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옥생(한원미술관 큐레이터, 미술평론)
1. 꿈을 꾸는 언어
현대 화가들에게 있어 재료는 곧 표현의 언어이자 내용이 된다. 이러한 재료들은 실험적으로 선택되어 시각적 독창성을 추구하거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작가의 내재된 세계의 가시화를 위한 방법적 모색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골판지에 이미지를 입히는 구인성 작가 또한 재료와 재료를 다루는 행위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 구인성은 동양화에서 출발한 스며듦과 표현의 경계를 골판지의 화면과 파여진 골의 규칙성을 이미지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움직임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오려내기 전에 올려 진 화면은 골판지의 골을 따라 잘려나가고, 잘려진 화면은 다시 정교한 터치로 눌러져 2차 그림으로 완성된다. 곧 2개의 그림이 중첩됨으로써 하나의 화면은 고정되었으나 작가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2차 화면은 터치 터치의 조합으로 인하여 움직임에 의해서만 그 윤곽을 확인할 수 있는 트릭을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동양화의 재료적 경계를 확장시키고 포장재로 쓰이는 골판지의 자르고 찍어내는 행위들은 움직이는 영상을 닮은 미디어의 본성을 닮았다. 즉, 작가의 작품은 순간성이 아닌 미디어아트의 영역과 같은 시간성을 드러내며 회화의 시각적 환영(Illusion)을 조각과 설치의 선험적이고 실재적인 공간성으로 변환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의 화면을 감상하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감상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 작업들에서 규칙적인 점묘를 연속적으로 찍어내는 화면을 연출하고 있거나 교통 표지판과 같은 특정 기호를 화면으로 적극 끌어 들이는 것은 근작들의 골판지와의 논리적인 연결선상에 존재한다. 규칙적으로 파여진 물결무늬를 연상시키는 골판지는 정지된 형상이지만, 그 반복성으로 인하여 파동이 이는 호수나 바다의 물결의 움직임의 형상을 닮았다. 그것을 오래도록 보고 있는 작가는 그 속에서 반복하며 요동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깊은 선정으로 끌고 들어가는, 오롯하게 고정되거나 상승하는 정신의 단계를 보았을 것이다. 이는 불교의 참선(meditation)과 같은 것으로, 재료적 물성(物性)이 정신적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골판지는 물, 불, 대지, 공기와 같이 화가의 시적 상상력을 증폭시키거나 확장시키는 물질적 상상력(Material Imagination)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는 작가가 붓과 먹에서 구현하던 반복성, 동양화의 재료와 학습이 갖는 고도의 정신적 수행의 과정이 작가의 실험성과 만난 결실이라 하겠다.
이로써 탄생한 그의 화면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두 개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마를린 먼로, 고호, 존 레논, 모나리자 이들은 모두 잘려나간 골판지 위에 점으로 찍혀진 이미지들인데 날아오르는 새, 푸른 하늘, 구름, 떨어지거나 분출하는 물이 그려지고 반복적으로 찍힌 화면과 결합된다. 이들은 마치 지구와 대기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만유인력의 실험적인 움직임을 포착한 듯하다. 이러한 이미지의 탐구자와 같은 작가의 개별 모티브의 선택과 결합의 방식은 고전적 텍스트의 은유와 상징의 해석을 전복한다. 침범하고 고정되고 때로는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마치 우리가 깊은 밤을 유영하는 꿈속의 암시(暗示)나 작가의 직관에서 나온 언어와 같다. 마그리트의 비둘기가 구인성 작가의 화면에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것과 역사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문화의 아이콘을 설정하는 것은, 골판지로 구현해 내는 작가의 화면이 현대성과 물질성 그 틈새를 훑고 지나가는 신화가 되어버린 문명의 흔적(trace)을 날카롭게 건드리는 시각적 경험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신화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서 그 흔적들이 작용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는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의 말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2. 미끄러지는 이미지 또는 의미의 해체
점을 찍어 이미지를 완성해 낸 덧입혀진 화면들은 프로그램화된 컴퓨터 화면의 픽셀과 닮았다. 이는 작가의 작업적 원천이 골판지처럼 정교화 되거나 반복적인 현대 문명의 시각적 경험에서 출발하고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잘려진 골판지 사이로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교묘하게 중첩되고 침입하고 있는데, 모두 바탕의 화면들과 낯선 조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결합하고 있는 두 개의 의미들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변화하거나 일탈되고 또는 미끄러지고 있다. 신화적 아이콘(Icon)이 더 이상의 신화성을 띠지 않은 채 흐릿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배회하며 그 흔적들은 반복하며 차용되어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이미지로 변환되었다. 이를 후기 구조주의자 데리다(Derrida)는 디페랑스(differance)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공간적 사물과 시간적 운동을 포함하고 있어 고정된 고전적 의미의 형성과 해석을 해체시키며 개개의 의미들은 부유하거나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구인성의 화면에 보여 지는 이미지 또한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Simulacre)들이며 미끄러지고 부유하는 신화의 흔적만을 간직한 디페랑스의 의미체임을 간과할 수 없다. 작가의 오랜 관심의 영역에서 등장한 마그리트의 영향 선상에 존재하는 비둘기와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고착화된 문명의 아이콘들의 결합은 이질적이고 낯설다. 그들의 개별 의미들은 증발해 버리고, 단지 현대 물질문명을 반증하는 골판지의 규칙적으로 잘려진 선들과, 움직이며 유희하는 이미지의 놀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반격이며 해체이며 무의미이며 놀이이다. 어쩌면 이는 작가가 의도한 탐구의 대상이자 호기심이며, 물질이 이미지화 되는 회화의 본래적 가치에 관한 실험이며, 현대미술이 가진 본질적 의미들을 확인하는 장(場)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고전성을 해체시키는 동적(動的)인 작가의 화면은 사실 동양화의 부감법(俯瞰法)이나 삼원법(三遠法)의 시각을 닮았다. 앞서 얘기한 미디어의 본성을 함축하고 있는 이 정신적이고 적극적인 시각의 표현은 상상 그 이상을 실현하는 미디어아트에서 구현되는 선구적인 시각 처리방식이다. 이는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정신적 시각을 물리적 화면으로 변환시킨 것으로, 작가의 호기심이 획득한 성과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미지의 중첩과 터치의 반복으로 재료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물성에 회화의 덧입히기를 시도한다. 이미지의 고전적 해석을 반격하고 해체시킴으로써 골판지 자체의 미학적 아름다움에 주목함에 따라, 우리는 현대미술의 난해함 속에 빛나는 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이것이 구인성 작가의 탐구생활에서 온 회화의 즐거움인 것이다. (2011. 2)
전시제목디페랑스; Differance미끄러지는 이미지
전시기간2011.03.05(토) - 2011.03.25(금)
초대일시2011-03-05 16pm
관람시간10:00am~18:00pm
휴관일일요일
장르회화
관람료무료
장소한원미술관 Hanwon Museum of Art (서울 서초구 서초3동 1449-12 한원빌딩 지하1층)
연락처02-588-5642