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은정 (미술평론가)
영국의 신학자이며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토마스 모어는 선원 히스로디에게 그들이 사는 세상과는 조금 다른 풍속과 제도를 가진 섬 이야기를 정리하는 형식으로 글을 남겼다. 그 섬은 정치와 종교가 이상적인 유토피아였다. 진나라 문인으로서 상급기관에 굽신거려야 함을 깨닫고는 관리를 그만두고 초야에 묻힌 도연명은 어느 날 무릉의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복숭아꽃 만발한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
하게 사는 사람들을 본 이야기에 대해 기록하였다. 그곳은 신선이나 노닐만한 아름다운 자연 지역 무릉도원이었다. 허균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배에 태우고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갔다고 하였고, 올드 헉슬리는 자유롭고 탐욕에 물들지 않은 팔라인들이 사는 평화로운 섬<아일랜드>에 대해 썼다. 배를 타거나 난파되거나 샹그릴라처럼 길을 잃어야 이를 수 있는 이곳들을 우리는 이상향(理想鄕)이라 부른다.
만하임은 통일적 세계상의 붕괴 이후 수많은 세계상을 발견하게 되었고, 전통적으로 그렇다고 생각되던 모든 것들에 대한 회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어떤 사물에 대한 기능이나 해석이 여러 갈래로 이루어질 수 있음은 곧 종교라는 지배적 금기의 힘이 와해된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기토(Cogito)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인지하기 위한 인식이다. 고유한 세계관에 맞는 의미해명이 가능한 시대를 사
는 지금, 이상향은 바로 코기토의 실천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체험과 가치에 의해 구조화되는 이상향은 구체성을 지니기 어렵다. 내부의 갈등을 조정하는 공간은 흔들리는 가치관과 자기발견의 욕구와 사물과 상호관계가 모호한 때문이다.
1956년에 러시아 우주항공국은 공기가 없는 달나라에 지하기지를 건설하는 드로잉을 공개하였는데, 그 도시의 모습은 돔이 투명창으로 변환된 것일 뿐 로마시대 이후 지속된 장소들의 특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장소를 만들 때조차 인간은 알고있는 것을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탓일 게다. 조심스럽게 내면의 흔들림에 대해 그리고 의식의 흐름에 대해 집중하던 작가 장현주의 화면에서 행성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작가는 화성을 선택한 이유가 전쟁도 없고 사랑만이 가득한 이상향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강이나 바다를 건너 위치해오던 이상향이 작가에게는 우주의 바다를 건너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상향을 장소의 떠낢을 통해서야만 이를 수 있다는 인류학적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아는 것만큼, 생각하는 것만큼의 이상향을 구사하는 당위성을 얻는다.
인간의 경험이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확인되듯, 한 개인의 이상향에는 집단의 생각들이 공존한다. 단지 ‘별’이었던 행성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그 머나먼 곳에서 전송된 사진들 속에서 이미지를 찾아 또 다른 공간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1970년대 말 화성사진이 공개되자 지나친 확대로 인하여 픽셀에 깨짐 현상이 나타난 그 사진들을 보고 피라미드와 펜타곤과 스타디움을 찾아냈다. 과학자들이
지구의 미래를 건설한 장소로서 탐사한 행성에서, 지구의 과거를 보는 이들은 그룹을 형성하고 믿음을 공유하며 지식을 나눈다. 그 메마른 땅에서 이상향을 만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이 발동한 탓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그의 이상향은 ‘또 다른 지역’ 혹은 장소로 명명된다. 이상향이라는 장소성보다는 그곳에 의미를 두거나 이상향을 만들어가는 주체성을 중시하는 명제라 할 것이다. 이곳을 전제로 한 그곳의 장소성은 원형을 기반으로 한 도상을 지닌 형태의 상징으로 구성된다. 원색과 흑백으로 제작한
는 동일 지역의 낮과 밤으로 보이기도 하고 외연과 내부, 형식과 내용과 같은 이분법으로 보이기도 하고, 시적 언어인 대구법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이 두 화면은 분명 작가가 구성하는 세계의 구현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원색의 곳곳에서 훑어가는 눈길이 내려지는 것은 익숙한 형태들이 끊임없이 상호지시하고 은유하며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우주를 뒤로 하고 작은 산들이 둘러싼 행성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단 중앙에 자리한 배를 젓는 인물이다. 대지와 물의 이미지가 그곳에 위치한 인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역시 하단 우측에는 그림자를 잡아먹는 새가 그리고 좌측에는 돌들이 강하게 시선을 끈다.
현란하고 비현실적 색채 속에서 흑백의 형태들은 화면 전체에 무게감을 주고 있다. 이들 형태 위로는 두 인물이 화면의 무게를 둘로 나누어주고 있는데, 지나치게 화사한 주황색 화관을 쓰고 가슴에 붉은 십자가를 띠고 있는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를 안고 있는 흑백의 성모상이다.
사차원으로 가는 문이 있고, 통곡하는 사람들과 망연히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그리고 계단과 건물, 연못과 폭포, 의자와 종이배 등 해석 가능한 익숙한 형태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모호하며 무의식에 지배된 여러 형태들이 떠오르는 단순나열을 보여준다. 기억의 저장소에서 돌출되어 튀어나온 형상들 즉 손이 기억하는 형상들인 자동차, 안락의자 등 일상생활의 모습들이 작품 안에서 필요한 것들이 있는 이상향의 구현 요소로 작동한다. 하지만 화면 전체를 감싼 불길하면서도 무언가 불편한 감을 주는 요소들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더욱 지구와는 이질적인 색채에 의해 현상이 아닌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통곡의 장소인 게세마네 동산이 화성의 형태를 빌어 작가 앞에 이상향으로 펼쳐진 것이다. 죽음을 부르는 듯하고 기분 나쁜 머리가 잘린 동물 모양이나 좌절한 인간의 뒷모습은 지옥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될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향이라는 곳,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디스토피아로 비춰진 것도 총통과는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야만인에 빙의한 우리 시선 때문이 아닌가. 악이 있어야 선이 빛난다는 중세의 관념처럼 작가의 화면은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통곡과 희열이 공존한다.
흑백의 에서 형태는 어두운 우주를 배경으로 한 야트막한 산 아래 광할한 대지에 흩뿌려져 있다. 호주국립대의 사이먼 드라이버 박사에 따르면 우주에 있는 별들의 수는 7000억의 1000억 배라고 한다. 지구에 있는 모든 모래를 합한 수보다 10배나 많다는 것이다. 육안으로는 밤하늘에서 2000개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별들이 실은 셀 수 없는 엄청난 수가 있는 것처럼, 이세상은 수많은 존재가 있고 그 존재는 또 다른 수많은 존재를 포함한다. 화성이라는 실재하면서도 이르러 보지 못한 그 가상의 공간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작품을 일러 “화성과 유사한 돌산과 사막의 풍경 속에서 화성이 감추고 있는 기타 생명체와 문명의 흔적들을 엑스레이로 투과하듯, 드러내놓고 노출시킨 드로잉”이라 한다. 지구인이 추측하는 화성의 모습이기도하고, 화성인이 추측하기도 하는 지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보여지는 것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있을 수 있으며, 우리가 내뱉는 말 중에는 얼마나 표면화되지 못한 의미들이 많을까. 그리하여 그의 야심찬 위 두 작품은 작가 내면의 지형도이다. 항상 나는 누구일까를 추구하는 존재론적인 인식과, 인류학적 입장에서 인간을 추적하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말수가 적고 무던한 사람이 세상과 만나는 지점에서 종종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외형이나 드러나는 사실로만 판단하는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자신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할 수밖에 없을 때 느끼는 무력감이 고독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것이다.
화성이라는, 현실감각이 뛰어난 인물에게는 황당하기만 한 공간을 작가는 ‘몽유도원도를 그리듯’ 이상향으로 펼쳐놓고 있다. 강을 건너거나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다 만나게 되는 이상향처럼 그는 우리의 현실계인 지구가 아닌 행성으로 이상향을 옮겨놓음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확장된 과거의 이상향과 조우한다. 광속으로 날아가 도착한 행성에서 지구의 문화사적 흔적들을 설치함으로써 돌 하나를 보고도 생각만으로 건물이 되게 한다. 실재하는 유적과 자신의 상상을 결합시킴으로써 작가 스스로 공간을 창조하는 인물인 동시에 기존의 의식에 지배받는 인물임을 또한 인정하고 있다.
작가에게 는 먼 화성에 뿌려놓은 지구상의 기억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지금의 주변이 다르게 작동하는 시간의 엇갈림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시계를 들고 뛰어가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흰토끼를 생경한 장소에 놓음으로써 하면 속 공간은 시간의 거리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주제로 보이는 에서도 흰 토끼를 만날 수 있다. 손을 내민 토끼는 공간과 시간의 뒤섞임 속에서 “다 괜찮아, 이리 와.”라는 위로를 보낸다. 죽죽 그어진 비현실적 색채 위에 얹힌 토끼는 ‘real'이라는 문자를 데리고 있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토끼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영원히 친근한 어린시절의 털실인형처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영원한 친구이자 자신의 모습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토끼로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외에 인간의 형상을 한 시리즈는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직접적 물음을 담고 있다. 인체 해부도에서 빌어온 인간 몸통 내부에는 위장, 대장 등 장기가 담겨 있기도 하고 그릇들이 담겨 있기도 하며 색채로 가득하기도 하다.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인체의 조직들은 인간의 신체를 우주화한다.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 지구는 화성과 같은 우주의 모래 한 알의 존재임을 소우주, 인간의 몸을 통해 사유하는 것이다.
이제는 용도폐기된 인체 내부에 한때는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었던 움직이는 장난감의 부속들을 채워넣음으로써 필요를 상실한 것들에게 새로움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은 이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발원한다. 결코 물신주의는 아니나 작은 장난감 부속들이 얼마나 귀중하게 다루어졌는지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모두가 경험한 것일 터, 작은 것들조차 사랑으로 감싸는 애정의 작업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망가지거나 쓸모가 없어진 장난감에 대한 사랑은 다름아닌 자신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여인에게 있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내가 또 하나의 우주임을 실감하는 일이며 새로 태어난 소우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넘침을 깨닫는 순간 나를 창조한 그 어떤 존재의 사랑의 깊이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모 도상이 나타나고 힌두교의 우주론이 펼쳐지지만 그 어느 곳에도 정박하지 않는 그의 화면은 그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탐구의 여정에 대한 담담한 기록이다.
그의 화면에는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말이나 정체를 의미하는 모자이크 처리된 말풍선을 지닌 비너스와 두루마리 휴지와 서커스 천막과 관절인형들이 한 화면에 크기의 기준 없이 흩어져 있다. 이들은 상관관계 아래 이해해야 하는 나레이션의 구조에 속한 단어가 아닌음소로서 개개의 형태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각각의 존재는 개별자의 모습을 띠지만 관객에게는 통합되어 한 화면의 구조로 나타난다. 화면 내부에 원근법과는 거리가 없지만 내용의 깊이가 실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적 출발이 동양화에 있기에 가능한 시각이다. 새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각처럼 그림의 표면 렌즈를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 렌즈는 진실의 위치에서 컴퓨터 합성이미지가 넘치는 가상의 세상에서 왜곡된 형태이지만 손으로 그려짐으로써 사물이 뒤섞인 진짜 세계를 보여준다. 이상향 혹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노력의 과정으로 그의 작업이 존재하는 지점이 바로 이 ‘그려짐’이다.
그는 화면에 목탄으로 형태를 그리고 그 위에 바니쉬를 뿌려서 흘러내리게 한다. 의도적인 형상에 우연이란 효과가 작용하는데 거기에는 시간의 요소가 중요하다. 이른바 타이밍에 따라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선염이나 번짐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드로잉으로 보이는 그의 화면은 전통 동양화와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표피성을 통해 깊이를 창출하는 방식은 전통에서 온 것이다. 쌓아올려진 이미지가 아니라 스며들고 지워짐으로써 나타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시감을-물감을 쌓아 이룩한 화면에서 볼 수 없는 자재하고 영화로운 화면 구성은 바로 이러한 동양화적 구조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반영이 아닌 진실의 창으로 존재하는 화면은 마음 속 세상을 쏟아내는 배설과도 같은 본능적 즐거움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기의 즐거움은 입체에서도 재생되고 있다. 일고 있는 거의 색채와 문양이 동원된 인체는 그러한 감정을 확인시킨다. 색동, 물방울무늬, 모자이크 무늬의 인간 형상들이 화성이라 여겨지는 이상한 공간에 위치한다. 이들 인간의 형상 100여 개는 그의 화면에 일관되게 나타난 익명의 인간 모습 그대로이다. 다양한 무늬들은 일기를 쓰듯 일상의 감정이 시각화한 것이다. 곧 인물 하나하나는 하나의 인간 100인이 모여 있는 것이기도 하고, 100개의 감정을 가진 한 인간이 소우주에 위치한 것이기도 하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고 여러 감정이 모여 순간이 되기도 하는 인간에 대해 가시화한 것이다.
그의 화면은 주체적 시각, 코기토를 기본으로 한다. 영상작업은 내부에 다면체의 거울을 두고 반짝이는 물질을 넣어 보는 만화경(kaleidoscope)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만화경 내부에서의 이미지 조합이 무한하듯, 인간은 모두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인간은 같은 공간 안에서 대화를 하는 중에도 각기 무수한 생각의 골로 빠져든다. 그 생각의 출구는 결코 동일할 수도 없으며 이르는 곳은 더욱 그렇다. 에는 2차원에 존재하는 3차원의 문을 설치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의 세계를 묘사해놓았다. 그는 이 주관적 환상을 예술이라는 문을 통해 객관화시키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금기가 허용되는 이상향은 입장에 따라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되는 것처럼 주관성의 공간이다. 현실의 반전은 언어 속의 이상향에도, 만화경 속의 환상 속에도 존재한다. 현실이 갑갑하면할수록 의식은 우주를 떠돌고 조합되는 유리조각이 조잡해질수록 만화경 속 이미지는 현란해진다. 작가에게 있어 진보, 발전,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상향은 은일(隱逸)의 산속도, 무인도처럼 보이는 섬도 아니다. 우주선에 몸을 싣고 광속을 타고 이르는 곳, 우주 저먼 곳에 위치한 지구라는 섬의 거울같은 공간 화성에서 보는 환상이다. 신이 창조한 세상에 대한 외경심을 유지한 채, 하지만 내가 보는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믿음으로 그는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이상향을 만화경 속 반짝이 틈에서도 컵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에서도 발견한다. 전시제목장현주의 프랙티컬 판타지 Practical Fantasy
전시기간2011.11.10(목) - 2011.11.24(목)
참여작가
장현주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월요일
장르회화와 조각
장소포스코미술관 POSCO ART MUSEUM (서울 강남구 대치4동 892번지 포스코센터 서관 2층)
연락처02-3457-1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