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관- 빛의 편애로 드러난 대竹의 살
최병관의 대나무를 찍은 사진을 보았다. 일몰의 시간, 사방이 사위어가는 시간, 작가의 집 베란다 창으로는 앞산이 멀미를 동반하면서 들어차 있는 곳에서 짙은 어둠 속에 홀연히 몸을 드러내는 대나무 사진을 하나씩 불러들여 바라 보았다. 심연 같고 절망 같은, 너무 깊어 마냥 시선이 투항하는 배경을 지고 길고 가는 대나무의 몸들이 환각처럼 다가온다. 명멸하듯, 드러나고 지우고 사라지고 환생하듯 말이다. 하나, 둘, 셋, 넷..이렇게 대나무를 세고 있다. 대숲에서 조금씩 뒤척이는 대나무 중 어느 한 몸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 피부에 밀착했다. 속이 빈 껍질들이 일정한 마디를 상처처럼 드러내며 직립해있다. 대지에서 허공으로 일직선상의 생애를 갈망하던 대들의 삶의 고단함과 씩씩함이 생의 매듭같고 살아온 시간의 한 단락 같은 마디에 응축된 모양을 경이롭게 본다. 작가는 말하기를 대숲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척이나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단다. 문득 언젠가 일본 교토와 나라에 가서 오래된 사찰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절 뒤편에 있는 대나무 숲을 가 본 기억이 났다. 오래 전 담양에 위치한 소쇄원을 다녀올 때 주변 대나무 숲의 아름다움도 환영처럼 부풀어오른다. 직립한 커다란 대나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바람을 맞고 서있는 모습, 그리고 끊이지 않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바람소리, 댓잎스치는 소리에 마냥 황홀해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상에 저당잡혀있는 자기 생을 치고 올라가 허공에서 흔들림을 기꺼이 견디는 삶! 산 자들은 그렇게 한 번씩 대숲에 몰려가 저런 대의 생을 바라보며 자기 생을 반추하고 살아있다는 것의,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마주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세간의 모든 소음을 씻어주는 소리로 귀를 채우며 대숲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기 내면의 초상일 것이다.
작가는 어둑한 대숲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순간 빛이 들어와 그 몸들을 은밀하게 애무하는 자리에 멈췄다. 어느 특정한 대의 몸에 초점을 맞추고 그 표면에 집중한 것이다. 어떠한 사진적 조작이나 보정 없이 그대로 찍었다. 나머지 대들은 순간 어둠 속에 묻히고 빛을 받은 대나무의 부분들만이 선을 긋는다. 대와 대 사이, 어둠과 밝음 사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 선과 면 사이, 깊이와 표면 사이가 만드는 현묘한 차이들이 형을 만들고 선을 긋고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유영하게 한다. 그것은 정적과 절제와 단순함이 빚어내는 미학이다. 이 사진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 그런데 그 보여주지 않음이 오히려 상상을 자극하고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은밀히 발화한다. 사실 비가시적 공간인 사진 안에서면 얬두운 부분들 역시 많은 대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오로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대면 사만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이 작업은 대나무를 소재로 해서 찍었지만 사실은 과 면 사를 기록한 사진이다. 대나무에 들러붙은 문화적 상징이나 의미론적 기호를 조금은 덜어버리고 자연이 만든 기하학적인 선들이 어둠을 분할하고 있는 그런 장면을 관조하고 있다. 정적만이 가득찬 대숲에 빛이 대나무 피부를 햩아대는 순간을 은밀하게 저장한 것이다. 이 관음증적인 사진은 나무와 빛, 땅에 박힌 식물과 우주에서 날아온 은혜가 조우한 ‘역사적 순간’을 목도한 것 면증언인 셈이다. 그는 대숲의 내부로 들어가 마음껏 대를 사하고 있는 과 면자리를 기록했다. 빛은 어느 사물의 피부에서 온전히 밝혀진다. 그로인해 우리는 그 사물의 살을 좀더 자세히 보게 되고 알게 된다. 아니 살, 디테일 그 자체로 존재를 만난다. 납작한 인화지에는 그 과 면 사의 정도가 남긴 차이가 명쁔의 미묘한 톤과 대면 형태와 대나무의 존재를‘겨우’만들톤과보인 흔적이 묻어있다. 대나무 마다의 생김새와 피부의 질감과 색상, 그리고 댓잎 등이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이 사진에서는 그런 세부적인 차이가 중점적으로 기록되기 보다는 대나무에 가닿은 과 면정도가 만들어내는 깊이감과 미세한 흑백톤의 감각적 분별이 퍽이나 까따롭게 기술된다. 그러니까 대나무 표면을 때린 빛에 의해 화면을 분할하는 선들, 빛을 받은 차이에 따라 만들어지는 공간감, 저마다 다른 회색톤의 계조가 미니멀하고 금욕적으로 보이는 화면을 교란한다.
정사각형 내지는 파노라마 구도에 의해 대숲은 절취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화면 안으로 들어가는 시선이다. 그것은 실세계에 가설되는 순간 또 다른 세계로 이행하게 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사물의 기계적 재현이기 보다는 ‘상상하기’라고 해야 더 어울리는 편이다. 정신적인 활력을 자극해 실세계를 지각하고 화면 너머의 세계로 몸과 정신을 유인해주던 산수화가 연상되는 그런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은 두루마리와 유사한데 두루마리는 그리기와 보기 두 측면에서 시간과 장소가 변하는 움직이는 그런 그림이다. 시점의 이동을 보여주는 동양화는 공간의 깊이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데 동양화에서 공간이란 어떤 경우에도 측정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산수화는 측량할 수 없는 자연의 장대함을 암시하는 매개체다. 그 결과 산수화의 공간은 대단히 포괄적인 우주의 가시적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화면의 구성은 필연적으로 길어지기 마련이다. 시점이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동할만한 넓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화면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으로 향하여 점차로 전개하는 두루마리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두루마리는 사적인 매체의 극단적인 형식인데 단 한 사람의 관람자 만이 그림이 움직임을 조작하고, 읽는 장면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는 오른쪽에서 왼쪽방향으로, 한번에 팔 길이만큼 펴놓고 읽는/본다. 그것은 끝없는 다양함을 연상시켜준다. 최병관 사진에서 대숲풍경은 자주 파노라마(두루마리) 구도 아래 들어와있다. 대나무는 전체를 보여주지 않고 가운데 부분만을 드러낸다. 옆으로 늘어선 대나무들의 도열은 시간의 진행, 그에 따른 빛의 이동을 읽게/보게 해주고 동시에 대숲이란 자연공간의 무한한 공간감을 또한 접촉시킨다.
어둠을 배경으로 대나무들은 환각적으로, 찰나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보여지기 보다는 일부는 가려지고 나머지는 여백 같은, 텅 빈 화면처럼 짙음 안에 잠겨있다. 보는 이들은 온전하게, 전일적인 시선으로 사진을 바라볼 수는 없다. 많은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적게 보여주고 다 보여주기 보다는 일부분만 보여주는 편이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여백은, 운무나 안개 자욱한 풍경 역시 일부분만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나머지는 상상하게 한다.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하는 것이 그 대상을 좀 더 잘 보게 하는 일이다. 꿈꾸게 하고 한억하게 하고 회상과 여운 속에서 사물과 대상을 추려내게 하는 것이다. 망막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시욕망을 누그려 뜨리고 망막 이외에 몸이 지닌 다양한 감각기관과 정신적 활력을 통해 상상하고 지각하게 하며 따라서 그림을 보는 관자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비로소 그림은 머리 속에서 완성된다. 산수화를 보면서 실재하는 자연을 소요하는 체험(정신적 활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최병관의 대나무 사진 역시 그런 맥락에 무척이나 근접해 있다는 생각이다.
■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전시제목Bamboo , 竹 , 대나무
전시기간2010.01.28(목) - 2010.02.06(토)
참여작가
최병관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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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료무료
장소박영덕화랑 Galerie Bhak (서울 강남구 청담동 81-11 갤러리빌딩 B2,4층)
연락처02-544-8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