 화선지 위에 먹이나 채색 재료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고도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수묵화나 채색화가 한지의 물성적 특성을 이용하여 선염의 효과를 드러내는 것과는 달리, 이길우의 작품은 그러한 특성은 잘 드러나 있지 않으나, 이중 혹은 삼중 이미지라는 특수 효과를 낳고 있다. 영화의 몽타주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기법은 기존의 한국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이길우의 몽타주 기법은 한 화면에서 여러 중복된 이미지를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필요에 의해서 창안된 것이다. 원래 어느 화창한 가을날 뜰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의 무수한 잎사귀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시작한 이 독자적인 기법은 지난 몇 년 간 여러 발표회를 통해 이길우를 개성이 강한 문제 작가로 부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한국화에서 새로운 기법의 개발이라는 과제와 맞물려 그를 일약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의 진면목은 최근 유행이 되고 있는 팝아트와 관련시켜 볼 때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는 형식과 내용 그리고 재료 및 기법의 실험이라는, 현대미술 작가라면 의당 지녀야 하는 덕목에 충실하고 있으며, 그 노력에 상응하는 화단의 반응을 얻고 있다.
Ⅱ. 총 17점의 신작을 선보이게 될 이번 개인전의 타이틀을 이길우는 ‘무희자연’이라고 붙였다. 이른바 노장사상의 요체인 ‘무위자연’이 아니라 ‘춤추며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연유로 그의 이번 신작들은 노장사상을 패러디한 ‘무희자연’이란 주제에 걸맞게 춤을 추는 장면이 유독 많다. 겸재 정선의 산수화 등의 고전을 배경으로 배우, 모델, 피카소 등의 얼굴이 중첩되거나 혹은 마이클 잭슨과 같은 대중 스타가 춤을 추는 모습이거나 버락 오바마의 서 있는 모습을 오버 랩시킨 작품들은 이 주제를 잘 구현한 것이다.
이번 신작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이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색채에 관한 것이다. 나와의 대담에서 그는 한 여름 낮에 멀리 보이는 초록의 숲을 바라볼 때 느꼈던 시각적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름의 신록이 언뜻 보기에는 진초록 일색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색의 뉘앙스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이번 작품을 통해 표현해 보고 싶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였다. 작가의 의도처럼 녹색계열의 이번 출품작들에는 그런 색의 미묘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것은 마치 인쇄된 사진이 녹색 일색으로 보이지만 망점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색의 삼원색의 미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향불로 태운 무수한 점(dot)으로 구성된 이길우의 그림들 역시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용을 소재로 한 그의 이번 신작들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난색조와 차가운 느낌을 주는 한색조의 대비로 이루어진 것이 많은데, 주황과 녹색이 주조색으로 사용되고 있고, 엄버(umber) 계열의 색상이 중간색으로 등장하고 있다.
Ⅲ. 나와 나눈 대담 중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이른바 작품의 모티브에 관한 것이다. 실상 작품 제작에 있어서 모티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물론 주제도 중요하나 무엇이 구체적으로 작품을 이끄느냐 하는 동기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인간의 행위에 더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 장면을 볼 때 혹은 고전이나 현대무용을 볼 때, 인간의 신체가 주는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번 신작에 등장하는, 무희의 신체를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해서 배열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러한 패턴의 등장은 기존의 <동문서답> 연작에도 시도된 바 있으나, 이번에 더욱 적극적으로 표명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일우의 작품 세계에서 자연이 완전히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작품의 배경에 흐르는 주조음(主調音)으로 깔고 그 위에 인물을 배치, 마치 자연 속을 거니는 인간, 혹은 자연의 품에 안겨 춤을 추는 듯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노장의 ‘무위자연’과 그가 주제로 내건 ‘무희자연’의 상관관계가 바로 여기에 있거니와, 그것은 단순히 노장의 사상을 ‘패러디’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상을 동양미학의 관점에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앞서 열린 개인전의 서문에서도 쓴 바 있듯이, 나는 이길우 작업의 두드러진 특징을 ‘수행(performance)'에서 찾는다. 그는 현란한 양상을 보이는 이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 보기 드물게 ’수공(手工)‘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아날로그형’ 작가다. 무수히 반복되는 점의 배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치 인쇄된 사진의 망점을 연상시키는 점들의 조합은 그의 작업이 매우 더디고 느리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깜빡이는 동작을 반복하는 디지털 신호를 닮았다. 향불로 순지를 태우는 동작과 동작의 사이사이에 작가는 숱한 상념의 숲을 거닐게 되는 것이다.
‘느림’은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 곧 사유의 시간을 준다. 이는 ‘빠름’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문명이 효율성을 구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다. 이일우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느림의 가치를 일깨워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 ‘수행’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제목로널드씨의 유람기
전시기간2007.05.22(화) - 2007.06.10(일)
참여작가
이길우
초대일시2007-05-22 17pm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월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관람료무료
장소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Gallery Sun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 )
연락처02-720-5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